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 <광화문 연가>
광화문을 바라보며 밤을 샜다. 꼬박은 아니고, 띄엄띄엄.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 잠들어 가다가, 다시 깨어나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몇시간씩 그렇게 건조하게 있다 보면 음악이 생각난다. 화장실을 찾으러 들어간 광화문역 안에는 마침 가수 규현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생일을 축하하는 팬들의 축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왜 하필 광화문역일까? 맞다.최근에 '광화문에서'라는 노래를 불렀었지. 그랬지.
https://www.youtube.com/watch?v=rUbq_IXBaYg
좋은 곡이었다. 요즘 SM에서 줄줄이 내고 있는 아이돌의 솔로곡들은 편견을 시원하게 부술 만큼 하나하나 괜찮지만, 그중에서도 규현의 곡은 만듦새가 특출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광화문에서는 이 노래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광화문연가.
앞세대 사람들에게는 이문세가 부른 버전으로 익숙할테지만, 내게는 이수영이 부른 버전으로 먼저 기억된다.
이제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https://www.youtube.com/watch?v=Na9JSphuaj4
광화문을 바라보며 가사를 읊조려 보았다. 나직하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언덕밑 정동길엔 남아있어요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광화문연가인데 왜 덕수궁과 정동길을 반복해 노래할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정동교회 맞은편에 세워져 있던 자그마한 노래비.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그 비석에도 광화문연가의 노랫말이 쓰여 있었지.
덕수궁 돌담길에서 광화문까지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성큼성큼 걸어도 한참이 걸린다. 돌아와 검색해 보니 1.2km정도의 거리란다.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이 말하고 있는 정동교회에서 부터 출발했다면 좀더 걸릴 것이고.
청승맞다. 그런 단어가 팟 하고 떠올랐다. 구슬픈 가락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단어다. 그렇지만 일년중 가장 좋은 계절에, 지나가 버린 호시절을 떠올리며 수백 걸음을 했을 모습이 그려졌다.
마냥 낭만적이라곤 못할 것 같다.
이수영은 특별한 가수다. 대중음악을 노래하지만, 민족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멜로디를 뽑아 낸다. 사람들은 그런 이수영을 보고 '한恨'의 정서를 표현할 줄 아는 가수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모든 앨범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지상파 가요제 대상을 타던 시절에 나온 히트싱글 '덩그러니'와 '휠릴리'에서는 그런 정서가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나도 그런 이수영을 좋아 했다. 촌스러운 신파로 흘러갈 수 있는 느낌을 세련되게 풀어내는 모양새에 끌렸다.
가녀린 체형의 이수영이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세종대로를 걷고 또 걷는 모습이 보였다. 기라성같은 기업들이 들어찬 마천루를 지나면서 눈덮인 연정戀情을 환기해 냈을 그 모습이 괜시리 짠했다.
'아직 남아있을 연인들'은 계속 기억되고, 불리겠지. 이문세에서 이수영으로 옮겨간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게로 건너가서.
청승과 낭만 사이의 어딘가에서. 그렇게 작지만 애틋하게.
커버사진 출처: https://namu.mirror.wiki/dark/%EA%B4%91%ED%99%94%EB%AC%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