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의 영웅들을 기억하시나요..?
2017년 9월 어느 날 쓴 글입니다. 아직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짓지도, 양현종 선수의 드라마틱한 역투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결정짓지도 못한 시점이었지요. 몇달이 지나 다시 글을 곱씹어보니 달콤쌉쌀한 데가 있어 다시 가져와 보았습니다. 감안해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내 팬심도 다시 상승일로다. 내친김에 유니폼도 맞출 생각이다. 정규시즌은 끝물이라 해도 창창하게 가을야구가 남아 있으니까.
유니폼을 맞춘다면 예전부터 꼭 이걸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해태 타이거즈의 ‘부라보콘’ 유니폼이다. 96년부터 기아에 인수되기 직전인 2001년 7월까지 입었던 추억의 유니폼. 아이보리 바탕에 검정색과 빨강색이 세련되게 어우러졌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건 아니라 생각하지만, ‘추억보정’이 어느정도 들어갔을 수는 있겠다. 왜냐면 내가 야구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 타이거즈 선수들이 입던 옷이니까. 그래서 찬란하고 한없이 멋져 보였으니까.
구입을 결정하고 선수 마킹을 누구로 해야할지 고민한다. 왕조의 마지막을 같이 했던 선수들이 적당하겠지.
96년 한국시리즈를 마무리했던 투수이며, 97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ACE of ACE’ 이대진 선수가 먼저 떠오른다. 엉망이 된 몸으로도 끝까지 해태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선수가 아닌가.
마지막 불꽃을 고향팀에서 불태우고 있는 임창용은 어떨까? 누가 뭐래도 당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는데. ‘창용불패’라는 이름이 괜히 나왔겠어.
타자 중에선 ‘스나이퍼’ 장성호? 당시에는 풋내기 선수에 불과했지만 V9을 이룬 97년에는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잖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했던 선수기도 하고.
아니면 역시 이종범일까. 타이거즈 팬들의 神. 30홈런-64도루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남기고 두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던 시즌.
그렇게 하나둘 V8, V9을 합작해 낸 주역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짧게 터져나오는 탄식. 그 이름이 생각난다.
김상진. 1977년에 태어나 1999년에 져버린 별. 그가 세상에 머물렀던 시간은 22년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리다. 그렇지만, 그는 많은 걸 이뤄냈다.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보이는 신입생만할 때 말이다.
정규시즌 성적 역시 훌륭했지만 오늘날까지 기억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96-98 세 시즌동안 그는 24승에 3.90의 ERA라는 성적을 냈다. 합계 WAR는 6.32였다.
이대진과 김상진의 계보를 잇는 타이거즈 ACE가 될거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은 김진우가 첫 2년간 거둔 WAR가 9.5다. 페넌트레이스에서의 모습만으로는 그가 아직까지 기억되고 애잔함을 흩뿌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김상진은 화려한 라인업의 LG 트윈스를 상대로 잠실구장에서 완투승을 거뒀다. 한국시리즈 최연소 기록이다.
이종범이 떠났지만 타이거즈의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밝아 보였다. 시도때도 없이 튀어나와 몇이닝씩 삭제해버리던 임창용이 건재했고, 1선발 이대진은 당대 최고 수준의 투수였다. 그리고 이들과 삼각편대를 이룰 영건이 한명 더 등장한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를 둘러메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젖힐 대투수가 되어 주리란 기대. 찬란히 빛날 김상진의 미래를 의심한 사람이 있었을까?
이어지는 98년 시즌, 김상진은 잦은 통증을 호소하며 제대로 시즌을 마치지 못했다. 그리고 뒤따른 충격적인 결과는 위암 말기였다. 이미 위벽에서 시작한 암이 목뼈까지 전이가 된 상태였고, 이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그는 잔인하게 생명을 갉아대던 암세포를 이기지 못하고 1999년 세상을 떠난다.
타이거즈는 빠르게 몰락했다. 1998년 시즌에는 마지막 경기까지 플레이오프 진출을 두고 싸웠지만, 2연전을 내리 패하며 두산 베어스에 티켓을 넘겨 주어야 했다. 당시 김응용 감독은 이대진이 한경기는 꼭 잡아줄 줄 알았다며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이미 붕괴된 투수진을 혼자서 지탱하는건 이대진에게 너무 큰 짐이었을 것이다. 시즌 내내 그런 기대를 짊어지고 달렸으니까. 그리고 이대진 역시 98년 시즌에 탈삼진왕을 차지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운 후 지리멸렬한 재활길을 걸어야 했다.
그의 곁에 김상진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2연속 우승팀이 바로 포스트시즌에도 못올라가고 추락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1999년 해태 타이거즈의 팀ERA가 5.21이 될 지경으로 망가지진 않았을텐데.
