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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의 영웅을 떠나보내며

영원한 스나이퍼 장성호를 추억하는 시간

by etincelle
2015120801000803800053131.jpg 나는 세기말의 타이거즈 유니폼이 아리도록 좋았다.





장성호가 떠난다.







타이거즈 팬으로 자라났다. '타이거즈'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가 이 팀을 응원한 시간이 '해태'와 '기아'를 관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어느덧 햇수로 18년째다.








네살 때였을까. 어느 상가 앞에 차를 세워두고 쉬고 있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어느 팀이 우리나라에서 야구 제일 잘 해요?"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럼에도, 묘하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지. 벌써 8번이나 우승했어. 아빠가 응원하는 팀이기도 하고."


"그럼 나도 그 팀 응원할래요!"


그렇다. 응원팀은 이렇게 대물림되는 것이다. 날 때부터 나는 타이거즈 팬이 되기로 정해져 있던 것이다. 사실 그때는 우승이 뭔지도 잘 몰랐다. 유치원에서 벌이곤 하던 축구나 피구 시합에서의 승리,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100경기가 훌쩍 넘는 정규시즌을 치러내고, 치열한 포스트시즌의 끝에서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우승컵이란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주식회사 해태의 톱니바퀴였다. 아직은 IMF라는 마수가 그룹을 덮치기 전이였고, 해태社의 신사옥이 맹렬한 기세로 올려지고 있던 때였다. 맛동산과 홈런볼과 부라보콘은 언제나 그랬듯이 잘 팔렸다. 건재했던 회사만큼이나 '야구팀' 해태타이거즈도 끝나지 않을 듯한 왕조의 저력을 과시했다.


95년 시즌이 끝나고 해태는 팀의 기둥 선동렬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마지막 시즌에 선발투수도 아닌 주제에 109이닝을 소화하며 ERA 0.49를 기록한 선동렬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정방어율인 ERA+의 수치가 763이다.(※이하 나오는 통계는 Statiz.co.kr의 것을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그는 리그 평균의 투수보다 무려 7배나 뛰어난 '신'이였다.



그렇지만 타이거즈는 오히려 KBO에 강림한 '신'과 이별을 고한 후에 두번의 우승을 더 일궈냈다. 아직까지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있었다. 이종범은 한물 갔다고, 이빨빠진 호랑이라는 비아냥을 듣던 구단에 두번의 우승을 더 안겨주고 일본으로 떠났다.




부엌 옆에 있는 창고는 내 장난감 방이였다. 장난감 통 위로 두개의 큼지막한 사인볼이 놓였다. 해태타이거즈의 96,97년 시즌 우승 사인볼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우승이 당연했다. 다음 우승까지 12년이 걸리리라고는 감히 예상치 못했다.


seriesImg1997.jpg 왕조의 마지막


왕조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을 때 나는 야구를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렸다.


푸른 그라운드에 박혀있는 다이아몬드들이 뿜어내는 매력을 어렴풋이 이해할 나이가 되자, 거짓말같이 타이거즈의 암흑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해태 타이거즈는, '기아' 타이거즈가 되었다.





타이거즈는 이미 오래전부터 타이거즈가 아니였다. 97년의 우승을 마지막으로 어느새 해태는 삼성이 아니라 쌍방울과 더 가까워진, 한물간 명문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타이거즈는 새로운 영웅을 배출한다.




장성호는 왕가의 몰락과 함께 비상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던데.' 해태 타이거즈에는 그 말만큼 야속한 말이 없었다. 97년의 우승 이후로 타이거즈는 거짓말같이 추락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98년은 그렇다 치더라도 99년과 00년의 타이거즈는 종이호랑이라는 이름도 아까울만치 초라했다.



