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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May 13. 2017

죽음만이 남은 공론장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동성애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반대합니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그새 김이 빠진 맥주는 못견디게 썼다.

얼마전 내가 공들여 갈고닦던 그 '민주주의'가 속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공론장'이라는 단어도 가세했다.

오랜 기간동안 호감을 느꼈던 그 정치인은 "차별에는 반대합니다"라며 끊겼던 맥락을 이었다.





새삼스럽지만, 토론을 하고 있다. 항상 그래왔기에 유별난 감흥이 있지는 않지만. 그때그때 마음맞는 파트너를 찾아 단발성으로 대회를 나가는 걸로는 갈증이 채워지지 않더라고 말하면 설명이 될까. 매주 세션을 하며 즐거

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중 동아리 윗선에서 제안이 들어 왔다. 신입기수에서 3명, 선배기수에서 3명을 뽑아서 토론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재밌겠다 싶어 흔쾌히 응했다. 다만 주제가 다소 껄끄러웠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골랐다.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나는 동성애가, 더 나아가 동성결혼이 법이라는 테두리 속에 가둬질 가치가 아니라 생각한다. 내 기준에 이는 찬반으로 나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여겨져야 한다. 나와 생각을 공유하는 대부분의 친구들도 이런 생각일 것이다. 우리에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상식을 몰상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래서 이 기회를 빌려 그들의 사고를 학습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고도로 발전된 논리를 체화하고자 했다. Devil’s Advocate, 악마의 변호사가 되어 보고자 마음먹었다.



악마의 변론을 준비하는데 있어 가장 도움이 되었던 레퍼런스는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문이었다. 사실 이 판결문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자신있게 합법화 반대를 고른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부분은 JUSTICE SCALIA, 대법관 안토닌 스칼리아의 소수의견이었다.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으로 혼인은 ‘이성혼’을 의미한다. 이는 역사,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이며 명문화 되어 있지 않더라도 보통 사람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가치다.


2. 이에 반해 동성혼은 이제서야 사회적으로 합의를 해가는 단계에 있다. 따라서 일부 주에서는 개별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동성혼 합법화에 대한 의견을 결정하고 법제화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아직 동성혼 합법화가 사회적 통념의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3. 따라서 이번 판결은 이러한 논쟁을 강제적으로 종결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






스칼리아에 따르면 동성결혼 합법화 선언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끝장내는 행위다. 사법부의 판결이 공론장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토론에 종언을 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변용해 다음과 같은 입론 문구를 만들었다.


‘동성결혼의 합법화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에 배치된다. 민주주의는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 완성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섣부른 법제화는 이제 막 태동한, 아직은 연약한 공론장을 훼손할 것이다.’




토론을 준비하는 내내 입에서 비속어가 여러번 튀어 나왔다.


첫째로는 이런 궤변을 일일이 번역해가며 체화하는 과정이 짜증나서였고,

둘째로는 그런 와중에도 이 괴팍한 '민주주의자'의 논거를 완벽히 파훼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론은 성공적이었다. 승부의 측면에서는 말이다. 미풍양속이나 성경말씀, 후천성 면역결핍증 대신 시종일관 등장한 '민주주의'와 '공론장'은 상대방 입장에선 황당한 반칙이었고, 우리에겐 효과적인 무기였다.



그럼에도 그 논리를 내 것으로 가져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칼리아가 말하는 공론장은 결국 '죽음의 공론장'일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숨막히는 민주주의 속에서 소수자들은 시시각각 죽어나간다. 도대체 언제 진정될지 기약이 없는 공론장은 그자체로 지옥이다. 영원히 떨어지는 시지프의 돌덩이같달까. 당장 20년전의 대선과 비교해도 유력후보자의 소수자 담론은 제자리걸음이다.



시스템의 긍정을 위해 개인을 부정하는게 과연 얼마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어느정도는 실언이었다는 의견에 일부 동의한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에도 마찬가지다. 촛불시민들의 뜻도 한방향은 아니란 걸 안다.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변명도 마냥 핑계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우리들의 끊임없는 비토를 받아야 한다.

그는 선택을 했다. 그 갈림길에 체리피킹은 없는 선택지다.


죽음의 공론장을 방조하기로 결정했잖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불행히도 어찌할 방도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론장에는 지금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의 죽음이 빗발치고 있다.





아이고. 그 잘난 민주주의, 말라죽게 생겼네.





2017년 4월 27일, 제 19대 대통령선거를 열이틀 남겨두고 쓰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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