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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Feb 17. 2016

포퓰리즘의 확립을 위하여

우리 모두는 선민(選民)이다




국회에서 야당이 주장하고 토론에 붙이면 되지 않는가?



사진출처: www.moneyweek.co.kr





지난 11월의 민중총궐기대회에 대한 이준석(前 새누리당 혁신위원장)의 일갈이다. 얼핏 보면 일리 있어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의회는 그런 일을 위해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저 발언에는 '그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함의가 담겨 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의회에서의 정치논쟁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허나 이것만이 유일한 민주주의라고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이는 정치를 오롯이 독차지하려는 지배층의 오만이다. 그들은 '대중에게서 유리된 정치'를 원한다. 자연스럽게, 정치를 망치고 있다는 비판의 초점은 포퓰리즘에 맞춰진다.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지성, 자크 랑시에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퓰리즘'은 의회정치를 불신, 거부하는 적대적 인민의 형상을 그려내기 위함이다."



Jacques Rancière.





랑시에르의 말을 좀 더  살펴보자. 그는 오늘날 포퓰리즘에 대해 가해지는 모든 비난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포퓰리즘은, 현재의 체제(자유주의적 의회민주주의 체제)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생각'을 강제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틀 아래에서 오늘날의 '인민'은 국가권력에 의해 추인된 무기력한 '합법적 인민'이거나, 민주주의적 과두정에서 배제된 위험한 '불법적 인민'이다.

 


이와 같은 비판들은 결국 포퓰리즘에 대한 '그분들' 멋대로의 재단을 시사한다. 포퓰리즘을 정부의 지배적 실천에 대한 거부반응이자, 의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불온한 사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의(民意)에 기반한 포퓰리즘이다.




민주주의. Democracy. 국가를 이루는 개개인의 힘에 의존하는 정치체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호도되는 바와 달리, 포퓰리즘은 오히려 본 체제의 본질을 관통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포퓰리즘의 어원인 'popular'라는 단어부터 제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popular [미국]        1.인기 있는  2. 대중적인  3.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populaire [프랑스]  1.민중의,인민의,대중의  2.인기있는,일반 대중이 좋아하는  3.인민,대중
popular [스페인]     1. 국민의, 민중의  2. 서민의  3. 국민당원
populär [독일]         1.대중적인, 평판이 좋은  2.통속적인, 평이한




우리는 'popular'라는 형용사에서 '인기'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렇기에 'populism (포퓰리즘)'이라는 사상에서 '인기에 영합하는'이라는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이다. 하지만 popular는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오히려 많은 나라에서는 '국민의', '대중의', '일반적인'이 보편적 의미로 통용된다. 포퓰리즘은 '국민의 사상', '대중의 사상', '일반적인 사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기영합주의'라는 프레이밍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배층이 투사(投射 , Projection)해 낸 설계 그대로 포퓰리즘을 보는 것이다. 이에 반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민주주의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종류 역시 굉장히 다양하다. 자유민주주의/사회민주주의처럼 사상적 층위에서 나뉘기도 하고 직접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같이 형태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준석의 발언은 독선이다.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대표자들의 정치 선상에 경계를 설정한 것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기준선을.


우리는 국회에 갈 수 없다. 그런 우리들에게 그들은, 자기들의 정치만이 정답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자신들에게 일임된 의회민주주의만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우리에게 최면을 건다. 이성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없다. 권력을 향한 이런 일련의 주술적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선민의식이다.








2012년 총선에 참여할 수 있던 총 유권자수는 4019만 명이었다. 대한민국 국회는 지역구 246석에 비례대표 54석을 합쳐 3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단순히 계산했을 때, 국회의원 1명은 13만 명의 유권자를 대표하는 셈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정치적 권능權能은 우리와 같지 않다. 국회의원과 일반 시민의 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자크 랑시에르를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정치적 평등은 이뤄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깔려 있어야 할 조건이다. 어디까지나 정치철학적인 테제다. 현실에서는, 안타깝게도, 머나먼 이야기다.  



본인은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의 발언에는 정치적 선민의식이 담겨 있다. 13만 분의 1이 아닌, 그저 '1'에 불과한 국민들에겐 결국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을 '인기영합주의'로 사용하는 이들은 종국에는 이 개념을 '중우 정치론'으로 끌고 내려간다. 멍청한 국민들이 정치를 망친다는 것이다. 성급한 누군가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까지 들고 나온다. 맙소사. 너무 빨리 이 땅을 뜬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고 싶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국회의원들은 분명 선민選民이다. 그런데 선민이라 해서 선민의식을 가져도 된다는 말은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다.  본인들을 선민으로 만들어 준 국민들을 '멍청한 대중'이라 깔보아도 된다고 그 누가 감히 말했겠는가.



포퓰리즘을 지양하는 정치는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해야 할까. 애초에 '인기영합주의'에 씌워진 극단적인 낙인부터가 문제다. 모름지기 표가 나오는 곳에서 권력이, 정책이 나오는 법이다. 국민이 바라는 대로 정치를 하는 것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인기를 얻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나쁠 수가 있겠는가? 절대 아니올시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물론 언제나 국민의 뜻대로만 정치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직접민주제 대신 대의민주제가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체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대의민주제에서 대표자들은 유권자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독립적인 힘을 부여받았으니까. 하지만 그 힘은 사사건건 유권자를 찍어 누르고, 완장질을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국민의 요구를 따르되,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집행을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다. 좀 더 뛰어난 권능을 소신껏 펼치라는 배려다.




그 배려를, 대표자들은 괄시로 갚고 있다.





그야말로 배신의 정치다.












포퓰리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지도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과거 그리스에서처럼 특정 계층과 성별을 배제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정치를 할 수는 없다. 이 체제에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포퓰리스트가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동시에,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포퓰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시민적인 것(언어)과 포퓰리즘적인 것(담론)을 말할 때, 거기에는 일종의 의심과 혐오가 따라온다. 받아들이자. 그리고 당당해지자. 우리가 '포퓰리즘'을 통해 겨누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모호한 시니피앙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내자.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결국은 시민에 대한 신뢰에 언제나 우선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정치성을 향한 출발로, 정치의 재발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의 밑바탕에는 우리 역시 선민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커버 이미지 출처: humanistfederation.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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