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입대 이후 쓴 글이 어느 새 50편 넘게 쌓였다. 기념이라기엔 거창하지만, 때가 되었다 싶어 복기를 쭉 해 보았다. 그전에도 글이 잘 써지지 않으면 조금씩 되돌려 읽긴 했지만 완전히 돌아가 본 적은 없었다.
과거로, 이전의 글로 내려갈수록 잘 안 읽힌다. 어렵다. 가소로운 지식의 설익은 과시가 새삼 부끄럽다. 사실 요즘 쓰는 글도 그리 쉽게 읽힌다고는 못 하겠다. 나는 내 글이 어렵다는 걸 인정한다. 이미 이 지점에서 작가로는 낙제를 받아야 한다. 글쓴이조차 다시 읽기 싫은 글을 어느 독자가 읽고 싶겠는가?
구차하지만 변명을 하고 싶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주기적으로 글을 쓰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로망이라고 하는게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군대는 그런 꿈을 어설프게 흉내내기에 꽤 괜찮은 장소였다. 당장에 매진해야 할 과제도 시험도 없다. 생계를 위해 우선해야 할 과외나 알바 역시 없다. 작은 성취에도 그만하면 대단하다고 칭찬받을 곳은 내 인생에 군대가 마지막일 것 같다. 그래서 뭐라도 좋으니 남겨보자는 생각에 책을 읽었고, 글로 연결될 만한 부분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추출해서 이어 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생각이 발전해서 새롭게 정립되기도 하였다. 나는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런 수준미달의 글에도 생각외로 수요가 '좀'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발전을 꾀하려고만 했기에, 누군가에게 잘 읽히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이런 예상치 못한 수요 이후로는 이전과 같은 자세로 글에 임할 수 없었다. 조금만 쉽게 써달라는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갈팡질팡.
딜레마가 생긴다.
'나는 아직 미욱한 존재일 뿐인걸. 1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학부생에 불과한데. 대중들에게 어필할 만한 글을 쓸 능력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얌전히 책이나 읽고 생각이나 키우는게 순리가 아닐까. 글은 한편으로 제쳐두는게 맞는게 아닐까?'
뭘 알아야 쉽게 쓰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미약하고 미욱한 지식으로 힘겹게 짜내는 글들이 과연 가치가 있는 걸까. 내가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투정을 부려 보았다. 학자도 아닌데 칼럼같은 글을 써내기가 머쓱하다고. 나는 아직 그 무엇도 아닌 주변인일 뿐인데, 테마도 있고 구조도 갖춘 글을 엮어 내려 끙끙대는 데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고.
학자가 아니라 해도, 어차피 대부분의 글은 책에서 신문에서 얻는거니까 그걸 어떻게 재조합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책 한 권을 읽고 거기서 사회에 대한 글감을 찾았다면 생각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은 최종학력이 아닌 그 책이니까 자신감을 가져!
자기 글에 고민을 하는 건 모든 글쓰는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야. 글이라는게 나의 생각을 받아 적는 건데, '문학적이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들은 현실 공간을 논리를 토대로 분석해서 본인 감정을 섞어가며 글을 쓰는 거라 생각해. 중요한건 의견과 감정을 적어두는 행위 자체지. 칼럼니스트를 흉내내는 글일지라도 텍스트를 읽고 든 생각과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거잖아. 그 과정에서 관점이 튼튼해지는거고. 그자체로 가치있어.
'학문적 글쓰기에서 완벽을 추구하려고 했으나 역량이 안 되어서 수요수준까지는 자신이 없어'가 맞는 인과가 아니잖아. 애당초 그 모자란 역량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려고 글쓰기를 시작한거잖아? 그 와중에 수요가 다른 역량도 개발해보는거지. 그냥 겁먹지말고 '어떻게'에 대한 역량도 추가적으로 같이 키우면 되는거야.
애당초 자기발전은 생각키우기 뿐만 아니라 잘 읽히기 영역도 포함하려고 했던 거 아닐까. 전자만 있었으면 일기장에 생각 정리 하는 걸로도 충분한 걸.그리고 니가 어렵게 쓰는거, 난 그게 제일 날 것 그대로라고 봐. 너보다 똑똑하지만 표현력은 훨씬 떨어지는 저자들도 그렇게 표현한 데는 그게 가장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좋은 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썼을거라 생각하고, 너도 그렇게 쓰는게 제일 가공이 덜 된 상태일테니까.
일부러 있어 보이려고 어렵게 쓰는 거 아닌거 다들 알거니까, 이전에 썼던 글들도 어렵다고 몰아 세우지 않아도 괜찮아. 현학적인 표현, 날 것 그대로 추상적인 생각들에만 최대로 집중한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표현으로 고민할 여유도 생긴거니까.
고맙고, 고마운 말들이 쌓였다. 나는 내 자신에 확신을 좀체 가지지 못하는 인간이라 백번의 자기최면보다 몇마디 응원에서 더 힘을 얻는다. 그런 사람이다. 언제까지 약발이 지속될 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이 문구들을 곱씹으며 나아가려 한다. 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활자를 두드릴 예정이다.
다음 복기때는 조금 덜 후회스럽길 바라면서,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