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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Dec 08. 2015

덕수궁 시지프

또다시 굴러 떨어질 돌덩이를 위하여





“너  OOO 경찰서야.”


예상치 못한 시점에,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즈음이면 슬슬 어느 부대로 배치될지가 정해진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무튼 뜻밖이었다. 육군훈련소 수료 이후로 근 2주만에 받아드는 스마트폰의 터치감이 낯설었기에, 서툰 손짓으로 타이핑을 하는 대신 육성으로 친구에게 추가적인 질문들을 쏟아내었다.


“확실해? 어떻게 알았는데? 거기 어떻다는데? 어떤 근무 서는지도 알아? ”
“의경 안에 우리 고등학교 네트워크가 생각보다 탄탄하거든. 너 이번주에 배치받는다니까 궁금해서 서울청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는 친구한테 물어봤어. 재환이 알지? 보통 서울에서 근무하는 의경들, 이곳 저곳에서 터지는 시위 막는데 동원되잖아. 그런데 너희는 좀 달라. 덕수궁 알아? 덕수궁 돌담길 부근에 있는 주요 구역들 지키게 될거야 아마도. 그리고 말이지……. 야, 듣고 있어……? ”


그 이후의 대화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덕수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아련하게 아른거리는 기억의 파편들이 내 눈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덕수궁, 이란 말이지.





갑자기 덕수궁을 걷고 싶다는 충동이 솟구쳤다. 그래, 내일이 입대인데. 뭐든 간에 내키는 대로 하고 가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종각이었던 약속 장소를 급작스레 틀었다. 입대가 하루도 채 안 남은 예비 군인의 변덕에 친구들은 생각 외로 관대했다.


“시청역 11번 출구로 와. 덕수궁을 꼭 보고 가야겠어.”


별일이라고. 무슨 바람이 들었느냐고. 왜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돌담길 말고는 볼거리도 딱히 없는 덕수궁이냐고 대학 동기들이 실쭉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됐고. 마지막 소원이니까 군말 말고 웬만하면 좀 들어 줘라. 이따 보자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카카오톡을 켜 보았다. 입대 이후로 한 번도 바꾸지 않은 프로필 사진에 그곳이 담겨 있었다. 돌담길, 그리고 그 앞에서 환히 웃고 있는 나와 친구들. 정말이지, 거짓말 같은 현실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언제나 현실이 더욱 드라마틱한 법이라고. 서울시에 있는 경찰서만 서른 군데가 넘고, 기타 진압 중대까지 헤아리면 백여 군데는 될 텐데. 하필 이곳에 오다니. 우연이라고 웃어넘기기엔 너무나 기막힌 우연이었다. 순간적인 충동이 이끌어낸 덕수궁 투어가 군생활 사전 답사가 될 줄이야. 아하, 그날 친구들과 봤던 경찰 아저씨들이 내 미래였구나. 이화여고 기숙사 앞에 서있는 것을 부러워 했던 그 아저씨들이 내 선임이였구나. 아차, 아저씨도 아니였구나. 아직 스물셋인 내 또래의 친구들인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아는 체라도 해둘 것을. 물론 알 턱이 없었지만 말이다.





통일로를 달리나 싶더니 어느새 연신내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더 달려 서울역과 마주하고 있는 남대문경찰서에 도착했다. 막상 와보니 더 기가 막히다. “여기가 거기였어?” 회현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로 불어를 배우러 다니던 작년 여름, 늘 지나던 그 길과 건물이었다. 굳이 그렇게 구차한 인연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기구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형용하기 모호한 친숙함들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인상의 행정반 대원이 우리를 부른다. 중대장님과 면담이 잡혀 있단다. 바짝 얼어서 방으로 따라 들어간다. 금속테 안경을 쓰고 반듯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중대장의 외모가 철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의경에 자원입대한 동기가 무엇인가?” 아, 이 자리에 있기 위해 갔던 의무경찰 모집 면접에서도 들었던 질문이다. 세상에나. 징병제 국가에서 군대에 들어온 동기를 묻다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무얼 듣고 싶은 걸까.






이제는 오롯이 혼자 남을 때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준 친구들을 보냈다. 그렇게도 싫어했던 덜컹거리는 1호선에 몸을 실었다. 이마저도 그리워 질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야 비로소 현실감이 들었다. 시청에서 내렸다. 노량진에서 내리면 편하게 9호선을 타고 집까지 올 수 있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전에 나를 부추긴 그것과 비슷한 종류의 충동이었다. 별 이유는 없었다. 당분간 헤어져 있어야 할 한강을 보고 싶었다. 굳이 어두컴컴한 지하를 쓸데없이 치열하게 내달리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가 않았기에. 불과 몇 시간 전에 돌았던 대한문과 돌담길을 다시 지나, 1002번 버스에 올라 탔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창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한강이 떠올랐다.






