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문화와 돼지발정제
요힘빈이라는 이름의 약물이 화제다. 돼지의 교미를 위한 발정제의 존재를 나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작중 인물인 조성훈은 힘을 들이지도 않고 여자를 손에 넣는 선배의 이야기를 한다. 그 비결은 돼지발정제를 물에 타서 몰래 먹이는 것이라고. 기가 차서 한심해하는 주인공에게 조성훈은 짙은 환멸을 뱉어낸다.
사람들이 모두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 이미 마신 건지 몰라. 단지 아직 효과가 발휘하기까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뿐이지
일부의 일탈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유권자의 15%정도면 이미 그건 하나의 현상이다. 후보자를 선택하는 데는 많은 조건이 있으며 그중 어느것도 절대적이라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저지선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돼지발정제를 이용해 강간모의를 했던 후보가 지금 선거비용을 전액 보전받게 생겼다.
시선강간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고 있다. 사람들의 입에 시선강간이란 단어가 오르내리는 빈도가 늘수록, 그에 대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그런것까지 어떻게 일일이
지나치게 과격한
오히려 반감을 불러 일으킬
아아. 한숨이 나온다. 뭘 또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아니. 그걸론 만족 못 하겠다.
한술 더 떠볼란다.
우리 사회에는 '강간문화'가 팽배해 있다. 시선강간은 거기서 파생된 작은 현상일 뿐이다.
강간문화.
페미니스트 레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이 용어 덕분에 우리는 강간을 이례적인 사건으로 치부하는 가식, 강간을 전체문화와는 무관하며 심지어 그에 거스르는 행위로 치부하는 가식을 버릴 수 있다. ‘강간문화’라는 용어는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근원을 문화전체에서 찾도록 도와준다.
뒤늦은 사퇴때문에 제대로 선거운동을 하지도 못한 홍후보의 지지율이 순식간에 15%를 상회하는 건 이상현상이 아니다. 일부 계층의 반사회적 일탈도 아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우리 사회와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벽에 여성을 밀쳐놓고 키스하는 클리셰가 용인되며 로맨틱하게 여겨지는 나라. 물리력을 동원한 데이트폭력을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조차 하지 않는 나라. 섹시함과 귀여움을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꺼낼 수 있어야 하는 걸그룹들이 생존경쟁을 벌이는 나라.
무려 여러명이 한 명을 강간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공모했음에도 '젊을 때는 그럴 수 있지'라고 쉴드를 치는 사람을 어렵잖게 만나볼 수 있는 나라. 페이스북 댓글로 '나도 그랬었지'라고 강간미수자들이 자발적 정모를 여는 나라. 공소시효가 지나버린 성범죄자들이 실명을 달고 흰소리를 지껄이기 주저하지 않는나라.
심지어는 그런 사실에 무감각하며 문제의식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발에 채일만큼 많은 나라.
이런 사회에 적용하라고 만든 단어다. 이만큼 완벽한 사례도 찾기 힘들겠다.
강간문화는 여성혐오라는 자양분을 무럭무럭 먹고 자라난다. 이걸 뿌리뽑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뭘 또 그렇게까지 해야겠다.
당신들이 듣기 싫은 말을 앞으로도 쭉 이어나가겠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