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A 설현·지민, 그리고 포탈여론
아이돌은 끼를 타고난 이들이 하는 게 알맞다.
본인이 속한 그룹의 속성과 타깃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스타가 되겠다는 상승의지 역시 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팬들에게 그들이 덕질하는 그룹이 높은 확률로 빛을 볼 거란 믿음을 줄 수 있으니까. 그런 아이돌이어야 신뢰가 가고 덕질 할 맛이 난다. 주체할 수 없는 끼가 없는 이들의 엔터테이닝은, 예견된 실패로 이어진다.
타고난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좋다. 빼어나게 예쁘거나, 노래를 잘 하거나, 춤을 잘 추면 그만이다. 어쨌건 간에 그들 역시 연예시장에서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졌다.
AOA의 설현과 지민은 이 중 많은 요건을 충족시키는 아이돌이다. 짧은치마- 사뿐사뿐- 심쿵해 세 곡을 내리 히트시키며, 정상급 아이돌로 자리 잡았다. 지민은 언프리티랩스타 2에 진출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설현의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랴. 전국의 통신사 대리점과 브라운관을 점령하다시피 했는데.
수준 미달의 연예인에게 이런 관심과 기회를 줄만큼 대한민국이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설현과 지민은 뜰만해서 뜬 소녀들이다.
한마디로, 아이돌의 조건을 아주 충족하게 시키는 아이돌들이다. 요즘 핫한 그룹 이름처럼, Ideal of Idol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들에게 무얼 더 원한단 말인가. 이미 이들은 인기 아이돌 그룹 AOA의 멤버로서 요구되는 역할행동들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데.
설현과 지민이 의무교육을 받지 않았느냐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운 거냐고. 물론 마치기야 마쳤을 것이다. 그렇지만 의무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걸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교육은 의무지만, 교육받는 사실을 충실히 숙지하는 건 본인들에게 맡겨야 할 영역이다. 애초에 의무교육이란 게 교육의 기회균등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사회적 신분 또는 경제적 지위의 차별에 상관없이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거기까지가 근대국가가 마땅히 해주어야 할 의무이며, 한계다.
그 이후에 지식을 소화해 내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들의 선택이다.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중고등학교에 얼마나 많은 '수포자'들이 있었는지를. 까놓고 말해서 문과 수리영역은 교과서랑 익힘책에 들어있는 기본 예제만 제대로 풀어낼 수 있어도 4등급은 나온다. 조금 센스가 있으면 3등급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마저도 하기를 포기한 학생들이 60%가 넘는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에게는 공개적으로 손가락질을 해 본 적이 없다. 역사가 수학에 그렇게까지 비교우위를 가질 고결한 학문이란 말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을까. 태어나서 한 번도 해외를 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였다니!
역사를 가벼이 여긴다고, '긴또깡' 드립을 해서는 안 될 자리였다고 비판받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들은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본인들이 역사를 알기 싫다고, 또는 무시하는 언행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간 것은 미디어와 네이버 같은 대형 포털이다.
생각해보자. 왜 이런 죄 없는 아이돌들이 미디어의 타깃이 된 것일까.
AOA의 설현과 지민은 결국 아이돌이다. 이번 사건 이후로는, 다시는 이런 논쟁에 회부될 일이 없을 연예인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 소녀들은 딱 이 정도 선에서 그칠 소모성 자원이다. 덕분에 인터넷 언론사는 신났다. 포털의 댓글러들도 즐거웠다. 거기까지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월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비판받고 있다. 아니,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에 훨씬 가깝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역사 퀴즈를 풀게 되었다는 점이 유일한 잘못이다.
사람들의 편견과 색안경은 그들이 내보인 적도 없는 매국노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아직 어린 두 명의 소녀에 대한 비정한 린치다.
동시에 에너지 낭비기도 하다. 그럴 시간과 열정이 있으면 국정교과서의 폐지를 위해 애쓰고 있는 역사학계의 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응원의 박수라도 보내주자.
그리고 이에 편승해 기사거리를 양산해 낸 옐로 저널리즘에 돌을 던지자.
분개할 일에 분개하자.
소 잡는 칼을 쥐 잡을 때도 들 필요는 없다. 우리의 분노는 더 합당한 일을 위해 쓰여야 한다. 아, 물론 이건 쥐를 잡을 만한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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