어디까지 말을 하는 것이 현명할지,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한다던데. 모르겠다. 그냥, 나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를 선택한다.


“장래 희망이 기자입니다. 그런 제가 왜 의무 경찰에 지원했냐고 물으신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은 업무의 특성상 경찰과 필연적으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제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시위대를 진압해야 하는 의무경찰에 지원한 사실 자체가 심각한 자기모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군 복무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자의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타의에 의해 들어오게 된 군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능동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21개월간 역지사지를 몸소 체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설사 제가 생각하던 방향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소중한 경험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올 때가 돼서 끌려 왔다는 느낌은 주기 싫었다. 생각 이상으로 말이 술술 나온다. 실수한 것은 아닐까? 알 듯 말 듯 모호한 미소를 띠고 있는 중대장이 입을 뗀다.


“대원은, 큰 연필이 되겠구나. 연필이 뭐냐고? 기자를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는….”





학교에 가는 길에 2호선을 거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 시내 지하철 중에 가장 미어터진다는 9호선 급행을 타기 싫어서, 그리고 퀴퀴하며 느려터진 1호선을 가급적 짧은 시간 동안만 타고 싶어서. 그래서 6631번 버스를 타고 당산에 간 후, 시청까지 2호선을 타고 가는 것이 내 통학 루트이다. 그리고 하나 더. 당산에서 합정으로 이르는 동안, 한강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이다. 좀 우스울 수도 있겠다만은, 당산철교와 양화대교 사이에 펼쳐진, 차라리 바다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한강을 보면 늘 안정이 되곤 한다. 때로는 경건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강은 삭막하기 그지없던 내 중학 시절의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리고 그 한강은 기나긴 수험생활 동안 하나의 등대처럼 기능했다. 이 강을 건너, 저 다리 너머에 있는 대학에 간다면 내가 꿈꾸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았다. 두 번째 수능을 치르기 얼마 전, 재수생 친구 두 명과 함께 손을 맞잡으며 저 다리를 건너가자고 다짐하던 것이 아직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셋 모두 그 맹세를 약속이나 한 듯이 사이좋게 어겼지만 말이다. 나는 그때의 바람을 그대로 이루진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내 기대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또 일 년 일 년을 보내다 보니, 꼭 그 길만이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길에 이르는 다른 길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한강을 지나면서 그리는 앞날은 수험생 때 그리던 앞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리 고집스럽게 한강을 목도하고, 건너려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강은, 내가 그렇게 우악스레 의미를 부여한 첫 번째 상징이었다.






부대의 낯선 공기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실전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일손이 많이 달린단다. 업무 자체는 지극히 단순했다. 덕수궁 주위를 아우르는 시설을 지키면 된다. 근무 사이클도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다. ‘주간근무-철야근무-비번’의 주기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굴러간다. 일요일이든, 공휴일이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정해진 시간에 나간다. 정말이지 극도로 단순하고 명쾌한 일이 아닌가. 바꾸어 말하자면, 끝이 없어 보이는 쳇바퀴를 핑글핑글 돌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루함과의 싸움을 견뎌 내면서. 처음 일주일 정도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업무조차 감사했다. 두 달여 동안 문명과 차단된 군부대에 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입대 전날 거닐던 그 장소에서 근무를 선다는 사실도 괜히 설렜다. 별것도 아닌 우연인데 말이지. 그런 소소한 즐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근무에 벌써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에 4시간씩, 8시간씩, 많으면 10시간씩. 600일을 이곳에서 보내야 한다. 주간 근무가 끝나면 곧바로 야간 근무가 닥쳐오고, 비번에 한숨 돌리나 싶으면 다시 턱밑까지 주간 근무의 압박감이 차오른다. 무얼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나.


