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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Aug 25. 2018

비블리오 배틀(Bibliobattle)

독서를 활용한 지적 단련,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


비블리오배틀 방송[출처: MBC공식블로그]

한국은 책을 소개하는 공중파 방송이 없는 문화 후진국이다. OECD 국가 중 거의 유일한 것 같다. 촛불 이후에도 변한 게 없으니, 참담하고 창피할 뿐이다. 이달 초에 방영된 MBC 텔레비전의 서평 프로그램 ‘비블리오 배틀’은 이런 의미에서 무척 반가웠다. ‘독서의 사막’이었던 방송에 드디어 오아시스 하나가 생긴 기분이었다. 책의 해 기념사업의 하나로 방영되는 바람에 일회성 행사에 그친 게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지적 서평 대결’을 표방하는 비블리오 배틀은 2007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인공지능 연구자인 다니구치 다다히로 박사가 “인간의 뇌는 말하지 않으면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뇌 과학의 연구 성과를 활용해 공부 모임을 재미있게 운영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좋은 책을 즐겁게 소개하자는 독서운동 프로그램을 넘어서 학습에도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다.


규칙은 단순하다. 참가자가 미리 읽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책을 가지고 와서 줄거리, 감상, 추천 이유 등을 소개한다. 제한시간은 5분이다. 시간이 넘으면 자동으로 종료된다. 


포인트는 두 가지. 첫째, 5분을 반드시 채운다는 점, 둘째, 자료 없이 즉흥으로 말한다는 점이다. 소피스트의 연설이나 제자백가의 유세 같은 느낌이다. 공자나 예수나 붓다 등은 듣는 이의 삶을 송두리째 거듭나게 한 즉흥연설의 고수였다. 좋은 사고를 하는 사람은 분명히 좋은 연설가가 된다.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은 표현의 어눌함과는 별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다.


비블리오 배틀은 독서를 활용한 지적 단련으로, 정해진 시간에 한 권의 책에 담긴 정보를 압축해 전달하는 소통 능력을 길러주는 동시에 참가자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취향을 당당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마치 처음부터 학생을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는 게 아니라, 제한된 시간 안에 아는 만큼 수업하다 보면 수업 내용의 핵심을 깨달아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발표 후에는 청중 전원이 2~3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투표해 ‘챔피언 책’을 정한다. 이때에도 발표 내용에 대한 토론이나 비판이 아니라 추가 설명을 나누는 등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역시 시간을 초과하지 않아야 하는데, 발표 내용의 문제점을 발견하기보다는 자기 인상을 확인하는 게 목적인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규칙 하나 더. 교사나 사서나 심사위원 등 소수 권력자가 ‘챔피언 책’을 결정해선 안 된다. 이로써 비블리오 배틀은 연설과 토론을 통해서 결과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훈련장이 될 수 있다. 


일본에서는 2010년부터 해마다 전국대학생대회가 열리는 중이며, 비블리오 배틀의 유익한 점이 알려지면서 초중고는 물론이고 도서관, 카페, 기업 등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한국에서도 널리 보급되었으면 한다.


※ 《매일경제신문》 칼럼, 최근 MBC에서 방영된 프로그램 ‘비블리오 배틀’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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