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카마츠 이야기>, 그리고 <화양연화>
<치카마츠 이야기>. 낯선 이름이다. 우리 비평계에 일본 영화가 불꽃처럼 번진 순간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를 꺼내 들곤 했단다. 그런 여파였을까. 나도 아키라의 <라쇼몽>이나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정도는 의무감에 못이겨 꾸역꾸역 감상해 냈다. 그렇지만 미조구치 겐지는 그 와중에도 유행에서 한발짝 비껴선 지점에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영화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시간 37분이라는 런타임은 길고도 지루했다. 실제로 온전히 감상을 마치기까지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래된 영화여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60년이면 강산이 여섯 번은 바뀌었을 시간인데. 지금 봐도 굉장히 깔끔한 미쟝센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카메라 워크도 훌륭했고 배우들의 연기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지만 지루함을 참기 힘들었다. 요즘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빻았다’라는 단어가 있다. 모양이나 사고가 몹시 뒤처졌다는 이야기다. 100분 가까운 시간 동안 ‘빻은’ 사람들과 말과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려니 여간 괴로운게 아니었다. 요즘의 기준에서 비춰보건대 도저히 넘어가 줄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렇다. 음흉하다 못해 역겨운 능구렁이같은 모양새로 하인을 범하는 이슌을 보며 애꿎은 내 머리를 쥐어 뜯었다. 몇 년씩이나 연모의 감정을 숨긴 채 살다가 일생 마지막 순간, 최악의 시점에서 고백한 모헤이를 보며 한숨을 쉬어 냈다. 죽으러 가는 주제에 편안해 하는 오산을 보며 영화를 떠나 보내자니 내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미조구치의 영화는 기분이 나빴다. 미묘하게, 다른 거장들의 영화랑 결이 달랐다.
즐겁지 않은 영화였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영 내 취향은 아니란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중에 떠오른 영화가 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다. 제목부터 참 멋진 영화다.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영문 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다. 사랑을 하는 분위기에서, 정도로 해석될까. 이보다 괜찮은 제목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왜 <치카마츠 이야기>를 보면서 <화양연화>를 떠올렸을까. 아마 왕가위가 그려낸 사랑이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편에 좀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화양연화>도 <치카마츠 이야기>처럼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차이가 있다면, 화양연화의 양조위와 장만옥은 끊임없이 번민하며 결국 선을 넘지 못한다는 점이겠다. 그래. 난 망설이다가 끝내 넘지 못한 그 선이 좋았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배신당했다. 그런데도 차마 배신을 하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황인데도 한 걸음을 더 떼지 못했다. 정말 작은 한 걸음이면 됐을텐데. 그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서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모습이 정말 잘 묘사된 영화다. 그런 영화적 얘기를 빼놓고 본다면, 나는 그 둘이 결국 아무런 실제적 피해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장만옥과 양조위 모두 배우자에게 바람을 맞았다. 상대방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상처는 좀 받았겠지만 그냥 그대로 헤어지면 그만이다. 사회적 잣대로 보면 본인들에게 귀책사유는 없다. <치카마츠 이야기>에서는 어땠는가. 실제로는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모헤이와 오산은 있는 죄 없는 죄 다 뒤집어쓰고 삶을 마감하러 가지 않는가. 사랑이 뭐라고 목숨을 거는 걸까. 바보같은 사람들. 아름답다. 그렇지만 그런 비극적 아름다움은 텍스트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 현실에 재현되면 안된다. 그 순간 우리가 목도한건 비극의 잔인함 뿐이다.
어째서 사랑이 양자택일의 선택지로 놓여야 하는게 모르겠다. 더군다나 나머지 하나는 죽음의 경우인데.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사랑을 해야 할까,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현재의 철학>에서 사랑이 만들어 내는 ‘생성’의 힘에 주목한다. 사랑은 ‘소비’ 아니라 ‘생성’이란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 좋다. 인정한다. 그런데 꼭 그걸 따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모헤이가 출세를 선택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것이다. 주인에게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던 타마정도가 예외였을까. 모헤이는 주체적으로 새로이 깨어나지 않았다. 남은 선택이 거의 전무했던 순간에 참으로 비겁하게 사랑을 인정했다. 그럴 바에는 <화양연화>의 두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끝까지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덜 비겁하다. 모헤이의 비겁한 고백은 두 사람을 사지에서 구해내지 못했으니까. 바디우는 <치마카츠 이야기>에서 오산과 모헤이가 법을 거스르고 존재를 뒤집는 사랑을 완성함으로써 새로운 사건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오산은 나이든 늙은이에게 팔려와 인생을 허비했다. 모헤이는 그런 주인 밑에서 마님을 몇 년간 남몰래 연모하느라 마찬가지로 인생을 허투루 흘려 보냈다. 서로가 본인들의 마음 앞에 솔직해진 순간은 인생 마지막 순간이었다. 행복을 느껴 보고 죽었다기엔 너무 찰나의 시간이다. 그렇게 사랑을 완성해 버려서 다른 사람들이 대신 의미 부여를 해주는 삶. 너무 별로다.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 다시 한 번 더 <화양연화>를 인용하고 싶다. 아주 제대로 행복할게 아니면 차라리 그들처럼 지내라 하고 싶다. 불타오르는 사랑의 순간은 그냥 기억 저편에 묻어두며 사는거다. 적어도 상처받진 않을 것이다.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지도 않을 것이고, 주홍글씨가 찍힌 채 살아갈 필요도 없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듯이, 아마도 철학은 무엇보다 비정상적인 지적 활동일 것이다. 아마 어떤 종류의 사랑은 그런 철학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종교인의 아가페적 사랑이라든가. 그런데 개개인의 플라토닉한, 에로틱한 사랑마저 이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사람이 그렇게 심각하고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카마츠 이야기>의 영문 원제처럼 오산과 모헤이는 십자가에 박힌 채 죽었다. 그 뒤에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그저 죽음이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비극적으로 남겨지겠지.
어떤 이들에게 사랑은 철학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랑을 하는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당장의 행복이 우선이다. 모든 행복이 결딴난 후에 고상한 장식이 붙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행복하기 위한 사랑을 했으면 좋다. 의미부여는 그 다음에 올 일이다. 이 암울한 흑백영화처럼 모두 이 세상을 떠 버리면 사랑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