선수들도 사람이다. 친구처럼, 동생처럼 아끼던 주변인이 떠나고 그들 역시 속병이 들었다. 팀 분위기가 멀쩡할 리가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IMF를 맞아 팀도 와해 직전까지 몰렸다. 이종범을 일본에 보낸걸로 모자라 임창용을 삼성에 팔아야 했다. 양준혁을 얻어왔다지만 현금 30억이 얹혀 있었다는 점에서 누가 봐도 팔려가는 모양새였다. 이강철, 조계현, 홍현우같은 주축 선수들은 FA로 하나둘씩 팀을 떠났다.
당장 V10을 이룰 것 같던 왕조는 그렇게 사그라들었다.
유달리 김상진을 아꼈다던 이대진. 재활을 성급히 끝내고 무리하게 복귀한 그는 200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전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타자로 전향한다.
그러나 전향은 실패했다. 상진이를 가슴에 품겠다며 11번을 달던 이대진은 결국 면목이 없다며 그 번호를 떼 버린다.
죽기 전 마지막 나들이로 63빌딩 전망대에 올라가 잠실구장을 찾았다는 김상진. 친형처럼 따르던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그가 남긴 말은 심금을 울린다.
“형님, 저곳이 제가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거뒀던 곳이죠…?”
지난 토요일(한국시간 일요일) 제가 밀워키 전에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을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올 때 하늘을 잠깐 올려봤습니다. 눈썰미 좋으신 기자분이 그걸 보시고 왜 하늘을 봤느냐고 질문 하시더군요. 깜짝 놀라서 “비가 오나 해서요”라고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첫 등판을 마치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상진이었습니다. 제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선 것을 가족과 친구들도 좋아했겠지만 상진이가 가장 기뻐할 거 같아서요. 승리나 세이브를 땄으면 마음속으로나마 상진이에게 선물했을 텐데, 아무 기록도 얻지 못했으니 그냥 하늘 한 번 올려보고 말았습니다. ‘상진아, 잘 있지?’ 이렇게 짧은 인사만 했습니다.
(임창용의 MLB 리포트 <4> 잠시, 김상진을 만나다)
떠난 사람은 야속하겠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은 그래도 흘러간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망자(亡者)는 망자(忘者)가 되어 잊힌다.
2017년이다. 김상진이 해태 타이거즈에 마지막 우승을 선물한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마침 타이거즈는 1위를 달리고 있다. 김상진은 하늘에서 자신의 팀이 우승하길 바라며 지켜보고 있을까. 그와 V9의 기쁨에 얼싸안았던 동료들은 속속들이 타이거즈로 모여들었다. 잠시 LG로 옮겼던 이대진은 투수코치로. 긴긴 여행을 마친 임창용은 다시 셋업맨으로. 김종국은 주루코치로.
사실 김상진은 암흑기의 영웅은 아니다. 그가 활약했던 시절은 왕조가 아직 빛을 잃기 전이니까. 그렇지만 타이거즈가 몰락한 시점은 그가 사라진 때와 일치한다. 그리고 긴 부진의 시간동안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면서 아픈 손가락이라 되뇌었다.
2009년의 우승은 드라마틱했다. 대신 스포트라이트는 끝내기 홈런을 친 나지완이 독차지했다. 오죽했으면 2승을 거두고 7차전에 계투로까지 등판한 로페즈를 밀어내고 MVP가 되었을까.
타이거즈 팬으로 바라건대는 – 먄악 올해 V11을 달성할 수 있다면 – 조금 차분히 경기가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는 가급적 원정이었으면 싶다. 두산베어스나 LG트윈스와 맞붙어 잠실이라면
더더욱 좋겠다.
왜냐면 김상진이 한국시리즈 완투승을 거둔 장소니까. 다들 그를 한번 더 생각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2017년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공은 임창용이 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우승을 확정짓고 배터리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면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 봐 주길 바란다. 하늘에 있는 그에게, 둘도 없는 동료의 세이브와 우승을 선물해 줄 수 있을텐데. 그리고 우리 모두 마음속으로 물어볼 수 있을텐데.
김상진 선수, 잘 지내지요?
마지막으로 . 2017년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공은 양현종 선수가 뿌렸습니다. 우승을 확정짓고 배터리를 이룬 김민식 선수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긴 했네요. 제가 바랐던 모습과는 다소 달랐지만, 하늘에 계신 김상진 선수가 기뻐할 만한 모습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가 완투승을 거뒀던 잠실 야구장이었고, 임창용 선수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 있었고, 무엇보다 영원한 아기호랑이로 남을 그의 소속팀 타이거즈의 우승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