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과 본질의 딜레마
신분을 밝히지 않는 가계정 또는 봇계정이랑은 페이스북 친구를 잘 맺지 않는다. 드물게 예외가 몇 있는데, 'Gilles Deleuze'라는 당돌한 이름의 계정이 그 중 하나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구조주의 철학자 들뢰즈의 저작에서 일부 문구를 가져와 온갖 욕망이 넘실대는 뉴스피드를 조금은 지적으로 만들어 주곤 한다.
계정의 롤모델이 보통 인물이 아닌지라 포스팅도 굉장히 난해한 편인데, 그 중 그래도 괜찮은 문구가 보여서 공유해 두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것이지만, 생성은 본질상 다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관련된 많은 작가들의 복잡미묘한 입장이다.
Gilles Deleuze 질 들뢰즈
한참 전부터 고민하던 주제다. 결론은 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세기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실한 정답이 없더라도 아무래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게 부담을 내던지고 생각을 펼쳐 본다. 날짜가 바뀌기 전까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을 위한 제도다. 이를 추동하는 것은 다수의 인민이다. 허나 들뢰즈가 말한 대로, 초기의 발명은 그렇지 못했다. 원리를 곰곰이 뜯어보면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욕구에 의해 생성되고 추동되었어야 모양새가 들어맞지만, 사실은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발명'한 구조물에 가깝다.
그래서 애매해진다. 우리는 그런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에게서 플라톤이 말한 '초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인보다는 차라리 초인에 더 가까울 비범한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만들어 낸 '최선이자 차악인' 제도를 과연 다수의 인민에게 맡겨도 되는 걸까?
여기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다수의 인민은 집단지성일까, 아니면 사태를 악화시킬 멍청한 대중일까. 중우정치의 프레임은 선거를 한 번 치를 때마다 횡행하곤 한다. 그걸 아주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꼭 최선이란 걸 의미하진 않는다. 최근의 브렉시트 사태도 그에 들어맞는 좋은 예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근거로 민주주의를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한 불완전성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며, 특성이기도 하니까. 현실에 초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신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 어느 인간도 급변하는 세계와, 자신의 정치행위가 미칠 파급을 예측할 수 없다.
최선인데 최선이 아니고, 본질이 존재하는데 그 본질과 어긋난다. 그렇지만 원래의 본질이 절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와 랑시에르쯤 되는 철학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아닌가. 한 문단을 제대로 읽어내기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들의 정치철학 저서는 자신들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횡설수설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고작 30분의 시간동안 정리될 수 없기에 난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제도를 사랑한다.
설사 이 모든 혼란을 일거에 정리해 줄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순순히 넘기지 않을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