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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May 12. 2016

유리천장은 너무해

아무도 안 깨는 장벽



어차피 시집 잘가면 끝 아냐?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첫 중간고사가 끝난 후 친구들과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이런 말을 던졌다. 충격이었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로 독하게 공부하던 친구였다. 어디 가서 공부로 꿀려 본 적 없는 학생들의 집합에서도 그의 성적은 낭중지추였다. 더군다나 그는 여학생이었기에, 그런 말을 듣고 내가 느낀 이질감은 상당했다. 




그 말을 던진 이후로 나는 그 친구를 좋게 보기 힘들었다. 괜히 무언가 불편한 기분이었다.









그럴 거면 도대체 무얼 위해서 저렇게 아득바득 사는거람?





나이를 먹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 불편함은, 그 친구가 우리 중 누구보다도 뼈저린 현실을 일찍이 직시했기 때문이란걸. 






죽어라 공부해도, 여성이라는 타고난 한계는 '잘난 남성에게 시집 잘 간' 사람을 뛰어넘기 힘들다는 걸. 








유리천장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을까. 너무 나이브한 이름이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파편이 좀 박히고 피를 흘릴 지언정 어떻게 하면 깰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투명한 유리창 위를 밟고 서있는 저들이 너무나 가까이 보이는데.'




그런데, 그렇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는 사실이 제일 무서운 거였다. 투명한 유리야말로, 이를 비극적 개념어로 완성시키기에 가장 적절한 제재였다.



바로 위에 보인다. 힘껏 부딪치면 아주 못 깰 것도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돌진하면 부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러면 많이, 아프다. 온 몸에 파편이 배기고 열상이 생긴다. 그리고 깨져 나간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따가운 이목을 혼자 견뎌야 한다. 




당연히 밟고 서있던 발판이 흔들린 사람들은, 그 파열을 만든 사람을 어떻게 쳐다볼까. 






유리천장이 뭐가 어때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현실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깨지 못해서 안 깨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공을 들여 깰 가치가 없으니까 안 깨는 거다. 신 포도랄까. 어차피 먹어봤자 시어터진 포도일 뿐인걸.




깨는 사람도 있다고? 




물론 있겠지. 하지만 모두가 그런 손실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상처받지 않고 조용히 사는걸 선택하는게, 어쩌면 경제적으로는 더 합리적인 선택이니까. 







그 말을 했던 그 친구와 이야기 해 보고 싶다. 그 이후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아마 그때처럼 열심히 살고 있겠지. 그래도 생각은 그대로려나?




놀랄 것 같다. 만약 그 생각이 바뀌었다면 말이다. 유리천장은 딱 그정도로 절대적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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