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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Apr 08. 2016

투표율을 높이고 싶다면

우리에게 정치를 배울 기회가 있기는 했나요?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참정권을 얻은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세번째 투표가 되었다.







우리 중대는 12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단 여덟명만이 투표를 하겠다고 경찰모자에 기동복을 입고 가까운 주민센터까지 열맞춰 걸었다. 내일도, 투표당일인 13일도 휴무가 아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오늘밖에는 투표할 기회가 없던 셈이다. 그럼에도 초라할만큼 적은 수만이 투표권을 행사했다. 중대 투표율을 억지로 계산해보면 6% 남짓이다. 예상보다 더 처참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소대원들에게 투표 독려도 해보았고, 이에 꽤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참정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의무경찰도 사전투표를





주제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참의 이유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잘 몰라서..."였다.







4년전의 나는 총선 투표율을 보고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페이스북에 치기어린 글을 내놓는 학생이었다.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글이었던걸로 기억된다. 지금은 그때같지는 않다. 무뎌진건 아니다. 그러려니 넘기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을 조금 더 살았고, 그럴만하다고 여길만한 개연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몰라서 투표를 못 하는거다. 그거면 됐다.







투표를 안 하는 사람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 정치를 몰라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

둘,    정치를 싫어해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



후자는 다시 둘로 나뉜다. 정말로 정치를 잘 알지만 그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투표를 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유권자는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볼 수 있다. 이 결론, 맘에 든다. 꽤나 희망적이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니까 말이다. 가르침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은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가르침은 마땅히 학교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정치'를 제대로 배워 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사회탐구 정치 영역이 있지만, 소수의 문과 수험생만 선택하는 과목이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수박 겉핥기로만 정치를 배우고 학교를 나서고 성인이 된다.







정치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자신의 저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Is Democracy Possible Here>에서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한다.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현대정치' 과목 만들기






학생들에게 정치를 제대로 알 수 있는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교과목표는 간단하다.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정치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굳이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도 없다. 맛만 보여주어도 된다. 그저 정치가 두려워 할 일이 아니며, 혐오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려줄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사회탐구 영역 사회문화를 즐겁게 공부하며 빠져드는 친구들을 많이 보아 왔다. 정치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한다. 우리는 몰랐기 때문에 당당하게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직접민주주의부터 현대의 대의민주제와 정치철학까지 포괄하는 커리큘럼을 상상해본다.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대학 수준의 복잡한 수학문제도 척척 풀어내고 기대승과 이황의 이기론 논쟁까지 어렴풋이나마 마스터하고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그다지 벅찬 과제가 아닐거라 생각한다.














몇년전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이 말의 해석은 일종의 '시민 계몽 프로젝트'와 이어진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시민이 각성하면 정치 참여 욕구가 발생한다. 이때 정치권이 할 일은 각성한 시민이 좀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의 문턱을 낮춰주는 것이다. ‘각성’이 확산되고 문턱이 충분히 낮기만 하면, 깨어 있는 시민이 당내 경선과 본선 모두에서 다수파가 될 수 있다. ( '좌절된 유시민의 리버럴 정치', 시사IN, 천관율기자 )





깨어 있는 시민이라는 말은 대다수의 시민이 잠자고 있음을 함축한다. 이는 정치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우리 시민들의 불편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교육을 통해 정치를 체득시킬 수 있다면, 잠자는 시민을 애써 깨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수줍게 "잘 몰라서.."라고 대답하는 말에는 이런 뜻도 숨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알고는 싶은데 기회가 없어서..







우리는 그정도 기회는 제공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에도 써있잖는가. 그러니 정부는 마땅히 우리를 깨워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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