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를 봤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구는 좋아하시는지도 궁금하네요.
12년에 걸쳐 꾸준히 쵤영된 작품인데, 그러다보니 세월의 흐름이 의도되지 않은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부분이 있어서요.
2005년. '로켓맨' 로저 클레멘스가 힘차게 마운드에서 공을 뿌립니다. 전성기를 보낸 레드삭스도, 화려하게 재기한 블루제이스도, 양키스도 아닌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습니다.
당시 클레멘스는 커리어 황혼기를 활활 불태우며 MLB 역사상 No.1 투수의 지위를 노리고 있었는데요. 전설 속의 인물들을 소환하고 있던 그 때 그 시절, 자식들에게 건네는 에단 호크의 대사를 보시죠.
"멋지지? 저 선수의 공은 아무도 못 쳐. 43살 선수 ERA가 1.47야. 믿어져?"
그로부터 2년 후, '미첼 리포트'가 공개되고 클레멘스는 금지약물 복용자로 지목됩니다. 이후 드러난 그의 실체는 그야말로 추악했지요. 그렇게 신화는 바스라졌고, 우리에겐 씁쓸한 아이러니만 남았습니다.
이런 쓴맛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누가 이걸 예상했겠어요?
2016년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해의 대부분을 광장에서 보냈는데요. 촛불의 시작은 방패를 들고 목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의 시민으로 그 행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가졌던 열망이란 정말이지, 순수했는데요.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는 제 롤모델이었습니다. 저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부단히도 노력했는데요. 물론 그 수준은 결국 도달하기 어렵겠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습니다만. 당시 촛불정국에서 천 기자의 분석은 대단히 명철했고, 예언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엄청난 파장을 이끌어내기도 했고요. 그런 흐름이 몇달간 지속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처럼 출근하지 않은 주말 오후. 문득 ,그때가 그리워 그의 '줌아웃'을 다시금 펼쳐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잡생각이 들어서 좀처럼 진도를 빼기 어렵네요.
천관율 기자는 시사인을 떠났고, 펜기자를 지망하던 저는 방송국에 왔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예상범위 안에 들어오는 것 같은데요.
2016년의 촛불 혁명이 결국 2021년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는 건 아직도 현실감이 없네요. 행간에 전하지 못한 의미를 담아봅니다.
아이러니, 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