해태의 마지막 우승 엔트리에 장성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장성호는 리그 평균수준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미약한 선수였다. 브라질의 축구선수 카카가 2002년 우승 엔트리에 들어 있던 것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하듯, 고작 2년차에 불과했던 그 역시 우승멤버로 기억되기에는 활약상이 미미했다. 장성호의 날개짓은 팀의 날개가 꺾인 98년부터 시작됐다. 프로 3년차에 장성호는 처음으로 3할을 넘겼다. 그는 20년동안 이어져온 타이거즈의 '좌타 잔혹사'를 시원하게 깨부순다. 장성호는 리그를 9번이나 제패한 강호 타이거즈가 처음으로 얻은, 내세울만한 좌타자였다. 그리고 그는 이를 넘어 리그를 대표할만한 좌타자로 성장한다.


168979-2-138755.jpg 기아 타이거즈 창단 초창기의 유니폼. 지금 봐도 참 촌스럽다.






해태 타이거즈는 2001년 올스타브레이크를 기점으로 기아 타이거즈로 재탄생한다. 뭔가 될 것 같았다. 팀은 몇년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종범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10번째 우승이라는 금자탑이 머지 않은듯 했다. 사실 그도 그런것이, 그때까지 KBO의 역사에서 우승은 두번에 한번꼴로 타이거즈의 것이였다.


그런데 일은 생각처럼 풀려 주지 않았다. 기아 타이거즈는 모기업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강팀으로 다시금 변모했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다. 최종전까지 치열했던 2001년의 포스트시즌 레이스에서 낙마한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기아가 팀을 인수한 첫번째 시즌이었으니까. 내년부턴 뭔가 달라도 다를테니까.


이어지는 2002년 시즌, 기아는 강력한 전력을 과시하며 정규시즌에서 2위를 차지했다. 2위였지만 시즌 막판까지 1위를 달리고 있었을만큼 팀구성이 탄탄했다. 당시 신인 최고계약금 7억원을 받고 입단한 김진우는 싱싱했고 19승을 거둔 다승왕 마크 키퍼와 후반기에 들어온 다니엘 리오스의 외국인 조합도 리그 최고 수준이였다. 그렇지만 알수없는 이유로 그들은 다 이긴 게임을 연달아 놓치며 LG에 패배했고, 한국시리즈에 가지 못했다.


2003년에도 비극은 재현됐다. 기아는 정규시즌에 2위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 SK에서 참패를 당했다.


두해 연속으로 고배를 마셨지만 팬들은 낙관적이였다. 구단이 투자를 많이 하고, 좋은 신인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대로면 몇년 안으로 우승을 하겠지.






그리고 2년 후 2005년, 기아 타이거즈는 창단 후 처음으로 8위를 한다. 꼴찌, 말이다.






우승에 익숙하고 패배를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보아 왔던 팬들에게 첫 꼴찌의 기억은 강력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타이거즈 팬들은 기아가 2002-2004 시즌에 3년연속으로 가을야구를 경험한 강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태의 마지막 우승부터 기아의 '열번째' 우승까지의 간극은 12년. 타이거즈 팬들은 이 구간을 '암흑기'라고 인식한다. 최고의 명문구단이라는 자부심에 살던 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기억하기 싫은 시간이다.



그렇지만 장성호는 기억된다.


암흑기였다지만 한해정도 반짝하는 선수들은 더러 있었다. 몇년간 마운드를 지켜준 김진우와 신용운, 2007년에 깜짝 타격왕을 차지했던 이현곤처럼. (사실 이현곤은 몇년간 내야 라인을 탄탄히 지켜주었다는 점에서 반짝스타로 제껴 버리기엔 다소 미안한 감이 있는 선수긴 하다. )




장성호는 그 기간 내내 꾸준했다. 그만큼 꾸준했던 선수는 리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수치로 봐도 장성호는 리그 최고 수준의 야수였다.


장성호는 1998년부터 2006년까지 9년연속 3할을 쳤다. 양준혁을 뺀다면 그런 일관됨을 보여준 선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똑딱이도 아니였다. 장성호는 최전성기에는 OPS가 9할 중반을 상회했으며 20개 전후의 홈런을 생산하는 갭파워(gap-power) 히터였다. 뿐만 아니라 출중한 선구안으로 한차원 높은 눈야구를 구사한 선수이기도 했다.


