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어느 농부일가에게 몇마지기 밭이 있었어. 구릉 비탈이고 잡초와 돌이 많아 좋진 않았지. 게다가 애써 일궈 놓으면 얼마 못가 산짐승이 내려와 죄다 헤집어 가곤 해서 아주 힘들었어. 그래도 가족에겐 그 밭이 한 해 한 해 생명줄이었지.
2.
그리고 밭을 경작할 때 힘써 줄 소가 세마리 있는 거야. 세마리 성격이 다 달라.
붉은 놈이는 제일 크고 힘도 세고 성질 거칠기로 마을서 유명해. 먹는 것도 많이 먹는데 풀이나 여물만 먹는 게 아니야. 포악했어. 메뚜기며 여치는 물론이고 작은 들쥐나 개구리 같은 것도 굽으로 짓밟아 으깨서 낼름 낼름 먹다 버리곤 했지.
처음엔 밭 일구는데 방해 되는 것들이라 칭찬도 해주고 그랬는데, 가만 보니까 평소 여물도 엄청 먹어대니 배가 부를 텐데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습관이 된 것 같아. 싸기도 참 아무데나 막 싸서 사방에 오줌내 똥내 투성이로 만들어. 그런데도 힘이 세다는 이유 하나로 가족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지.
퍼랭이는 힘도 그럭저럭 좋고 밭 갈 때도 말을 곧잘 들기도 하는데, 송아지 때 제대로 못 먹여서 그런가 애가 한마디로 뚝심이 없어. 뭐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어릴 땐 생긴 것도 늠름허니 귀여웠고 앞으로 자라면 집안 살림의 보배가 될 풍채였거든.
그런데 자라면서 붉은놈이 한테 제 몫의 여물을 자주 빼앗기고 병치레 할 때마다 되레 밟히기도 해서 심약해진 게 좀 있어. 와중에 뿔 한 쪽과 눈 한쪽도 잃어버렸지. 붉은놈이 상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어딘가 모르게 붉은놈이스러워진 것도 안타까운 점이야.
그리고 자색이.
그 놈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3.
이 놈이 참 불쌍한 놈이야. 일단 색깔부터가 붉지도 퍼렇지도 않은 보라, 그래서 이름이 자색이다. 그러니 남들이 보면 붉은놈이랑 퍼랭이가 짝짜꿍 해서 낳은 줄 알텐데, 그 놈 둘 다 숫놈이거든.
얘는 몇 해 전 겨울에 이 짝 양짓말과 저 짝 동짓말 사이에 흐르는 개천가 주변 덤불 속에서 혼자 울부짖는 걸 주워온 거야. 어미소가 누군지도 모르고 추운데 왜 거기서 혼자 그러고 있었는지 아무도 몰라. 아니 사실 가족 중에 누구라도 알려고 했으면 알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냥 작은 밭이나 일구며 살던 그들에겐 비루먹은 것 같은 놈이라도 송아지 주운 사실이 좋은 거지 더 뭘 알 필요는 없었어.
처음엔 이런 색도 아니었어. 불그레죽죽했지. 게다가 눈이 어찌나 맑고 초롱초롱하던지 여간 이쁨상이 아니었다? 똘똘하긴 또 어떻고. 마당에서 키우던 발바리들 보다 더 머리가 좋았어. 한가질 알려주면 열가지를 해 내고 밭 이랑 사이사이 잡초며 돌 박힌거 알아서 찾아 들어내고 그러는거야.
너무 또릿하게 구니 좀 밉상인 건 있어도 내심 이 놈 크면 그 다음 부턴 밭도 넓게 일구고 수확량도 늘어서 살림 펴지겠다 싶었지.
그 희망이 빛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야.
4.
대체 밤마다 헛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느날 부턴가 자색이 몸 여기저기에 피멍이 들더라구. 애가 신경질적으로 변한 것도 그 즈음 부터야. 그 때라도 누군가 좀 헛간 들여다 보면서 단디 했으면 괜찮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집구석이라 거기까지는 신경 못 쓴거지.
급기야 얼마 못 가서 녀석은 온몸이 늘 보라색인 자색이가 되었어. 성격은, 아 그래 성격은....이 걸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것다. 단적으루다가 '애가 삐뚤어졌어.' 대체 얼마나 이리 맞고 저리 채인건지 온몸이 보라색일 지경이 됐는데 정신이 온전하겠냐.
셋이서 밭 갈다가 갑자기 온몸을 비틀며 홰를 치고, 느닷없이 머리를 마구 흔들어서 코뚜레가 피로 물들거나, 숲이고 밭이고 막 헤짚으며 뛰어다니기도 해. 붉은놈이를 마주보면 얼음물에 빠졌다 나온마냥 떨다가 죽일듯이 덤비고, 퍼렁이 눈 잃은 쪽으로 가서 안보이게 뿔로 막 찌르고 난리도 아닌거야.
