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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Mar 10. 2016

젠더와 섹스를 허물어라

원본없는 성역(性域)과 신화 전복하기




'사회학적 여성'이야 아니면 '생물학적 여성'이야?




중고등학교 내내 치열하게 굴러가는 입시판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외모에 무신경한 여학생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그들이 결코 외모에 무신경한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튀지 않으려면, 수군거림을 피하고 싶다면, 입시와는 무관한 꾸밈이란 행위에 관심없는 것처럼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외모에 별 신경을 안쓰기는 남학생도 마찬가지였다. 훨씬 심하면 심했지. 적어도 여학생들은 졸업사진 찍는 시즌이 다가오면 고3임에도 불구하고 밥을 굶고 스페셜K 시리얼을 먹는 쇼타임을 가지기라도 했다. 남학생들은 그런걸 비웃을 뿐이였다.


이에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는 사실에 손가락질을 당하는건 여성, 뿐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사회학적 여성과 생물학적 여성. 굉장히 편파적이고 임의적인 구분이다. 이는 '젠더'와 '섹스'를 가름할뿐만 아니라, '젠더'가 후천적으로 획득해야 할 사회적 가치라는 점을 뜻한다.


'사회적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름다워져야 한다. 아니면 출산을 통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사실, 젠더와 섹스의 구분은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 누구도 남성을 섹스와 젠더라는 가치로 구분할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성은 늘 성적 존재/무성적 존재 중 하나로 규정된다.



섹시녀이거나, 어머니거나.




당연하게 여겨짐에도, 이런 프레임은 폭력이다.







틸다 스윈튼



<케빈에 대하여>는 자신이 추구하고 싶은 자유와 모성의 굴레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을 그려낸다. 그리고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모성의 신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극에서 어머니로 등장하는 에바(틸다 스윈튼)은 원치 않던 임신으로 인해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계획한 인생이 엉망으로 꼬이게 만든 첫 아이 케빈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그렇지만 모성이란 신화적 테두리가 전제되어 있기에 그녀가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머니라면 누구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모성애를 지닌다고 여겨진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덕목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는 사회적 강압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에서 잉태된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라고 해서 돌연변이는 아니다. 비(非)모성이 비정상과 동격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주디스 버틀러 (출처: 채널A)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그는 대표작 <젠더 트러블>에서 '패러디, 수행성, 반복 복종, 우울증'을 젠더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정의내린다. 이 중 패러디를 살펴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패러디는 '원본에 대한 분석 이후'에 이루어지는 '의도적 모방'을 말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 개념의 전제를 부정한다. 원본이라는 개념은 이미 제도문화의 이차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패러디적 정체성이 모방할, 본질로서의 원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꼭 '여성'처럼 꾸며야 할까?



그래서 버틀러의 젠더-패러디는 '기원 없는 모방'을 통해서만 구현되는 젠더를 드러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성/여성같은 젠더는 2차적 개념이란 얘기다. 이러한 통념의 전복 속에서 'LGBTQ'로 상징되는 성소수자들 역시 든든한 발판 위에 설 수 있게 된다. 이성애자가 정상이고, 동성애자가 비정상인 것이 아니다. 바이섹슈얼도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가 '복사본'이라는 동등한 지위를 공유한다.






사랑과 성, 결혼과 출산 간의 관계에는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정(性情)이 다른만큼,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인위적 화장으로 자신을 꾸미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꾸미더라도, '보이쉬'내지는 '걸크러쉬'스타일의 매력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싶을 수도 있다. 굳이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미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모성 역시 이상적이고 신비화된 본질이 아니다. 어머니는 성취지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이는 여성의 일생 중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정한 한 국면이다. 이렇게 말한다 해서 모성의 위대함이 퇴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부담일, 성역(性域)의 귀퉁이를 조금 허물어 내고 싶을 뿐이다. 어머니 역시 자아를 추구하고 섹슈얼리티를 가꿀 권리가 있다.




이토록 당연한 일에 의심을 하지 못하게 만든건 우리 사회의 제도와 규범이다. 반복되는 지배담론은 여성성과 모성을 신비화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등하다. 그런 안개와 베일 따위 필요 없다. 도로 가져갈 사람이 없다면, 우리라도 걷어내야 한다. 타파해야 할 억압이다.






참고서적
- <젠더는 패러디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읽기와 쓰기>, 조현준, 현암사





(커버 이미지 출처: www.globalto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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