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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May 14. 2016

혐오의 낙인이 불편하다고?

여성혐오는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1. 

 트와이스가 여성혐오를 노래한다고?



트와이스의 인기가 심상찮다. 데뷔한지 1년도 안 지난 그룹인데, 겨우 두 곡만으로 탑스타가 되어 버렸다. 부대에서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트와이스가 나오면 자동으로 모두 멈춰! 를 외친다. 남 얘기하듯이 말했지만, 사실 나도 이 그룹을 좋아한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게 된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다 늙어서 아이돌이 웬 말이냐 싶기도 하지만...  꼭 내가 처한 환경 때문으로 돌릴 건 아닌 것 같다. 그만큼 매력적이다.



그런데 나오는 음악방송마다 족족 1위를 거머쥐고 있는 트와이스의 <Cheer Up>이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도 꽤 거창하다. 글쎄 트와이스의 가사가 '여성혐오'를 담고 있단다. 아니, 귀욤귀욤 하기만 한 아이돌 걸그룹의 가사가 여성혐오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넘기기 힘든 불편함일 수도 있다.





트와이스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그래야 니가 날 더 좋아하게 될걸



Be a man, a real man




조르지마 어디 가지 않아
되어줄게 너의 Baby
너무 빨린 싫어 성의를 더 보여 
내가 널 기다려줄게



<Cheer Up>의 가사는 남성과 여성의 고정적인 역할에 대한 스테레오타입과 클리셰로 가득 차 있다. 언제적 얘기야 도대체. '남자는...', '여자라면...'


가사만 놓고 보면 90년대 노래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지금은 2016년인데.




여자는 쉽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단다. 그래야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단다. 남자가, 그것도 진짜 남자가 되란다. 편견에 차 있는 가사들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젠더감수성'이 빵점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슬슬 의견이 갈리기 시작한다. 



차별의식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어. 그런데 그렇다고 이게 여성혐오는 아니잖아?

 여성혐오는 그렇게 지엽적인 개념이 아니야.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어.







#2.

여성혐오는 과연 뭘까?



하나의 개념어를 자신 있게 단정 짓는 건 어렵다. 이미 정의되어 있는 개념이라 해도 절대적이긴 힘들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어느 누군가 개입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논란의 '여성혐오'라는 개념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에게 '여성혐오'는 아직 낯선 개념이다.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다. 되짚어보건대 작년 이맘때 사회를 강타한 메르스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메갈리아'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파격은 충격적이었고, 신선했다. 메갈리아는 미러링이라는 도구를 들고 혐오와 억압에 맞서 싸웠다. 그렇게 여성혐오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3.

여성혐오의 공론화, 그 이후



여성혐오라는 의제가 공론화됐다는 건 분명 큰 성과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수많은 성차별 이슈를 '여성혐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낸 메갈리아의 '어그로'는 이에 큰 기여를 했다. 사람들은 조용한 파문에는 대개 관심을 잘 주지 않는 편이다. 


시위가 좋은 예다. 우리는 보통 시위하면 짱돌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모양새를 상상한다. 그런데 그런 '폭력시위'는 극히 일부다. 2014년에 벌어진 10,504건의 시위 중 폭력시위는 단 35건(0.3%)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몇몇의 잘못된 행동이 전체를 호도한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99.7%의 '합법시위'를 우리는 인지조차 못하고 있지 않은가. 0.3%에 불과하더라도, 그런 파열의 메시지만이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공론화만으로는 아무것도 완결시키지 못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 이후의 움직임을 위한 발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메갈리아의 방법론은 효력이 다했다는 말은 꽤 일리가 있다. 맞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조롱 이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미러링에 감응받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메갈리아 사이트 자체도 이전 같지 않다. 설립 초창기처럼 바글대지도 않으며, 의미 있는 콘텐츠도 찾아보기 힘들다. 쪼그라들고 있다. 마치 유령 사이트처럼. 



그렇다면, 이제는 공론화 이후의 단계를 생각해 볼 시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전열을 고르고 정비를 할 무렵에 반격이 날아들었다. 





여성혐오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거부였다.





#4.

과연 여성혐오가 뭔데? 우리는 혐오를 한 적이 없어.




여성혐오는 학술어 misogyny의 번역어다. 그런데 misogyny는 일차원적인 단어가 아니다. 복합적 개념이다. '혐오'라는 뜻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misogyny에는 <성차별, 적개심, 남성우월주의, 타자화, 숭배화> 같은 다양한 요소가 함유되어 있다. 때문에 “나는 이쁜 여자가 좋아” “여성은 고결한 존재야” “여자는 인간 이상의 무언가야” 류의 말은, 여성혐오적 언어로 분류된다.




여기에서 많은 오해와 논란이 생긴다. 




여성혐오란 단어에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원문의 복합적 의미를 고려한다 해도 말이다. 우리가 여성혐오를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혐오'를 먼저 떠올린다. 리-터럴리한 혐오를. 그들은 사전적 의미의 혐오(hatred, disgust)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여성혐오의 혐오가 여타 많은 개념을 통틀어 대표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때문에 여성혐오의 총체성은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렇지만 문학적인 원문만을 근거로 여성혐오의 포괄성을 납득시키기란 만만치 않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에게 여성혐오는 굉장히 편협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는 여자 엄청 좋아하는데. 혐오해 본 적 없는데?



결코 작은 간극이 아니다.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서로 다른 지형에 서서 생각을 하는 것 같달까.

 


한때는 페미니즘/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이 모든 비난을 외로이 감당해야 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지금은 어떨까? 2016년의 페미니즘은 이전처럼 모욕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힘으로 '여성혐오'의 공론화까지는 이루어 냈다. 그렇지만 홱- 끼쳐오는 반감을 막지는 못했다.


