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는, 죄다
나는 사람들이 약자에 약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철저히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 성선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도전적인 언설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당한' 적이 있는가? 나는 별로 그런 적이 없다. 불쾌할 정도로 미어터지는 일호선에서조차 말이다. 키 180cm가 넘는 성인 남성으로 자라난 이후에는 더더욱 그렇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란건 이미 강자의 스펙이다.
사람들은 약자에게 가서 동정을 구한다. 또는 뻔뻔스러울만치 당연하게 요구를 한다. 앉아 있는 나를 지나쳐 장노년층이 향하는 곳은 보통 여학생들의 자리였다. 그리고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보통 스스로 일어나곤 한다.
과연 그들이 남성이었다면, 그렇게 쉽사리 양보를 당했을까. 아닐 것 같다. 나는 앞에서 헛기침을 하는 할아버지들이 두렵지 않다. 내가 더 강한 존재니까. 완력으로 보나 무얼로 보나 밀리지 않으니까.
그러나 여성이었다면 마냥 태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얌전히 비키는 것이 맘편한 선택지다.
강남역에서 23세의 여성이 묻지마 살인을 당했다. 어스름한 뒷골목도 아니고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인, 강남역에서 말이다. 강남역에서 당할 수 있다면 그 어디에서라도 안전하지 않다는 소리다. 또라이 한 명의 소행이라 말하고 싶다고? 관두어라. 당신이 남성이어서 할 수 있는 소리다.
그 한 명의 또라이에게 희생당한건 한 명의 여성이다. 남성이었다면, 당하지 않았다. 애당초 덤비지도 않았을 것이거니와 성인 남성은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중립만큼 달콤한 단어가 없다. 원판 위에서 여유롭게 가운데 자리를 점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중간이 아니다. 중산층이 중간계층이 아니듯이, 중립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이미 기득권이다. 이 와중에 중립을 지키겠다며 어설픈 사회학적 분석을 늘어놓겠다면 제발 관두어라.
이 사건을 보고도 페퍼스프레이나 은장도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은 1초도 못 해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억울하다고 빼애액거리지 말아 달라고.
전체를 매도하지 말란다. 좋다. 물론 모든 남성이 그런 싸이코는 아니다.
그런데, 여성이란 집단 전체는 누구나 그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단지 그 시간에 강남역 화장실 해당칸에 들어가지 않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전체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지금 희생당한 고인도 즐겁게 봄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누구라도 대신 당할 수 있었으니까.
무지는 죄다.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외우지 못하는 그런 하찮은 무지를 말하는게 아니다.
이번 사건에서 벌어진 힘의 논리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를 말하는거다.
남성은 여성보다 강하다. 강자는 강자에게 밀리지 않는다. 강자는 약자에게 강하다. 약자는 강자에게 약하다. 강자 중 약자라고 해도, 상대적으로 강자다.
그래서 약자는 상대적 강자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우리는 남성이라 무섭지 않다. 강자다. 그래서 이성적인 척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 스탠스를 취할 기회조차 갖고 태어나지 못한 상대집단을 조롱하지 말아라. 그걸 꼭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쯤 되면,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