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남아있어야 회복도 있겠죠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은 그래도 안전할 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 해체의 단계다."
종영한지 3년이 넘은 드라마 <비밀의 숲> 종반부에 나오는 대사다. 단순한 검사 장르물로 끝날 수 있었던 비숲은 이 장면을 통해 웰메이드 드라마로 격상된다. 캐릭터에 부여한 입체성이 극 전체를 살린 순간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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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다른 상황이지만, 근 몇 달 간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폐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일련의 대사를 잘근잘근 곱씹어봤다. 대개는 십 몇 년 동안 터줏대감처럼 어느 골목을 지켜주던 곳들이었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띠링 띠링 울리는 메일 알람. 제발 카메라 렌즈를, 마이크를 들이대달라는 요청들. 어느 순간부터는 자영업자들의 그런 피끓는 애원도 일상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일 쓰러지는 사람들이 나왔겠지.
어느 일요일. 신촌에 취재를 나갔다. 코로나가 할퀴고 간 신촌 거리는 이미 유령도시가 돼가고 있었다. 버티지 못하고 떠나버린 술집은 시멘트 골조만 애처로이 남아있었고, 한때 문전성시던 피맥집은 사장님 한 명이 홀서빙까지 혼자 해도 될 만큼 한가해졌다. 정부가 '단계적 일상회복'을 예고한 날로부터 하루 전이었다.
회복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일상은 단계적으로 말라 비틀어지다가 죽은지 오래였는데. 난 수천 수억을 공중에 날린 상인들이 일상회복을 기대한다는, 거짓된 희망의 노래를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기록하고 싶은 건 정부의 방치 속에 한참 전에 골든타임이 지나간 디스토피아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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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최중심부에 쓸쓸히 내걸린 현수막 한 장.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들어왔다가 수억 원의 손해를 보고 가압류까지 당했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양심에 찔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갔다. 이미 어제자로 영업이 끝났단다.
사장님께 꼭꼭 전달 부탁드린다며 억지로 내민 명함 한 장.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미 늦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