자신들이 혐오 분자라는 사실을 인정치 못하는 사람들의 반발심은 상당하다. 이 모욕적 타이틀은 그래서, 페미니즘에 꽤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남성들까지도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을 겨냥하던 화살은 이제 ‘여성혐오’라는 단어로 타깃을 바꿔 쏟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5.

여성혐오의 복합성과 상징성 납득시키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지니는 복합성과 광의를 존중한다. 그래서 여성혐오라는 단어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렇게 해서 혐오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발맞춰 가고 싶지 않다.



누군가는 말한다. 여성혐오보다는 '여성차별'이 좀 더 적절한 단어일 것 같다고. 그래서. 그럼 그렇게 유-하게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까. 혐오보다는 차별이 순한 단어니까?


순하다는 건. 지엽적이라는 건. 바꾸어 말하자면, 일부에 제대로 대응되는 대신 역으로 훨씬 많은 부분을 놓치고 간다는 말도 된다.


대놓고 악의를 가지고 몰아내는 직접적 폭력만이 여성혐오가 아니다. 이성애자 남성 혹은 남성우월주의자가 구성해 낸 통념은, 여성혐오의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


사실, 차별은 사회 이곳저곳에 광범위하게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단어는 아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혐오라는, 그야말로 혐오스러운 최악의단어만큼은 피하고 싶어 한다. 면죄부를 얻고 싶은 거랄까.




그렇기에 우리는 당신들이 행하던 그 모든 것이 바로 혐오란 걸 알려 주어야 한다.


https://brunch.co.kr/@polygraphe/39




혐오와 차별은 한 끗 차이 같지만 느낌은 다르다. 인종주의(racism)를 생각해보자. 흑인을 차별했던 모든 이들이 흑인을 '적극적으로' 혐오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나 흑인 친구 있는데? 차별주의자 아닌데?” 정도로 눙쳐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얘기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그것은, 혐오가 맞았다. 그런 차별적 기제가 큰 틀에서 보면 결국 혐오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흑백 분리를 주장하며 테러를 합리화했던 말콤 엑스. 그런데 도덕률로는 차마 눈뜨고 못 봐줄 그런 극렬분자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마틴 루터 킹의 연착륙을 이루어 냈다. 무슨 말일까.



말콤 엑스가 없었다면, 그 혐오의 극단에 킹 목사가 자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치다. 극단이 사라지면 중립론자도 극단으로 보이고, 그렇게 몰린다. 과연 21세기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사형을 당해야 할까? 냉전 시대에는 온건했을 그들의 이념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시대에는 왼쪽 극단에 자리한다. 극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란 이야기다. 



물론 말콤 엑스는 결국 대안은 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렇지만 유리천장에 파열을 주는 용도로는 충분했다. 인종주의의 유리천장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충분히 드나들 만한 구멍이 생겼다. 성공적으로 8년간 재임한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그 산 증인이다.



이렇게까지 되는데 백수십 년이 걸렸다. 어마어마하게 오랜 세월이다.

     





#6. 


일탈과 모순에 대한 알람-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을 보도하는 이유는 그 사건이 일탈적이어서뿐만 아니라, 그 일탈이 전체의 어떤 모순을 어떤 알리는 징후이기 때문에 보도하는 것이거든요. 경찰이 100명 있는데 1명이 촌지를 받았어요. 경찰은 99명이 다 깨끗하고 청렴한데 왜 그 1명만 가지고 악의적인 보도를 하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아니에요. 1명이 촌지를 받았어도 보도해야 해요. 왜냐하면 이 1명이 나머지 99명의 변화라거나 어떤 오염, 타락을 알리는 징후일 수 있으니까. 이 징후라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하나의 개별로부터 전체 맥락과 구조를 연결하는 사고의 훈련이 되어있다는 소리예요.

안수찬(한겨레 21 편집장), '그가 꿈꾸는 언론', 다이버시티



여성혐오는 사회적 일탈이다. 이 일탈은,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과 혐오의 정서를 나타낸다. 일종의 알람-콜이다. 이 알람-콜을 무시하면, 재앙이 닥친다. 왜 평소에도 알람을 무시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가. 지각을 한다든가, 오븐이 과열되어 불이 난다든가.



많은 남성들은 말한다. 자신들은 아니라고. 혐오분자들은 극히 일부라고. 자신들은 혐오 해 본 적이 없다고. 왜 전체를 매도하냐고. 어째서 여성혐오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를 통해 갈등을 조장하는거냐고 열변을 토한다.



나는 그들이 여성혐오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많이 양보해서 그걸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적극적으로 여성혐오를 말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는 혐오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넒은 의미의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당연하게 자리잡기까지, 분명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좀더 말랑말랑한 단어로 대체하자는 유혹에 시달리겠지. 당장의 가시적인 변화를 누적시켜 가자는 사람들과도 대립해야 한다. 



지난하고 지난할 과정이 눈에 보인다.




그래도 이렇게 밟아가야 한다. 효율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냥 이게 맞는 길이어서다.





결국 정답은 정해져 있다. 차별과 억압을 완전히 철폐하기 위해서는 느리더라도 바른 길을 가야만 한다. 




#7.


가치는, 시장논리에 편입될 수 없다.




제발, 여기에까지 시장논리를 들이대지는 말아 달라.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는 타협의 대상이 될지 몰라도, 인간의 존엄과 평등은 아니다. 

차별은 혐오보다는 잘팔리는 개념어다. 그렇다고 좋아하다가는 다친다. 무언가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젠더권력의 그늘에 서서 함부로 재단하려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거기 들고 있는 계산기는 좀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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