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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Mar 06. 2016

이미지, 각인, 느닷없는

밀란 쿤데라 <농담>, 왕가위 <아비정전>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순간적으로 결합하는 이미지가 있다.










그렇게 예고없이 합일된 이미지들은 좀체 분리되지 않는다.






느닷없는 각인이다.









나는 웬만해서는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집어들지 않는다. 영상으로 투사된 인물을 보고 있자면, 스포일러를 당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잘 쓰여진 소설은 읽는 내내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의 머리 스타일은 무얼지, 눈은 무슨 색깔일지, 체형은 어떨지 그려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미 기억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차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가까운 친구와 흡사한 모습을 띠기도 한다. 이런 대응이 만족스러울만치 그럴듯하게 이루어진다면, 굳이 영상으로 감상을 흐릴 필요도 없다.



프로도 배긴스




필름으로 현상된 이미지가 활자가 불러낸 그것보다 질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기준에는 그 둘사이에 선후관계가 존재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꽃처럼 청초한 매력을 뽐내던 일라이저 우드. 그렇지만 원작의 프로도는 50세다. 호빗과 인간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반지의 제왕> 텍스트 속의 프로도와 영상속 일라이저 우드의 괴리는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그래도 참을만은 했다. 예상했던 각인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집어드는 순간 이언 매켈런과 비고 모텐슨, 올랜도 블룸이 내 눈앞에 쉴새없이 뛰어다닐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각인이 찾아들기도 한다. 그것도 전혀 다른 맥락의 작품들 사이에서 말이다. 물론 의도성은 개입되지 않았다. 그냥. 말그대로 그냥 방문한 손님같은 이미지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고 있었다. 주인공 루드빅이 수용소에서 외출을 나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 장면이었다.



그때, 나는 루치에를 처음 보았다. ...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는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로 가득한 느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수로 가득한 느림이 감돈다던 루치에. 그녀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는 중 불현듯 이미지 하나가 눈앞에 파르륵 펼쳐졌다.  




왕가위의 <아비정전>에 나온 수리진(장만옥)이었다.



<아비정전 Days of Being Wild>



왕가위는 감독이기 이전에 작가적 존재다. 그렇기에 그에게 붙는 'auteur',라는 칭호는 전혀 아깝지 않다. 별다른 내용도 없어 보이는 각본으로도 가슴이 저릿한 드라마를 엮어내는 그의 매력에, 그의 핸드헬드 카메라 기법에 전세계는 들썩였다.




쿤데라의 <농담>은 공산화가 진행되던 시기의 체코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한다. 루드빅이 첫눈에 반한 루치에는 당연히 슬라브계통의 여인일 것이다. 왕가위의 <아비정전>은 홍콩의 신시티를 무대로 한다. 루치에와 수리진은 인종부터가 다르다. 그런데 나는 루치에와 수리진을 분리시킬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느닷없이 찾아온 각인이었다고.







장만옥





단 한순간도 그녀의 느림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거의 그녀가 천천히 앉아 있었다, 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 마치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또는 무언가에 너무 사로잡혀 주위의 일을 완전히 잊은 채 자기 내면으로만 온통 집중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의미없는 갖다붙이기 식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루치에에게 귀띔도 해주지 않고 불쑥 찾아온 수리진에게 이유를 캐묻고 싶지는 않다.









아비(장국영)에게 버림받고 넋이 나간 수리진을 불안하게 훑어 내리던 카메라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있던 수리진에서 맴돌던 느림이 기억 어딘가에 자리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찾아왔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유없이 방문한 손님처럼, 느닷없이 새겨지는 각인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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