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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Dec 05. 2015

틀림과 다름의 가름

'제제유감'에 대한 때늦은 단상




아이유의 신곡 ‘스물셋’을 듣자마자 그가 그려졌다. 이상은.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혜성처럼 등장한 아이돌. 그는 몇 년간의 공백과 수련을 거쳐 <공무도하가>라는 걸작을 만들었고, 하이틴 스타의 멍에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이 나라를 대표할만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물론 아직 아이유가 이상은의 이름값에 부응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커리어도 한참 부족하고, 아티스트적 에고(ego)도 그정도까지 만개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모던타임즈>로 움틔운 싹이 이파리를 내민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자그만 가능성에 자꾸만 눈이 갔다. 만들어진 취향과 몰개성이 판치는 대중음악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음악성까지 동시에 움켜쥘 수 있는 가수를 보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기에 그저 설레기만 했다. 이런 파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놀랐다. 이정도로 몰지각할 줄이야. 굳이 입밖에 내진 않더라도 본인들의 취향을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을 줄 알았다. 누가 뭐래도 아이유는 롤리타의 아이콘이었다. 아이유를 그렇게 정해 놓은 것은 대중이었다. ‘미아’로 데뷔했던 아이유는 철저하게 묻혔다. ‘마시멜로’를 내놓고서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좋은날’에서 ‘오빠가 좋은걸’이라는 낯간지러운 3단고음을 질러내고서야 ‘국민여동생’의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다. 가수답게, 노래 그자체로 승부하려 했을 때는 철저히 외면받았던 것을. 자신들을 삼촌팬이라고 정의내리는 이들이여, 생각해보자. 정말로 일말의 흑심 없이 아이유를 소비했는가? 그 과정에서 죄책감 비슷한 설렘을 단 1초도 느껴보지 않았단 말인가? 솔직해지자.



나는 발칙한 아이유가 좋았다. 자신을 ‘꼬인’ 눈으로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조롱할 줄 아는 그 발칙함에서 남다름을 느꼈다. 적어도 천편일률적인 기획사의 공산품들과는 결 자체가 다르니까. 대중들도 그런 식으로 아이유를 소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였나보다. 아이유가 정말로 '아이처럼 귀여워서' 그렇게까지 좋아했단 말인가? 그렇단 말이지. 글쎄. 넷상의 말을 빌리자면, 지난 몇년간 아이유는 ‘너희들, 이렇게 어린 나를 보고도..?' 하고 비웃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롤리타 컨셉이였는데. 롤리타에 열광하는 대중에 대한 비틈. 그게 아이유의 페르소나였다. 양파껍질 까듯이 나오고 있는 아이유의 ’롤리타‘ 코스프레는 그정도로 일관적이였는데. 하트모양 롤리타 안경을 이제서야 알아봤다고 소리높여 성토하는건 가여울만치 안타까운 무식의 발로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소설이다. 다큐멘터리도 뉴스도 아닌. 본질은 그 지점에 존재한다. 픽션이기에 수십년동안 스테디셀러의 자리에 있을만큼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픽션이기에, 재해석과 2차창작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떻게 소설- 문학! -에 단 하나의 해석을 요구한단 말인가. 하다못해 보다 사실에 기반한 ‘역사’를 서술한 ‘국정화교과서’의 단일화도 이렇게 이슈가 되는 세상인데. 같은 맥락의 문제라는 것을 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심지어는 작가 본인의 해석마저도 문학평론의 영역에서는 절대적 메시지가 되지 못한다.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의 영역이며, 권리이므로. 그래서 출판사 동녘의 끼어듬은 불편하다. 마치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이 모든 논쟁을 끝낼 절대적 해석인 양 ‘선언’했다. 작가의 의도를 우리가 제일 잘 안다는 교만. 그리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교조적 권위. 제제라는 캐릭터의 입체성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다. 독서의 결핍이 아주 당연한 요즘 세대에게는 벅찬 장애물이고.




80년대를 주름잡았던 섹스심벌, 브룩쉴즈. 그녀는 심지어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페도필리아 및 아동성범죄에 모두 해당하는 영화를 찍었다. 십대의 브룩 쉴즈가 성매매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프리티 베이비>. 페도필리아 및 소아포르노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당시에도 많은 비난을 받은 작품이다. 그럼에도 '작품의 폐기'같은 얼토당토 않은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중이 요구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니까. 


너무나 극단적인 예시라고? 좀더 일반적이고, 쉽게 와닿는 대중적인 작품들로 시선을 돌려보자. <레옹>. <은교>.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이들 역시 ‘롤리타’라는 컨셉을 차용한 작품들이다. <레옹>에서 뤽 베송이 그려낸 롤리타 컨셉의 수위가 아슬아슬하다는 지적은 당시에나 지금에나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그런 식의 매체적 표현 자체가 불편하다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취향의 영역이니까. 대신 ‘제제’와 아이유를 까고 싶으면 페도필리아를 다룬 모든 매체에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된다. 의도의 순수성과 정합성을 의심하지 않을만한 일관성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아이유를 욕하고 제제를 욕하려면 이런 소재를 다룬 모든 매체에 같은 메스를 들이대라. 그럴 의지와 에너지가 있다면 실질적 소아성애 척결에 애쓰는게 사회적으로 더 효용이 높은 일이겠지만. 


한동안 뜨거운 이슈였던 '아청법'이 왜 욕을 먹었는지 돌이켜보자. 사회적으로 정말로 필요한 일ㅡ실질적 소아성애척결ㅡ 대신에 2D캐릭터의 인권 보장에 초점을 맞춰서 아니였던가. 그리고 그걸 읽을 인간의 자유를 금지해서였고. 아이유가 욕을 먹으면 페도필리아의 척결이 가능한가? '제제'의 음원을 폐기처분하면 아동성애범죄자들이 뜨끔해서 활동을 멈출까? ‘제제’ 는 페도필리아를 사회적으로 조장하는 노래인 것인가? 모두 아니올시다.






본 논란의 본질을 관통하는 카뮈의 격언으로 이 성토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Être différent n'est ni une bonne chose ni une mauvaise chose. Cela signifie simplement que vous êtes suffisamment courageux pour être vous-même

다르다는 것은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 기준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단지 당신 자신의 모습을 지킬 정도로 당신이 충분히 용감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틀림과 다름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할 수 있는 능력도 분명 ‘교양’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아이유가 조금더 용감했으면 좋았겠지만, 대중의 사랑은 이성적이지 않은데 어쩌겠는가. 그저 꼬리를 내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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