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tincelle Dec 12. 2015

폭력은 실패로 귀결되는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와 옐로저널리즘

                                                                                                                                                                                                                                                                                   




고등학교때 읽은 유시민씨의 <청춘의 독서>에 소개되었던 책이라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별렀던 책이다. 그렇지만 곧바로 읽지는 않았다. 옐로 저널리즘의 잔혹성을 다룬 내용의 책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기에, 예상 가능한 내용의 책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상 가능한 내용들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 예상 가능한 내용들에서,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내용들이 펼쳐졌다. 문제는 그 내용들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분명 어디선가 보고 듣고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다소 특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가 '소설' 대신에 '이야기'라고 칭할 정도로 담담하고 짤막한 서술.






그리고 제목-부제-모토라는 요소들이 이 이야기를 떠받치고 있다는 점.


이 이야기는 제목,부제,모토를 곰곰히 씹어볼 때 좀더 섬찟하게 다가온다.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서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 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는 모토.




본 이야기에서 발생한 폭력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로, 옐로 저널리즘의 선봉주자 <차이퉁>의 기자 퇴트게스가 카타리나 블룸에게 가한 폭력. 폭력의 주체는 다르지만 경찰의

수사과장과 기타 인물들의 폭력 역시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폭력의 피해자 카타리나 블룸이 가해자로 탈바꿈해, 퇴트게스를 살해한 데서 발생한 폭력.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두번째 폭력은 전적으로 첫번째 폭력에 의해 잉태된 폭력이란 것이다. 폭력에 의해 발생한 폭력인 것이다. 결국 퇴트게스의 폭력은 본인에게는 죽음이라는 파멸을, 카타리나 블룸에게는 사회적 파멸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다.


 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에 의거하는 행위 자체가 자칫 폭력을 영속화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란 것도 사실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총격은 실패다. 그는 정당한 수단을 통해 기자에게 복수를 하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그런데 그녀에게 다른 방법이 존재했을까?


한낱 프리랜서 가정부에 불과한 그녀에게 독일 전체를 쥐고 흔드는 거대매체 <차이퉁>에 맞설 칼자루가 있었겠는가. 설령 그녀가 유명 정치인이라 하였을지라도 별다른 수단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저널의 힘은 소름끼치게 막강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총격은 피할 수 없는 실패였다.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실패의 한가운데서, 조금 더 능동적인 실패를 택했을 뿐이다. 비방 기사의 늪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것 보다는 나은 결과이니까. 적어도 복수는 하지 않았는가.


<정의>라는 가치하에서 카타리나 블룸의 총격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행위이다. 어쨌건 간에 살인이니까.


법의 틀 하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회>의 틀 하에서 그의 행위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가 행한 폭력이 아니었다면 미디어와 사회가 그에게 가하는 폭력의 종언은 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테러리즘의 정당화는 굉장히 위험한 주제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비폭력적 봉기를 지향해야 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다른 말을 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본작의 모토를 곱씹어보자. <빌트>지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변이 오히려 <빌트>지와의 유사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미디어의 옐로저널리즘이 얼마나 가혹한 덫을 짤 수 있을까. 아마도 한 개인이 타개할 방법은 몇 가지 없을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몇 가지 방법만이 남아 있겠지.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도 <빌트>같은 언론은 존재한다. 어쩌면 더 심할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덮을 즈음에 나는 옳지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카타리나 블룸의 테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라서. 누군가가 떠올라서. 그는. 카타리나 블룸보다 훨씬 권력이 있었'던' 개인이었는데도. 미디어가 써놓은 소설에. 그는 맥을 추지 못하였다. 대중들은 그 소설에 완벽히 놀아났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차라리 그가 블룸처럼 테러를 선택했길 바란 적도 많았다. 그러나 너무나 고결했던 그는 자신이 모든 짐을 떠안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하늘로 떠올라갔다.


몇년후, 미디어에 소설의 글감을 제공했던 당사자들이 사실은 거짓이었노라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한줌 재가 되어 있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차라리.. 차라리.


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이 든다.



폭력은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실패일까. 다른 모든 가능성의 결과가 '실패'일 경우에도,

성공일 수는 없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덕수궁 시지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