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윙>의 스택하우스, 더불어민주당의 김광진, 그리고 필리버스터
더불어민주당에서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Filibuster, 무제한토론)를 김광진 의원을 필두로 시작했다. 사실 우리 정치문화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광경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던 1973년 '시간제한' 조항의 신설로 사라졌고, 2012년에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으로 39년만에 부활했다. 본 필리버스터는 선진화법의 통과 이래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질 필리버스터의 성격과 의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미드 <웨스트 윙 The West Wing>의 이야기다. 우리에겐 <소셜 네트워크>, <머니볼>, <뉴스룸>의 각본가로 더 잘 알려진 아론 소킨의 출세작이며, 조지 부시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볼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던 정치 드라마다.
인디펜던트인 노령의 상원의원 스택하우스는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수십시간에 걸친 필리버스터를 지속해 사람들의 우려를 산다. 중간에 물 한모금 마실 수 없는 무제한토론인만큼 혹여나 쓰러질 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민주당 입장에서는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의료법안이었기에, 제드 바틀렛 대통령 이하 백악관 참모진들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려 동분서주 애를 쓴다. 공보부 비서인 다나 모스가 알아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스택하우스 의원은 자폐증에 걸린 손자가 있었는데, 민주당의 법안은 자폐증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법안이 투표에 부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약없는 필리버스터를 벌이고 있던 것이다.
이에 바틀렛 대통령은 손주를 둔 상원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스택하우스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행정부의 수장이 입법부에서 일어나는 의사방해에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이다. 정말 감동적인 부분은 그 다음이다.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상원의원들은 줄줄이 스택하우스의원에게 '질문'을 한다, 아주 기나긴 질문들을. 필리버스터란 진행방해 그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한 아이의 할아버지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 '새우로 만들 수 있는 20가지 요리' 같은 의미없는 텍스트를 기약없이 읽어내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에게 '동료 할아버지'들은 마찬가지로, 의미없는 질문을 릴레이로 쏟아낸다. 먹먹함에 눈시울을 붉히는 스택하우스의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며,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정치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국회에서 조용한 방해를 몇년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한쪽에서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불통의 장막을 소화기를 던져가며 깨부수는 그림이 훨씬 익숙하다. 너무 자주 목도해서 그게 오히려 일상이며 정상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그래서일까. 김광진 의원의 바통을 넘겨받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에서 준비해놓은 의원들과, 이에 힘을 더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정의당의 모습을 보자니 괜시리 뭉클해진다.
'부동층'이라고도 불리는 비판적 무당파층을 움직이려면 이정도는 해 줘야 한다. 이런 낭만이라면, 이런 소리없는 아우성에는, 회의주의자를 자처하는 시민들도 조금은 움찔할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