때문에 세이버매트릭스에 기반한 2차 가공스탯에서 그의 기록은 더욱 빛이 난다. 가중출루율 wOBA는 4할 초중반을 넘나들었고 (보통 wOBA가 4할 전후면 리그에서 한손가락 안에 드는 타자다.) wRC+도 140 아래로 좀체 꺾이질 않았다. 그는 타이거즈의 암흑기를 지탱하는 내내, 리그 평균 수준의 타자보다 적어도 1.4-1.5배 이상의 생산력을 자랑한 타자였다.



그런 장성호는, 견디기 힘든 시즌들을 넘기고 있던 팬들에게 유일한 희망이고 자랑거리였다.





그런 암흑기에도 우리 부자는 야구장에 부던히도 갔다. 2004년에는 아예 기아 타이거즈 어린이회원증까지 만들어서 주말마다 야구장에 부지런히 출석도장을 찍었다.


잠실야구장 전광판에 찍힌 선수 오더를 확인할때, 3번타순에 박혀있는 장성호라는 이름 석자를 확인하면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이긴 경기보다 진 경기가 많았지만 그래도 장성호의 타순이 돌아오면 안타 하나 정도는 쳐줄거란 기대감에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그는 꽤나 높은 확률로 그 기대를 현실로 만들어 주곤 했다.



그는 암흑기 타이거즈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으며, 유일한 자존심이였다.



2005년 시즌을 마치고 장성호는 FA가 되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던 나는 유스호스텔 로비에서 TV로 장성호의 '4년 42억' 계약을 확인하고는 펄쩍펄쩍 뛰어 다녔다.

장성호-20030327.jpg 그는 암흑기에 혼자 빛나는 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팀의 몰락 속에서 꽃을 피웠던 장성호는 명가의 부활을 함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 나갔다. 거짓말같은 추락이었다.


2009년, 타이거즈는 12년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 중반부터 무섭게 기세를 타더니 결국 리그 역사에 남을드라마틱한 우승을 차지했다.


공백의 12년을 가장 성실히 메꾼 선수는 단연 장성호였다. 그러나 2009년의 타이거즈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우승은 그간의 꾸준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였으니까. 단 한시즌만에 최희섭은 전직 메이저리거의 저력을 보여주며 리그 최고의 1루수가 되었고, 그 뒤는 이적생 신화를 써내려간 MVP 김상현의 자리였다. 심지어는 2년차 신인 나지완마저 23개의 홈런을 쏘아 올리며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을 차지했다.





장성호는 로테이션 멤버가 되었다. 타이거즈 최고의 선수는 이렇게 벤치로 밀려났다.




그리고 두번다시 이전의 장성호로 돌아오지 못했다.






2015120715110887213_2.jpg 그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참 낯설었다



커리어 말년에 한화-롯데-KT를 떠돌며 저니맨으로 전락한 장성호를 보는 일은 고통이었다. 애써 외면했지만 자꾸만 눈에 밟혔다. 타이거즈와 좋지 못한 모양새로 헤어진건 아무래도 좋았다. 한때의 영웅이 그렇게 스러져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리바운딩에 성공해서 한줌의 영예라도 쥐고 떠나길 바랐다.




그런 그가 이제 영광과 인고의 세월을 뒤로 하고 그라운드를 떠난다고 한다. 그 모든 미련을 내려놓고 선수 생활을 마감하겠다고 말한다.









