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의원을 애도하며
사랑하라, 희망 없이, 마치 젊은 새잡이가
지주의 딸에게 자신의 높은 모자를 휙 벗어 날려 보내듯이,
그리하여 감금되었던 새들이 도망쳐 날아오르게 하라.
그녀가 말 타고 지나갈 때 그 머리 주위에서 지저귀도록.
사냥꾼 젊은이가 사랑에 빠졌다. 하필이면 신분이 전혀 맞지 않는 대지주 딸이다. 언감생심, 사랑을 이룰 가망은 거의 없다. 둘이 사랑에 빠지기도 힘들고 결혼에 이르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새덫 놓는 청년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처녀가 말을 타고 지나가려는 순간 모자를 벗어 날린다. 앓았던 마음을 해방시킨다. 감금된 운명을 풀어헤친다. 그녀의 머리 위에 사랑의 속삭임을 날아오르게 한다. 운명처럼 다가온 이 사랑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미국의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작품이다. 제목은 첫 줄과 같은 ‘사랑하라, 희망 없이’.
이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사랑의 관계는 자동판매기와 다르다. 동전을 넣으면 반드시 상품이 쏟아져야 하는 교환이 아니다. 모자를 날려 보낸 후, 아무 응답이 없을지라도 이미 사랑은 완벽히 성립한다.
사랑은 쿨하지 않다. 아니, 쿨할 수 없다. 도전하고 불리하면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찔러보고 반응 없으면 물러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교환이 확실할 때에만 사랑하는 것은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아무런 희망 없이 하는 것이다. 희망 없이도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은 비로소 위대함을 얻는다.
그래서 사랑에는 엄청난 모험이 필요하다. 만남을 새로 디자인하고 관계를 다시 창출하는 기쁨 없이, 사랑은 표현되지 않는다.
모자를 던지는 우아한 손동작을 고안하려고 새잡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밤을 번민했을까. 벽을 향해서 수없이 모자를 던지면서 훈련을 거듭했을지도 모른다. 단 한 차례, 자신의 절실한 마음을 표시하려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다. 끝없는 단련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다. 모자를 던져 새들이 노래하는 마법을 부릴 수 없다면,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양극화된 세상에서, 어쩌자고 약자를 사랑해 버린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떴다. 아무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순간에도, 그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멈추는 법을 몰랐다.
그가 사랑한 이들은 다수이지만 그가 소속된 정당은 소수이기에, 그는 정곡을 찌르는 유머와 모두를 즐겁게 하는 풍자를 발명해 사람들 관심을 끌었다. 마치 사냥꾼 젊은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아서 아깝게도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 사랑의 형식으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헛된 삶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시대에 희망 없이 사랑하는 법을 알았다고 믿는다.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