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을 추천할 것인가
예전에 직원을 면접 볼 때 감명 깊게 읽은 도서가 『데미안』이라고 하면 거의 무조건 탈락시켰다. 사실일 수도 있고, 때때로 그럴듯한 이유도 있었지만, 편집자로 살아가긴 어렵다고 보았다. 『데미안』이라는 대답은 대부분 고등학교 이후에 책을 많이 안 읽었다는 증거니까 말이다.
‘2018 책의 해’를 맞이해 한 전문지에서 현직교수 4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독서 관련 설문조사 결과가 소셜미디어에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수들의 독서 현황과 함께 ‘추천도서’ 목록을 발표했는데, 문제의 『데미안』이 그 목록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논어』, 『성경』, 『도덕경』, 『어린 왕자』 등 단골들과 함께 말이다.
추천 숫자 1위를 차지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그나마 이해가 간다. 최신 베스트셀러 중에서 지적 호기심을 길러 주고, 앎의 지평을 확장해 주는 책이니까.
하지만 목록에 자기계발 수준에 불과한 『미움 받을 용기』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로마인 이야기』가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최고의 지식인 집단이라는 교수들이 학생들한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다시 읽고 싶은 책’도 발표했는데, 『성경』, 『삼국지』, 『논어』, 『토지』 순이었다. 신앙이 이유라면 『성경』은 독서 목록에 들 수 없다. ‘읽는 기도’는 ‘독서’라 하기 어렵다.
일본의 문학비평가 시라이시 요시하루의 말을 빌리면, 독서는 종교의 세계를 떠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삶의 텍스트를 이룩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 종교라면, “인간이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 문학, 즉 독서다. 따라서 『성경』은 문학적, 역사적, 철학적 텍스트로 읽는다는 전제에서만 독서 목록에 오를 수 있다.
아울러 이 목록에 『고구려』 같은 대중소설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정체불명의 편집본이 오른 것은, 아무리 개인 취향을 고려한다 해도, 충격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도 있었는데, 이것을 과연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두 목록의 진짜 문제는 새로운 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대로 답한 목록과 거의 다르지 않다. 추천도서 대다수는 일정한 지적 수련 없이 읽기 힘든 고전들이다.
고전은 당연히 읽혀야 하고, 또 읽어야 한다. 고전에는 인류가 올랐던 가장 높은 수준의 사유가 담겨 있다. 이 힘을 내면에 데려오는 것은 분명히 인간을 고양하므로, 얼마든지 추천할 수 있다. 하지만 고전은 교양수업 등을 통해 교사와 함께 학습할 책들이지 알아서 읽으라고 하면 안 된다. 굳이 이런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면, 강독 수업을 함께 여는 의무를 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대학에 이런 수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요즈음 도서관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강독 중이다. 그런데 같이 읽는 분들 대부분이 책만 사 두고 아직 못 읽은 분들이다. 혼자 읽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책을 추천하면, 학생들은 독서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다.
추천도서는 삶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격조 있는 사유와 우아한 문장을 구사하는 현대 소설이거나, 학습과 연계되어 있으면서 학생들 시야를 넓혀 주고 다른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하는 책일수록 좋다. 세상에는 저자들과 편집자들의 오랜 협업을 통해 분야마다 현대의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이 수없이 나와 있다. 책을 자주 읽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책을 추천한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추천 도서나 다시 읽고 싶은 책 목록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교수들, 신간을 정말 안 읽는구나!’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슬픈 일이다.
※ 관련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고할 수 있다.
교수 연간 독서량 44권⋯ 도서구입비 평균 64만원 지출
교수 추천 도서 1위 '사피엔스'⋯ “융합적이고 쉬운 글쓰기에 매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