결국 밭을 갈 때마다 맨 오른 쪽에 붉은 놈이 맨 왼쪽에 자색이, 그리고 가운데에 퍼랭이를 끼워서 어거지로 힘들게 밭농사 지었다. 그 게 몇해 안되었지.
그러다 어느날 본 거야.
5.
그 날도 주인이 미친소 마냥 뛰어 댕기는 자색이 잡으러 뒤따라 숲에 갔다가 발견한 거지. 붉은놈이가 그 간 여기저기 해 놓은 짓을.
밭에서 싹 나던 어린 무며 배추며 작물 꼬다리들이 반쯤 먹다 남은 채 수풀 속에 여기저기 쌓여있는거다. 그동안 산짐승이 해치고 가나 보다 생각 했던 게 실은 붉은놈이가 분탕질 한거였던 거야.
어떻게 알았냐고? 죽은 개구리며 들쥐 짖이겨진 사체가 사방에 널렸다더라. 산짐승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잡은 놈을 흔적없이 먹어치우거든. 그건 여물도 먹고 해서 배가 부른 붉은놈이가 늘 하던 짓이지. 주인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뒤 돌아봤어. 놓쳤던 자색이가 거기 서 있었다. 입에 거품물고 희번득하게 눈알을 부라리던 자색이 눈을 그제서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던 거야.
6.
성격이 어쨌건 간에 힘이 좋아 부리던 붉은놈이가 낮엔 밭을 일구고 밤이 되면 헛간을 나와 밭을 온통 망치고 다닌 다는 걸 알게 됐어.
아마 짐작컨대 녀석 입장에선 그렇게 해 두지 않으면 불안 했겠지. 퍼랭이와 자색이가 나날이 커 가고 있는데 앞으로 밭 갈기가 쉬워지면 자긴 언제 저녁밥상 국 그릇에 담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니 밤마다 밭을 조금씩 훼손하고 가족들을 그만큼 힘에 부치게 해서 주인이 주는 여물 받아 먹어가며 오래오래 살아남을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자색이가 반쯤 미쳐서 날 뛰는 것도 이해가 되었어. 자색이라면 아마 밤마다 그 짓을 보고 가만 있지 못했을거야. 많이 덤비고 많이 찔렸겠지. 낮에라도 미친짓 해서 주인이 눈치 채면 안되니까 붉은놈이가 밤낮없이 자색이를 공포스럽게 몰고 갔겠지. 신경쇠약에 걸려가는 자색이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 어떻게든 주인에게 알리려고 그리 날뛰었나 보아.
7.
자색이는 마치 병충해에 이리저리 치이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나무 처럼 되었어. 행동도 이상하고 시선도 이상하고 등뼈며 다리뼈며 굽거나 비틀렸지. 그래도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어서 여전히 주인에게 뭔가 말하려는 의지는 읽을 수 있었다. 그걸 보면 아직 이놈을 제대로 키울 여지는 있어보였지. 무엇보다 자색이가 그렇게 된 건 미리 꼼꼼히 챙기지 못한 주인 잘못이었으니 불쌍한 거야.
아무튼 그 날이 결정적이었어. 주인과 자색이가 숲에서 나오는 걸 보고 밤마다 붉은 놈이가 자색이를 마구 찔러댔나봐. 애가 후들후들 거리며 정신을 못차리더라고. 급해졌지.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한데 주인은 자색이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어. 그렇다고 제일 힘 좋은 붉은 놈이를 어찌 해볼 수도 없는 거지. 그간 해 놓은 짓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정도 일 한 거 셈셈치면 될만도 하다, 앞으로 좀 단속 잘하면 되겠지 싶은거야. 무엇보다, 이 밭의 구석구석을 붉은놈이 보다 잘 아는 소는 없거든. 하긴 그동안 밭주변의 온갖 작은 동물들을 먹어치웠는데 구석구석 잘 알겠지.
주인은 여러날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자색이를 일단 고쳐 놓고 세 놈을 잘 관리해야겠거니 하고 결론 내렸어. 그리고 비탈 아래 소 아픈데 잘 보고 고친다는 할매집에 데려간거야.
거기서부터 사단이 난 거지.
8.
소할매는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양반이었어. 밭도 없고 내다 팔 작물도 없는데다 힘이 달려서 나물도 못 캐. 오로지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 거두어주는 먹거리들 받아서 먹고 사는 거거든. 이 마을은 소 부리는 집이 많아서 할매가 때마다 봐주고 그래야 다들 농사가 되거든.
