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몰랐던 그 방법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 외고가 의대 배출의 요람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때는 아니고 우리 몇년 전 선배들까지. 모교에서는 세자리수에 근접하는 의대 진학생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당시에는 '과학고 못갈 것 같으면, OO외고 이과 가라'라는 말까지 있었다.
명색이 외국어고등학교인데 주객이 전도된 이런 꼴이 계속 갈 수는 없었다. 결국 외고에서 자연계 수업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봤던 게 모교인 M외고와 경기권 A외고였고. 그 이후에도 이과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다만.. 학교에서 자연계 수업을 받을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문과 친구들과 똑같은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듣고, 방과 후 수업을 통해 이과 진도를 따라가야 했다. 수리와 과학탐구 영역의 진도를 따라가느라 고생하던 친구들이 기억난다.
논란의 중심이 되신 그분의 따님. 나랑 같은 세대더라. 2000년대 중후반에 외고입시를 치르고 들어갔던 사람들. 그때면 입시학원이 중3들한테 한달에 백만원씩 챙겨가던, 그야말로 외고 광풍이 최절정일 때지만... 뭐 외고 보낼 수도 있지. 그게 별거라고. 서울시교육감도 비슷한 논란에 시달렸지만 직무 잘 수행하고 계시니까. 근데, 이번 건은 가도 너무 갔다. 아무리 국내 저널이라 하더라도 1저자로 이름을 올린다? insane.
https://www.jpatholtm.org/upload/pdf/kjp-43-4-306.pdf?fbclid=IwAR0bRAOPM0Ghf4ZDbjGGugcaJBmbt9vek3laTUeCDBK-n-ooHvLQUsIH66k
논문 링크를 찾아 훑어봤다. 내가 전문성이 전혀 없는 분야라 내용을 평가하기는 어려우니까. 그와중에 정말로 그분의 이름이 가장 앞에 나와 있는 걸 보고 기함했다. 와, 정말로 이런 세상이 존재했구나. 레퍼런스만 30개가 넘어가는 논문을, 아무리 짧다지만, 새파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작성했다는 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년 후에 그 학생이 의전원에서 낙제를 했다는 사실을 굳이 덧붙여 알려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참고로 그 학생 우리식 분류대로 공식적인 '이과'도 아니었겠다. 진짜 그정도 수준이었다면 과학고에 보내지 않았을까. 정규과정에 유학반이 공식적으로 존재했던 대원-한영외고생들은 어느정도 이과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납득이 쉬이 가지는 않는다.
한 고등학생이 먼 길을 오갔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논문 1저자로 저널에 오르고 2년 후. 똑같이 고2가 된 나는 '국어' 시간에 '문학' 교사가 부여한 소논문을 써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리가 뭘 이런걸 해봤어야 알지. 당시 우리 팀은 '한국 언론사'를 주제로 한 논문을 쓰려 했는데..결국 여러 논문과 신문 기사등을 아카이빙한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을 메인레퍼런스로 짜깁기한 졸문을 제출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들 소논문을 그렇게 쓰는 줄 알았다. 당시만해도 소논문에 그정도로 집착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2009~2011년 경에는 교육특구 목동에서도 소논문을 쓴다고 전문가를 동원하는 쇼를 하지는 않았다. 대치동을 중심으로 소논문 대필이 횡행하여 자소서 등에 공식적으로 기입이 금지된 것은 이후의 일이다.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당시에 흔한 일이었다는 주장이 일고 있는데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렇다면 내 주변 외고생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고교 생활을 보냈단 말인가?
한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선구자의 개척정신. 입시의 최전선에 있던 동시대 외고생들도 꿈도 꾸지 못한 방식을 먼저 이뤄내신 것이다.
p.s : 해당 사건이 조국 후보자의 적격성을 가르는 중차대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거다. 알만한 사람들 눈에는 그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해달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