암흑기의 영웅은 외롭다.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다른 선수들 모두 쓰러진 와중에도 끝까지 아득바득 최선을 다하고 독기를 발산해야 한다. 시선을 거두지 않는 팬들이 있으니까. 그들의 응원에 보답해야 하니까. 그렇게 버둥거려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누군가는 그 고독한 타이틀이 멋스러워 보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겠지만, 당사자에게는 그저 무거운 멍에일 것이다.



donnie_04.jpg THE HIT MAN, 돈 매팅리



우리에게는 다저스의 감독으로 더 익숙할 돈 매팅리(Don Mattingly). 그는 암흑기의 뉴욕 양키스를 혼자서 들러메고 방망이를 휘두른 영웅이었다. 그와 장성호는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각자의 소속팀이 리그에서 가장 많이 우승을 차지한 명문 구단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소속팀의 유일한 에이스였다는 면에서. 우연의 일치인지, 개인 기록마저도 닮아 있다. 돈 매팅리는 통산 222홈런에 2153안타를 기록했고, 장성호는 통산 221홈런에 2100안타를 기록했다. 물론 시즌당 경기수가 다르기에, 그리고 리그의 수준이 다르기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그 둘이 리그에서 차지했던 위상이 비슷했다는 증거론 충분할 것이다.


돈 매팅리는 1995년 시즌이 지나고 등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Don_Mattingly_Strikes_Out.jpg 프랜차이즈의 쓸쓸한 퇴장


그리고 팀은 거짓말처럼 1996년시즌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가 떠난 양키스는 ‘코어 4’라고 불리는 신성들이 이끌어 갔다.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엔디 페티트, 마리아노 리베라. 팀의 아이콘은 뉴욕의 아이돌 데릭 지터로 바뀌었고, 양키스는 1996~2001 6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4번의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10년간 팀을 지탱하던 최고의 프랜차이즈가 떠났지만 사람들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그를 잊었다.


우승을 다시금 경험하긴 했지만 장성호의 처지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우승을 하지 못했다면 덜 비참했을까?






장성호는 늘 웃었다. 땅볼을 치고 아웃을 당해도 사람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오랜 부진에 인내심이 고갈된 팬들은 그런 웃음에까지 성토를 보냈다. 악바리 근성이 없다고, 해태 타이거즈 출신이 저래도 되냐고. 팬들은 김봉연과 이대진, 이종범이 보여주던 미련하리만치 무서운 깡을 원했나보다.



그런 장성호가 어느 순간부터 좀체 웃지 않았다. 커리어 말미의 그는 이전의 장성호가 아니였다. 초라한 기록도 기록이었지만, 위축된 그 모습은 장성호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타이거즈를 떠났다.










타이거즈가 끝이 보이지 않는 부진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사람들은 생각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터널의 끝은 장성호가 이끌고 올 것이라고.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왕조의 마지막 우승을 경험한, 암흑기 타이거즈 최고의 영웅이 다시 찾아올 영광의 시대를 알릴 것이라는 사실을.






돈 매팅리는 양키스에서 영구결번을 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레전드를 배출한 명문구단에서 그에게 안겨준 최선이자 마지막 배려였다.



장성호가 타이거즈에서 영구결번을 받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구단과의 헤어짐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기도 했고, 타이거즈는 원체 영구결변에 깐깐하게 구는 팀이니까. 타이거즈 타자 프랜차이즈의 온갖 기록을 다 가지고 있는 장성호지만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1185852065.121054_PP07073100001.JPG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누군가에게 장성호는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그는, 야구를 좋아한 이후로 처음으로 가져본 영웅이었다. 타이거즈 팬에게 최고의 영웅은 누가 뭐래도 이종범일 것이다. 그렇지만 장성호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선수였다. 아마 내가 본격적으로 야구에 미쳐갈 무렵에 각성한 그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10년도 넘은 일이 되었다. 추억이다.




이제 그를 보낸다.




덕분에 즐거웠어요, 장성호 선수. 고마워요.






콘텐타 매거진에도 실린 글입니다.



http://magazine.contenta.co/2016/06/%EC%95%94%ED%9D%91%EA%B8%B0%EC%9D%98-%EC%98%81%EC%9B%85%EC%9D%84-%EB%96%A0%EB%82%98%EB%B3%B4%EB%82%B4%EB%A9%B0-%EC%98%81%EC%9B%90%ED%95%9C-%EC%8A%A4%EB%82%98%EC%9D%B4%ED%8D%BC-%EC%9E%A5%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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