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호모 도미난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는 나가사와 선배라는 인상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평범한 주인공 와타나베가 보기에 그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기에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나가사와는 결핍을 느끼며 매일 새로운 욕망을 찾아 나선다. “주변에 가능성이 충만할 때 그걸 그냥 지나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타협을 우리는 ‘합리화’라고 부른다.
<호모 도미난스>에는 ‘흰원숭이’라는 정신조종 초능력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흰원숭이들은 자신만의 조직을 꾸려 사회 저편에서 비밀스럽게 살아간다. 그중 가장 큰 조직인 백원단의 수장 류잉춘은 “폭력성이 정신조종능력에 붙어 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반면에 그와 대립각을 세우는 방바재단의 저우환위는 “폭력성은 정신조종능력이 아니라 인간성 그 자체에 내지 된 것”이라며 반박한다. 나는 저우환위야말로 폭력과 인간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어 보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흰 원숭이여서 폭력성이 새로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일 때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다. 그래서 폭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고, 애초에 우리가 지니지 않은 특성처럼 여겨진다 보는 편이 더 납득이 가는 해석이다. 가능하다면, 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요 욕망이라 하지 않았는가. 사실 폭력은 물리력의 행사라는 좁은 의미로 한정할 개념은 아니다. 권력과 위력 역시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비교우위에 근거한 우월성의 과시는 곧 폭력의 본질과 닿아 있다는 이야기다. <호모 도미난스>에는 이와 같은 폭력의 다양한 층위가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폭력이 절대악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하기는 힘들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도 다소 애매한 방식으로 말을 흐린 바 있다. 사르트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폭력은 ‘피할 수 없는 실패’”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우리가 폭력의 세계 속에 사는 이상, 결국 폭력을 멈출 유일한 수단 역시 폭력이라는 현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자칫 폭력이 영속화될 수 있다는 위험은 둘째다. 현실이 그렇기에 우리는 폭력이 악이라고 마냥 제쳐두기 어렵다. 주인공 안시현의 작중 행적을 돌이켜 보자. 그가 행했던 폭력을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안시현은 류잉춘으로부터 금강승을 받아 흰원숭이가 되었고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폭력을 꾸준히 이용했다. 하지만 안시현이 정신조종능력을 손에 넣지 않았다면, 폭력을 능히 실행할 가능성이 없었다면?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애꿎은 목숨의 희생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흰원숭이들은 폭력의 가능성에서 뻗쳐 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흰원숭이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을 막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던 류잉춘이 고심 끝에 선정한 후계자 안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인간보다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이며, 굳은 심지를 가졌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절정으로 치닫던 대립에서 폭력에의 예속을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새삼스럽지만, 완벽하게 이상적인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폭력을 잡음 없이 깔끔하게 사용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 완벽하지 못했음에도 안시현에게 일단의 합격점을 주고 싶다. 그는 실패한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시현은 플라톤이 가정한 철인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 가까운 존재로 커 주길 기대받았을 뿐이다. 물론 안시현의 방식이 정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현은 백원단의 수장으로서, 철인처럼 행동하며 폭력을 사용했다. 백원단과 흰원숭이의 힘은 사회 전체에 미치는 파급이다. 그럼에도 백원단에 대한 비판은 그들로서는 다소 야속할 테다. 어쨌건 간에 그들의 의도는 선했다. 시현은 범람하는 폭력을 일단락시켰고 권력까지 내려놓았다. 이 또한 합리화일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결말이었다. 자신의 ‘실패’를 인지해서였을까. 시현은 흰원숭이의 권능을 민간에 공개하고 그 자신은 최소한의 능력만 사용하면서 탈북자들을 돕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작중 인물 노보루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수없이 읽고 블랙윙즈 패밀리에게 구절구절 읊어 주곤 한다. 그 중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것임에 비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라는 콜필드의 말은 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안시현은 달라졌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세상을 통째로 바꾸려던 인물은, 그 힘을 가능한 적게 쓰는 식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성장이라 할 수 있다면, 이는 ‘폭력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는 성숙’과 같은 선상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폭력에 약하다. 하지만 능동을 꾀해 폭력에 함몰되는 것을 피하고, 이를 극복할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다. 안시현이 행한 폭력과, 그 이후의 자기초극은 폭력의 결과가 바람직할 수도 있음을 하나의 실례로서 증명한다. 이런 가능성은, 폭력이 낳을 혁명을 긍정한다. 합리화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