입시는 그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는 여정이다. 누가 그걸 좋아할 수 있을까. 그 피말리는 전쟁을. 외국어고등학교에 합격한 순간은 내 짧은 인생 중 느꼈던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그 환희가 사그라지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지만 말이다. 앞으로도 이런 숨 막히는 과정을 3년이나 더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임해야 한다는 점이 입시의 특징이며 본질이다. 그렇기에 그 와중에 기댈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그 무언가를 ‘한강’에서 찾았다. 한강을 바라보며 한 번의 고교입시와 세 번의 수능을 견뎌 내었다. 마찬가지다. 군 생활 역시 누구라도 과정 그 자체를 사랑하며 즐거이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600일을 버티게 해 줄 또하나의 등대를 찾게 되었다.





어느새 부대에 전입해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이제부터는 매주 외출을 나갈 수 있다. 첫 외출을 나가 제일 먼저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른다. 지난 두 달간 활자에 목말라 있었다. 읽을거리에 대한 갈망에 이끌려 정신없이 서가를 뒤적거린다. 르 몽드에서 출간한 <마니에르 드 부아> 시리즈를 팔 한편에 끼고 문학 코너로 잰 걸음을 한다. 투박한 표지를 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삶의 모토로 제시하는 아버지와 설전을 벌였다. 아버지께서는 비관주의자 아들을 바꾸어 보려고 단단히 결심하셨는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인용하며 열변을 토하셨다.


“이게 그냥 그런 에세이가 아니라니까? 읽어나 보고 그런 말을 해.”

“피할 수 없는 와중에, 즐기기까지 하라니. 너무 과한 요구야. 그리고 신들을 기만해서 벌받는 시시포스를 누가 그렇게 미화를 하고 의미 부여를 해. 단순한 권선징악 이야기야 ”

“작품의 재해석은 작가의 고유한 권한이야.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때는 그럴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 장담했었는데.





7년 후의 나, <시지프 신화>를 탐독하고 있다. 텍스트 하나 하나를 곱씹어 가며 읽어낸다. <시지프 신화>는 본질적으로 허무에 관한 이야기다. 신들은 자신들을 기만한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영원히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처음으로 다시 떨어지게 된다. 남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돌덩이를 굴려 올려야 하는 무한의 노동이 남기는 것은 그에서 오는 허무뿐이다. 그러나 카뮈는 말한다. 신화란 상상력으로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으라고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그가 재창조한 시지프는 절망스런 부조리의 연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영웅이다. 운명을 거스르는 영웅의 모습을 바라본다.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고통의 정도는 비교할 수 없지만, 시지프의 노동과 나의 복무가 겹쳐 보인다. 덕수궁을 감싸 올라가는 돌담길을, 그 오르막을, 시지프가 돌을 굴려 올리는 산에 대응시켜 본다. 어쩌면 그 허무마저도 이름 붙이기 나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수동적 자세로 일관하는 근무는 그 자체로 고통이다. 능동적이기 힘들다.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이 아니니까. 나를 위하는 일이 아니니까. 군대라는 의무 자체가 타인에 의해 짊어지게 된 짐이 아니던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에는 공감하고 애석하게 생각하는 터이지만, 내가 지고 있는 돌덩이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할 만큼은 아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비극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음에서 잉태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훨씬 편하다. 하루하루 의식하면 느는 것은 고통뿐이다. 그렇게 부단히도 날짜를 세어봤자 겨우 일주일에 1퍼센트 남짓 복무율이 올라가는 것이 전부니까. 그럼에도 여기서 마냥 비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미를, 능동을, 찾아야 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줄곧 외치던 말, “Car pe Diem(현재를 즐겨라)”. 어린 나로선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현재는 꾸역꾸역 넘기기에도 벅찬 것을. 그래서 차라리 웃어넘기기를 선택했다. 그래, 저건 영화잖아. 현실의 현실은 다르다고, 되뇌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시지프를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돌덩이를 굴려 넘기고 있을 시지프를 생각한다. 정상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를 바라보는 그 찰나의 정적을 지켜볼 시지프를 생각한다. 숙명 속에서도 자의식을 찾는, 시지프를. 이 복무중에, 돌담길은 끊임없이 내게 시지프의 산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대면하고 있어야 하는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지프를 본다.





어느 새엔가 두 번의 계절이 흘렀다. 겹겹이 두꺼웠던 근무복이 반팔이 되었다가, 다시 갑갑한 옷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내가 처한 부조리에 무뎌진다. 그러나 그 부조리가 벼려 낼 한 자루 칼을 가슴에 고이 품는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 칼로, 카뮈의 변(辯)을 가슴에 아로새긴다. 빛나는 순간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려 본다. 이 부조리한 시간을 어떻게든 들러메고 갈 내 모습을. 또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묵묵히 굴려 올릴, 덕수궁의 시지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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