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의 영웅들을 기억하시나요?
2017년 8월 12일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 KIA 타이거즈는 6점차 리드를 경기중 두번이나 맞았지만 그걸 끝내 뒤집어냈다. 대단한 저력이었다. 2009년에 V10을 달성할 당시에도 팀타율은 꼴등이었던 타이거즈 팬들에게 이번 시즌은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타이거즈는 분명 역사적인 시즌을 보냈다. ‘타신투병’이라고까지 불릴 만큼 투수들이 시련을 겪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이 중심에는 KIA의 새로운 4번타자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최형우가 있다. 100억원을 받고 이적한 그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최형우는 그 모든 걱정을 하늘로 날려버릴만큼 뛰어난 성적을 보이고 있다. 타이거즈로서는 2009년의 최희섭-김상현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리그 수위 레벨의 타자다.
격세지감. 상전벽해.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타이거즈의 2000년대 중반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7년 타이거즈의 4번타자는 누구였을까? 태평양을 건너온 광주일고 출신의 ‘빅 초이’ 최희섭이었다. 그 해 5월잠실에서 열린 그의 데뷔전이 기억난다. 빗맞은 안타로 얼떨결에 데뷔 신고식을 치른 그를 취재하기 위해 구름같은 취재진이 몰려 들었다. 경기가 끝난 이후 타이거즈 구단 버스로 향하는 그를 수십명의 기자들이 에워쌌던 기억이 난다. 그 바로 뒤에는 메이저리거 최희섭을 보기 위해 팬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만큼 타이거즈 팬들은 거포 갈증에 시달렸다. 물론 그 최희섭도 옮겨오자마자 바로 기대를 채워주진 못했고, 2008년 개막전 4번타자는 대졸 신인 나지완에게 빼앗겼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누가 호랑이 군단의 4번을 쳤길래? 성적이 실망스러웠으니까 팬들의 열망이 그렇게 컸던게 아닐까?
2006년, 타이거즈의 풀타임 4번타자는 이재주였다. ‘재주리게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수. 흡사 중남미 사람을 연상시키는 멋진 콧수염에 듬직한 체격으로 영화배우같았던 인상을 풍겼던.
야구를 꾸준히 봤던 올드팬이 아니라면 낯설 이름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재주는 특출난 선수는 아니었다. 스탯티즈 기준 통산 12.43의 WAR을 거두었으니 그렇게 못난 선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커리어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는 백업 포수와 대타로 주로 출전했고 대체선수 수준의 WAR를 기록했다.
김봉연과 김성한이라는 홈런왕을 가져 보았으며, 꼭 4번타자가 아니더라도 이종범과 홍현우같은 갭파워 히터들이 즐비했던 타이거즈 왕조의 타선에 익숙했던 팬들에게 이재주가 성에 찼을 리가 없다. 그래서 2006년은 타이거즈 팬에게 그저 그런 암흑기 중의 1년으로 기억된다.
” 4번타자가 홈런을 13개 치는 그런 때가 있었어. 일명 ‘4번타자 김기아’라고 말이지.. 전체 홈런을 다 합쳐도 다른 팀 4번타자보다 못하다고…”
홈런 13개는 분명 4번타자의 성적으로는 민망한 수치다. 그렇지만 이재주는 할 만큼 해 주었다. 사실, 꽤나 뛰어난 성적이었다. 적어도 2006년 시즌만을 말한다면 말이다. 그는 규정타석을 채우며 0.284-0.370-0.456의 타율-출루율-장타율을 기록했다. OPS는 0.826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일반 팬들이라면 납득이 갈 것이다.
‘아, 홈런 개수는 좀 적었지만 타율-출루율 갭이 1할을 넘나드는 훌륭한 눈야구를 구사했고, 2루타를 양산할 만한 갭파워도 있었겠네. 오, 2루타를 26개나 때렸네. 상당한 수준인걸. 저평가받은 시즌인 것 같다..’
이재주를 위한 변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06년의 그는 wRC+가 143.5였는데, 이는 리그 평균의 타자보다 43.5%나 더 높은 생산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이대호의 통산 wRC+가 149다. 통상적으로 wRC+가 120을 넘어가면 훌륭한 타자로 평가되며, 140을 넘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보아도 리그 수위급의 타자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해당 시즌 이재주의 WAR은 2.82인데 요즘처럼 144G단위의 기록으로 확대하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좋은 기록이다. 수비가 썩 좋지 않았던 1루수가 타격만으로 이정도 성적을 기록하긴 쉽지 않다. 당장 비교군을 떠오려도, 3할대의 타율에 20개 안팎의 홈런을 꾸준히 기록했던 브렛 필보다 못했다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재주는 우리에게 ‘대타홈런의 귀재’ 정도로만 기억이 되는 걸까.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본인에게 있다. 상술했듯이 그는 커리어 내내 백업포수와 대타요원의 자리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으며, 규정타석도 채우지 못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지 못했고. 게다가 통산 대타홈런 1위라는 기록 때문에 경기 막판에 툭 튀어 나와 승리를 안겨주는 ‘재주꾼’ 정도의 이미지가 박혀 버렸다.
20개의 대타 홈런은 결코 만만한 수치가 아니다. 어느정도의 펀치력은 물론이고, 레귤러 라인업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로스터에 들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통산 최다 대타홈런이란 훈장은 찬스에서 강한 ‘클러치 히터’의 덕목보다는 ‘꾸준함’의 미덕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결실이 아닐까.
그래서 이재주라는 선수를 다시금 추억해 본다. 프랜차이저로 팬들의 자랑이 될 만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꽤나 좋은 기억을 선물해 줬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