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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Aug 24. 2021

일은 잘하시던데, 그뿐이었네요

한 유능한 구청장에 대한 뒤끝 회고


* 2019년 12월에 작성한 글을 재구성했습니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였다. 남은 전공 학점을 채우기 위해 '여성과 정치'라는 수업을 들었다. 

종강을 앞두고 교수님께서 마련하신 '여성 정치인 특강'. 


나는 민주당 전현희 의원을 요청했고, 다른 학생들은 (당시)바미당 이혜훈 의원과 민주당 백혜련 의원을 원했다. 그렇지만 어쩐 일인지 교수님께서는 현직 의원이 아니라 당신께서 친분이 있으시다는 조은희 서초구청장을 모셔오셨다. 


어찌됐든 수강생 30여명 남짓인 작은 규모의 클래스에 현직 구청장을 초청한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정 능력이 워낙 탁월하다는 평가를 듣는 분이기에 나름대로 기대가 됐다.



강의 당일. 조 구청장의 강연은 나쁘지 않았다. 주로 본인의 업적을 나열하는 식이긴 했지만, 실제로 일궈놓은 것이 워낙 많으신 분이라 그마저도 과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열심히 일한 걸 홍보하는 거니까 뭐. 그런데 강의를 듣다가 굉장한 불쾌감이 들었다. 조 구청장은 서초구에 생긴 특수학교 '나래학교'의 건립을 본인의 업적이라고 설명했다. 맞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를 본인의 행정 성공 사례로 설명는 PPT 슬라이드에 대조군으로 강서구의 서진학교가 담겨 있었다. 이런 망할, 서진학교가 어떤 곳인데. 


서진학교는 강서구에 건립 예정인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 학교였다. 그런데, 한방병원을 건설해주겠다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의 끔찍한 공약 때문에 지역민들이 강력히 반발하게 된다. 결국 학부모들은 무릎까지 꿇어가며 애원하지만, 완공은 요원하게만 보였다. 착공 이후 두번이나 공사가 지연됐던 걸 보건대, 제대로 재를 뿌린 거다. 


(참고: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9090403931

(참고 2: https://imnews.imbc.com/replay/2018/nwtoday/article/4567996_30187.html )



무릎을 꿇은 학부모들의 사진이, 장애가 있는 자신의 자식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부모들의 절망이 조은희 구청장의 업적과 같은 장면에 들어 있었다. 화가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역겨웠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강연 잘 들었다고, 그런데 할 말은 해야겠다고. 조금 민감한 질문 드려도 괜찮겠냐고 말했다. 하세요, 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구청장님, 나래학교 건립  좋습니다. 좋은 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수하신 게 있습니다. PPT 슬라이드에서 대조군으로 쓴 서진학교 동진학교 말씀은 하시면 안되는 것 아닙니까.  일단 엉뚱한 데 책임을 전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민들의 이기주의? 님비현상? 주민들이 아무런 맥락 없이 그런 게 아닙니다. 2016 총선에서 해당 지역구에 출마한 '자유한국당'-구청장님과 같은 정당 소속이시죠- 김성태 의원이 학교 부지에 한방병원을 건설하겠다는 , 실현될 수 없는 '공약'을 내걸지 않았습니까. 


매우 질나쁜 공약이었습니다. 왜냐면 서진학교 부지는 애초에 교육용으로 지정되어 용도변경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디테일을 알지 못하는 주민들은 장애아들의 부모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공사가 멈췄습니다. 이런 참사가 발생했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김 의원은 무릎꿇고 애원하는 부모들 외면했고, 해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구청장님 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정당의 다른 끔찍한 대처를 대조군으로 들고 오신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리 구청장님이 그 일을 잘하셨어도 이렇게 비교하시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강의 종반부에, '서초구에서 되고 끝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기서 좋은 선례를 만들면 서울로 전국으로 퍼져 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제도 서초구가 좋은 선례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질문 드렸습니다.



질문이 끝나니 교실에 냉기가 감돌았다. 정치인답게 미소를 띠고 그는 답했다. 그런데 참으로 실망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강서구 거주하는 주민이 계신데, 실패한 사례를 들고 와서 자랑하는 것처럼 말해서 죄송하네요. 그런데 이거는 그렇게만 볼 건 아니에요. 주민들이 정말로 한방병원 건립을 원했다면, 왜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그런 걸 봐야죠.
 
그렇다면 구청장은 뭘 했죠? 구청장은 책임이 없나요?"


충격적이게도 그는 내 질문을 완벽히 곡해했다. 일부러 그런건지 알고도 그런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강서구의 실패 사례를 서초구의 성공사례와 대조해서 내가 셈을 낸다는 식으로. 그렇게 교실의 나머지 학생들에게 말했다.


화가 났다. 재차 반박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현직 구청장이라 해도 그 상황을  어떻게 막습니까? 구청장이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 나온 공약을 어떻게 통제해요?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제가 지금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부모들이 고통받았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활용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조 구청장은 내 지적을 수용하지 않았다.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피했다. 나는 지역내 기피시설의 수용을 반대하는 지역민들을 보호하는, 서초구에 열등감을 지닌 사람처럼 포장됐다. 그의 마지막 답변에 나는 이렇게 응답했다.


"결국 제 질문의 의도랑은 다른 답을 주셨네요. 그렇지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조은희 구청장은 서울의 현역 구청장 중 유일한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다. 지역민들의 신망이 두터워서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능력 있고, 일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유한국당 사람이라는 인상만이 남았다. 남의 눈물로 본인을 포장하는 사람에게 무얼 더 기대할 수 있을까.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172455_34936.html


결국 서진학교는 문을 열긴 했다.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은 지 4년만에 얻은 성과였다. 


무릎을 꿇었던 어머니들은, 아무도 자신의 자녀들을 서진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하염없이 개교가 늦어지는 개교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들의 자녀들은 성장했고, 

더이상 학교에 다닐 나이가 아니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06180.html

달콤 쌉쌀한 초콜릿을 씹는 것처럼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지만, 이야기는 좀더 이어진다. 


지난 5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 


서진학교 개교 과정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과 장애인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런데, 누군가 이 영화에 대해 배급 및 상영 중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당시 학부모들을 무릎꿇게 만든, ‘강서 특수학교 설립반대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한 모 주민이 

그 당사자인데,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면 명예가 훼손되고 초상권이 침해될 수 있어 배급과 상영을 중지해달라”고 

주장했단다.


그래, 이게 대한민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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