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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Oct 30. 2017

역차별같은 소리 하고 있네

강자가 약자의 말을 빌려 자신을 지킬 때


지난 겨울 출연했던 tvN 대학토론배틀 7에 관한 이야기는 타임라인에서 자세히 주절대진 않았다. 끝마무리가 좋지 않았기에 거들떠도 보기 싫었던 마음이 가장 컸다. 응어리가 많이 졌다. 방송을 워낙 많이 탔기에 좋은 부분만 곱씹어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런 행복회로를 가동하기엔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다.  

몇달동안 마음속에서만 삭혔던 말을 하고 싶다. 이 사단을 낸 '역차별'이란 폭탄에 관한 이야기다.


예선 1라운드, 2라운드, 본선 1라운드 모두 최고점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생각외로 너무 잘 풀리니까 슬슬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32강 미션이 끝난 후 최상위 4개팀에 들어서 시드배정을 받았다. 16강은 연합미션이었고 4개팀을 인솔하는 조장 역할을 맡았다.


주제는 <지하철 여성배려칸, 확대해야 하는가?>였다. 난감했다. 개인적으로는 여성배려칸의 도입과 확대에 모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반대입장을 쥐게 되었다.


처음 나올 때부터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 혐오논쟁과 페미니즘은 근 2년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한 토론을 불러냈으니까. 그래서 어느 라운드에서든간에 페미니즘 토론을 하게 될 일이 있으리란 각오는 했다.

그러나 이를 예상했기에, 나름대로의 선을 긋고 나왔다. 어떤 입장이 걸리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의 기준선을 넘어서지 않기로 말이다. 뭐 요즘 유행하는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이나 '진짜 페미니즘' 이런거랑은 5만광년쯤 거리가 있는 기준선이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맞닿아 있었겠고.


팀을 결성하고 이름을 정하자마자 선포했다.


"여러분. 이 주제가 페미니즘과 혐오논쟁과 엮여 있는건 다들 아실거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게 절대 남성-여성간의 갈등구조, 차별-역차별 논쟁으로 번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쪽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우리.

우리는 여성들이 원하는건 안전이 보장된 사회에서의 일상이지, 격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포커스를 맞추는게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여성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역차별같은 이야기가 끼어들어선 안 돼요"


그래서 잘될 줄 알았다. 착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먼저 협조를 구하고 들어가면 당연히 그걸 피해갈 수 있을줄 알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팀원 한명이 흐름을 쫓아오지 못했다. 않았다는게 더 정확한 말이려나.


1박2일의 16강 미션 전에 몇차례 만나서 토론연습을 진행했으나, 문제가 많았다. 모임장소가 집에서 멀다고 툴툴거리는건 애교였다. 두번의 미팅에 모두 별다른 이유 없이 한시간 넘게 늦었고, 심지어는 촬영 당일날도 지각해서 우리들 속을 썩였다. 사실 그런건 아무래도 괜찮은 문제다.


나머지 7명이 합의한 토론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꾸만 이상한 얘기를 꺼냈다.


"형. 제 주변 남자애들한테 물어봤는데요.."

"...그건 별로 좋은 표본이 아닌거같은데?"

"아니 근데요. 애들이 다들 이걸 듣자마자 욕하고 그래요. 기분이 나쁘다는데요. 역차별받는 기분이라고 다 그런다구요."



역차별. 그는 거기에 매몰되어 있었다. '잠재적 피해자'로 세팅되어 '기분이 나쁘다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자꾸만 가져왔다. 논지가 흐려진다.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두려움을 해결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일주일 내내 설득했다. 톤이 격앙되어 설교가 될 때도 있었다. 나머지 멤버들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때까지 토론하며 논지를 구성할때, 그는 혼자서 구석에 틀어박혀 노트북만 두드리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가득했다. 우리 팀의 플로우상 도저히 쓸 수 없는 논거들이 쌓여갔다.

우리는 걱정이 태산같이 솟아올랐지만 어떻게든 알아서 잘 되겠지 하면서 애써 무시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했다.


"역차별 얘기 안하기로 약속했지 우리. 맞지?"


고개를 끄덕였다. 믿었다.

...


아.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그 친구는 더이상 만회할 시간도 남아있지 않은 토론의 종반부, 최악의 순간에 '역차별 논쟁'과 '남성-여성간의 갈등'이란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사냥했다.



그지경이 됐는데 토론이 제대로 마무리됐을리가 없다. 방송에서 좀더 악의적으로 편집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실제로 촬영중에 분란이 일어났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말다툼이, 혼자만 살겠다고 발악하는 '각자도생'의 결과라고 후려치기 당할땐 가슴이 찢어졌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역차별이란 단어를 쉽사리 입에 올릴 수 있는 현실. 난 이게 우리가 딛고 있는 경사로 덕분이라 생각한다. 차별은 어디에나 있지만 역차별은 애써 찾아보아야 한다. 실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갈등도 마찬가지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갈등도 서로 양상이 비슷비슷해야 성립한다.

성범죄에 관해서라면 지하철은 분명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남성도 성추행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 위협의 강도는 비교하기 힘들다.


그런데, 거기에서 굳이 역차별이란 단어를 입에 올려야 했을까. 누군가는 저항할 수 없는 손길을 두려워하며 떠는데. 다른 이들은 그런 잠재적 위협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한다.


방송은 계속 기록에 남는다. 대학토론배틀은 교양프로의 탈을 쓴 배틀로얄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에게 허용된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조심 걷는다.


나는 선을 넘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으며 감정적인 모습을 화면에 남겼다. 교양인으로 기억을 남기든가, 살아남든가 둘중 하나여야 했는데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그 상황에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말하겠다.


"역차별같은 소리 하고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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