그런데 이 소할매집에 자색이가 온 그날, 군청 계장이며 공판장 대표며 마을 살림 책임지는 사람들 몇이 인근에 들렀다가 소할매집에 가는 자색이 이야기를 다 듣게 된 거라. 그런데 다 들어본 그들은
'어? 가만, 자색이가 할매 손에 다 나아서 건강해지고 힘도 세지면 붉은놈이는 잔치고기 될지도 모르겄네? 그동안 붉은 놈이가 여기저기 잔짐증들 없애줘서 농사가 한결 수월한 감이 있어 구역 내 세금 잡고 살림 처리하는데 도움됐었구만 이거 낭팰세. 어찌하나. 아무래도 자색이를 그냥 두어선 안되겄네에....'
이러고 앉았던 거다.
그래서 자색이 주인 몰래 이장댁에 우르르 간 거지. 아 그런데 하필 이장, 그 양반이야말로 붉은놈이 덕을 톡톡히 보는 게, 해로운 산짐승 내가 다 처리해주마 하고 나서서 민심 얻어 이장 된 거거든. 그러니 붉은놈이 등에업어줄 판국에 자색이가 눈엣가시지.
밤 늦은 시각에 이장 댁 사랑채에 꾸역꾸역 모여 앉은 펜대 좀 굴린다던 사람들 때문에 안엔 훈김이 피어올랐고 여러마디가 오갔어. 오랜 후에 누군가는 그러더라고. 서로 옳네 그르네 떠들고 있는데, 곰곰히 생각 하던 이장이 그 마디 거친 손으로 방 구들을 투앙! 내리치니 일순 조용해졌고, 뒤이어 딱 한마디 낮게 뇌까리더란다.
"이 자ㅅ색히가...!"
9.
소할매 손에 끌려간 자색이는 마을 뒷산 자락 큰나무에 목이 매달렸지. 득달같은 아침이었다.
주인네 가족이 그러마 허락한 것도 아니야. 이장댁 회의 다음날 '얼레? 왜 우리 소새끼를 두고 니들끼리 마음대로 그러세요?' 하며 어리버리하게 눈만 꿈뻑이며 멍하니 있다가 그리 된거야. 소할매 집에 가서 자색이를 데려와야 하냐 마냐 가족끼리 아침밥상머리에서 우물우물 이야기 나누던 그 시각에, 자색이는 조여오는 숨통에 몸을 버둥거리며 울어댔던 거지.
겨울 찬바람에 늘 산휘파람 소리 들리던 곳이라 소울음이 합쳐져 괴상한 소리가 마을 사방으로 울려퍼졌어. 사람들 말로는 죽는데 며칠 안 걸렸다는데 울음 소리는 몇달 아니 몇해 간듯하대. 겨울 삭풍만 불면 밤마다 그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단다.
10.
나는 그 빈농의 둘째 아들이야.
그날 아침 숟가락을 내던지고 아부지와 함께 달려가 소가 목 매달려 피똥 지리고 울어대는 걸 직접 목격했지. 그 건 태어나서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어.
폭죽 터질 때 바로 아래에 있어봤냐? 소리가 아니라 공기압이 가슴을 퍽 친다. 심장까지 밀려드는 느낌이야. 난 그 날 피분수가 터지는 폭죽을 바로 앞에서 본 거야. 소의 울음은 나의 심장을 밀어붙이고 뻘건 핏방울들은 안개 덮인 산자락 위를 비처럼 흩날리는 듯 했지. 나도 그 안개 속에서 우리 자색이와 함께 목 놓아 울고 싶었어.
그 때 막내 동생은 이 걸 아는 지 모르는지 어느새 옆에 다가와 내 바지가랑이를 붙드는 중이었다. 그 순간 막내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어.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어.
나는 그제서야 주변을 보게 되었지.
내 등 뒤로 히죽거리는 군청 계장 일행들과 마을 사람들이 보이고, 그 뒤에서 알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자색이를 쳐다보는 이장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눈을 돌리니 안개 멀리 아스라히 우리집 마당이 보이고 구석 헛간 앞에 목을 내민 채 이쪽을 올려다보는 붉은놈이의 머리가 보였다. 그 뒤에 한쪽 뿔이 없는 실루엣의 퍼랭이도 보이는 듯 했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아부지가 손을 호주머니에 찔렀다가 머리를 만졌다가 하며 이리저리 발만 분주한 뒷 모습이 보였어. 자주 머리를 엉클듯 문지르면서 '아 이거 안되는데...이럼 안되잖우, 우리 손데....왜 남으 소를...아 증말 사람들...' 이러고만 있었다.
나는 이 순간 만큼은 천치 같은 아부지의 등을 바라보다 한손으론 막내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내게 붙인 채 핏발 선 눈으로 자색이의 마지막 허연 숨 까지 쳐다보곤 어금니를 꽉 깨물었어.
입 안에서 쇠맛이 느껴질 때까지.
2014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