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져버린 '유러피언 드림'
BBC 웹페이지에서 'Brexit Referendum(브렉시트 총선거)' 현황을 보고 있었다. 런던 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잔류 쪽으로 뒤집혔다. 그리고 차이를 조금씩 벌리고 있었다. 한국의 개표방송을 볼 때, 야당 강세인 수도권 표를 까는 느낌이었다. 그래. 설마. 이젠 맘 놓고 나가봐도 되겠지?
거짓말처럼 '브렉시트'라는 글자가 TV를 뒤덮었다. 근무를 다녀온 몇 시간 사이의 일이었다.
너무나 큰 사건에 좀체 실감이 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뉴스를 보면서 서서히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태양은 졌구나.
현상화된 이상
남들이 무얼 위해 그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냐고 종종 물어 온다. 보통은 웃어넘기지만 가끔은 그 질문의 무게감이 남다를 때가 있다. 그러면 큰맘 먹고 프로필에 써놓은 메시지를 읊어 준다. 정치철학의 현상화를 그려내고 싶다고.
간단히 말하자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글을 택한 것이고. 너무 순진해 보여서 보통은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아니니까.
EU는 그렇게 내가 그려내고 싶어 하는 이상향과 많이 닮아 있는 공동체였다. 가보지 않은 대륙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건 아니었다. 토머스 모어가 말했던 유토피아(Utopia)는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이다. 그렇지만 EU는 그렇게 상상 속 동물처럼 존재했던 유토피아를 현실에 어느 정도는 구현해 낸 듯 보였다. 그 통일은, 나라마다의 속내가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참 이상적이었다.
하나의 유럽이라니. 그걸 꿈꾼 군국주의 권력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결국 유럽 통일의 매개는 공조와 평화였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필요 없었다.
경제적으로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른다. 전문가들이 영국의 GDP 몇% 가 빠져나가느니, 마이너스 성장을 할거라는둥 온갖 말을 늘어놓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를 듣고 어떻게 사태가 흘러갈지 희미한 방향성을 짐작해 볼 뿐이다.
그런 심각한 후폭풍이 부수적으로 보일 정도로 '이탈'의 충격은 크게 다가온다. 하나였는데,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 이탈자가 생겼다. 여기에서 파생될 나비효과가 어떻게 될지도 단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얼추 셈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연합은 '통합'을 상징했다. 작다고는 해도 유럽은 무려 40여 국가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대륙이다. 얼마나 다양한, 상충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겠는가. EU는 그런 수십 개의 나라와 문화권을 하나로 엮음으로써, '이질성의 통합'이란 가치를 수호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결성되진 않았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초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분명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다. 그 와중에도 '서로'의 이익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발돋움할 징조가 보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1차대전 이후 창설된 국제연맹도 어떻게 보면 미국의 패권을 위해 만들어졌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후 UN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세계시민의 가치를 수호하는 집단으로 발전해 나갔다.
ECSC에서 EC로, 그리고 EU로 점차 확장된 과정도 그런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그런 하나의 유럽이 깨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손실이다.
읽을 책이 바닥나 집에서 가져온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을 읽고 있었다. 리프킨은 '아메리칸 드림'이 깨져 버린 지 오래인 이 세상에서 '유럽 공동체'가 새로운 이상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
브렉시트가 터진 후 서문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몇몇 챕터를 빠르게 훑었다.
작가의 의도가 이렇게까지 어긋날 수 있을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세상 일이라지만. 그렇게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꿈을 관찰하는 기분은 참 묘했다.
틀어져 버린 꿈
과거 계몽주의 시대의 꿈에서는 자유가 자율성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사뭇 다르다.
자유로우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다. 현대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돈이 문제였다. 자신을 컨트롤할 정도의 돈이 있다면 아무래도 자율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유러피언 드림'에서는 자유가 그와 정반대로 규정되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얽혀 들어가는 것이다. 그 관계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접근 수단이 필요한데, 이를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관계에 포함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 셈이다.
리프킨은 EU라는 공동체를 인류의 새로운 희망으로 상정했다.
그리고 단순히 재산권과 관련되는 '자율성'을 넘어서, 인류애와 보편적 인권과 관련되는 '자유'라는 개념을 역설했다.
물론 이타주의와 온정만으로는 인류애 정신과 보편적 인권을 수호할 수 없다. 브렉시트 이전의 EU는, 이를 지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정치체제였다.
EU는 회원국과 그 관할 내에 살고 있는 5억에 달하는 인구를 대상으로 보편적 인권 조항을 집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역사상 최초의 비영토기반 정치체계'로 기능한다. 인권을 국가의 영토와 분리시킨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렇게 당연한데 당연하지 못했던 가치는, EU라는 운명공동체 안에서 움츠리지 않을 수 있었다.
민주주의 이론가 데이비드 비덤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보편적인 인간애뿐만 아니라 공동 위협에 대한 노출도
인권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해 준다.
브렉시트는 이런 보편적 인권에 대한 포기다. 자기만 잘 살겠다는 이기심의 처절한 발로다. 그게 마냥 나쁘다곤 못하겠다.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의 발현이니까.
그렇지만, 좀 더 높은 차원의 인간성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공감의 포기는 딱 그 정도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영국인들은 EU라는 공동체 내의 관계 대신 소극적 자율성을
하나의 유럽 속에서 펼쳐질 샐러드 보울 대신 멜팅 팟을
유럽적 가치를 수호하는 대신 당장 손에서 새어나가는 돈다발을
선택했다.
유러피언 드림은 말 그대로, '꿈'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브렉시트는 하나의 유럽이 가질 수 있던 그 모든 상징과 가치를 깨부순 일대 사건이다.
이미 계층이 고착화되고 이동성이 막혀버린, 일그러진 '아메리칸 드림'이 겹쳐 보인다.
1948년, 2차대전의 폐허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던 와중에도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나라 국민들이 자신이 조국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유럽인으로 생각하고, 이 넓은 대륙에서 어디를 가든 '편안하다'고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유럽'을 만듭시다.
66년 후 2016년, 처칠을 배출한 보수당은 브렉시트로 응답했다.
오래된 자유로 돌아가겠노라 선언하며, 후퇴로 보답했다.
꿈에 대한 지향이 갈리면, 선택의 방향도 달라진다. 제러미 리프킨과 같이 '함께-존재'로서의 사회가 구체화되는 꿈으로서의 '유러피언 드림'이 이루어졌다면 좋았겠지.
기산점이 왔다. '유러피언 드림'은 브렉시트를 기점으로 깨졌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이고 실질적인 이권의 측면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인권, 자유, 평화의 관점에서의 연대를 위해.
단순히 유럽 대륙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도, 장기적으로는 전 세계가 함께해야 할 큰 흐름이다.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 '불가능성의 꿈'을 놓치지 않고 있던 이들에 의해서 인류 역사의 변화가 이루어져 오지 않았는가.
태양은 이미 졌다. 사실 대세는 아주- 오래전에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렇지만, 영국은 영국이었다. 커먼웰스라는 이름의 영연방이 존재했고, 수장으로 군림하면서 과거의 영광은 흐릿하지만 형식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이 영영 져버린 순간은 지금이다. 미국에 헤게모니를 넘겨준 시점이 아니라, '위대한 브리타니아 Great Britain'으로서의 품격을 내던진 2016년이다.
태양은 졌다. 그들은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로의 복고를 꿈꾸었겠지만, 이미 태양은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