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by PolyMental

'즈으으으 즈으으으'

조용한 노란 불 빛 아래에서 휴대폰이 낮은 진동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음악을 틀어 놓고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연성은 몇개의 문자 메세지가 왔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창문을 열려고 몸을 뒤로 틀면서 그녀는 좀 더 명확한 울림을 들은 것이다.



그 사람이었다. 연성은 일일히 메세지를 확인했다. 선녀와 나뭇꾼의 동화이야기를 빽빽하게 빌려오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로 마무리 짓는, 유치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돌아와 달라는 의미의 유아적인 메세지를 하나하나 읽고 나자 연성은 가슴께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재떨이를 팔쪽으로 당기며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잠시 멍하니 앉았다.

'바보 같은 새끼.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연성은 짧은 손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몸을 좀 더 뒤로 눕혔다. 머릿속이 갑자기 엉키기 시작했다. 때로는 순진하게, 때로는 집요하게, 자신을 향해 주체 못하는 감정을 쏟아 부었던 그에 대한 기억의 입구에까지 생각이 미끄러들자, 어깻죽지가 저려오고 뒷 목줄기가 진저리 쳐졌다. 등짝으로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등을 움찔움찔하던 그녀는 잠시 눈을 짜증스레 감았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은 공기로 가득찬 밤을 향해 담배연기를 푸욱 들이밀어 줬다.




그의 집에 처음 들어 갔을 때만 해도, 상황이 그렇게까지 마구잡이로 흐를 줄은 몰랐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보통사람들이 경험하기 힘든 웬만한 일들은 이미 다 겪어온 터였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닥칠 일들을 몰랐다기 보다는, 아직 한창 제 멋대로인 스물 한살 연성으로선 남자와의 반 동거나 다름 없는 생활이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저 잠시만 있으려고 한 것 뿐이었다. 친구가 내어준 방에서 몇달을 지내다가, 방의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느닷없이 오갈 데가 없어진 상태에선 그나마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믿었다. 어딜가나 방세에 대한 부담이 있었기에, 그의 집에 들어간다면 일단 돈은 해결 되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그의 연정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의 그런 감정을 발판으로, 혹은 그렇기에 도리어 믿을 수 있다는 근거에 따라 결정 했던 것이었다. 그 게 화근이었다. 지나치게 자신을 믿었다는 점, 남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용했다는 점, 그랬으니 일이 꼬일대로 꼬여도 어디에 도움 하나 바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모로 보나 유순하기만 할 것 같은 용모의 그였지만, 함께 있는 날이 길어지자 스스로 증폭 시키는 애증에 휩싸일 때마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포악한 일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여자를 제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는 남자의 그 따갑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연성은 지나치게 가벼이 취급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원래 태생이 집요하고 집착을 잘했다. 여럿이 만나는 자리에서 연성이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는 호감가는 태도와 언행은 일종의 스트레스였을 것이었다. 하필 그녀도 그의 수더분한 면모를 믿었던 탓에, 소심하므로서 더욱 섬뜩한 에너지를 숨기게 되는 남자의 까닭 없는 난동에 어떻게 대처할지 방법을 몰랐다.



그는 점점 흉폭 해 져 갔다. 때때로 손찌검도 일삼았다. 사납게 변해가는 그의 심성에 견디다 못한 연성은 점차 벗어나려 애를 쓰게 되었고, 그런 그녀의 행동이 그를 더욱 위험한 구석으로 몰아갔다. 급기야 술 취한 어느 밤에 연성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겪었다. 남자의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정도였던 그녀였으니 강압적인 강요에 의해 벌어진 일 그 자체 보다는, 그 과정에서 생기는 육체적 모멸감과 불가항력에 어쩌지 못하고 포기하는 순간이 더 싫었음은 당연하다. 그 이후로도 매번의 관계는 대개가 그런 식이었다. 그를 안심 시키기 위해서건 어쩔 수 없는 강제적 이유에서건, 멀쩡히 지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연성은, 그녀에게 가해지던 집착과 방해의 수위에 치를 떨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그는 소리지르고 팔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민감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모든 전화통화에 하나하나 반응하며 통화 상대가 누구든지 싸울 태세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떠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막았다. 분위기가 나빠지면 이리 저리 친구들 집으로 종종 옮겨가 자곤 했지만, 옷이며 짐이며 다 내다 버릴 거라는 뻔한 협박에 얼마 못 가 다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집도 절도 없는 연성에게 그나마 사유재산이라 할 만한 것 이라곤 그 몇 안되는 짐 뿐이었다.


여하튼 이런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길도 없었던 데다, 어디에 드러내서 도움을 받고 싶어도 마음만 움츠러 들었다. 자신의 미욱한 점에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겠다 싶어 경찰에 신고 하기도 꺼려졌다. 하루빨리 방을 얻지 않고선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여간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연성에겐 사실 좋아하던 사람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도와줄 길 없이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그 사람에겐 이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도 무모하게 벌인 일이었으므로, 일말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더더욱 그녀를 가둬 놓는 철창이 된 셈이었다.










기회는 상당히 오랜 후에 찾아왔다. 그간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시간 날 때마다 몰래 방을 보러다닌 끝에 새로 옮길 곳을 만들었고, 계약금까지 주인에게 넘긴 그 날,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야심한 밤에 짐을 들고 나와 버렸다. 온갖 아집과 자존심과 욕구로 뭉쳐진 그는 이 뜻밖의 도망에 의외로 얌전히 나왔다. 그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대고 분명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연성에게, 그는 더이상의 집착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녀를 붙들 수 있는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연성은 이제 친구들도 없어졌다. 그녀의 이해 못 할 일련의 과정을 알고 있던 친구들은, 좋아하는 사람을 놔두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단지 돈을 모으기 위해 동거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지되던 친구들조차 마지막에 떨어져 나간 이유는, 그 반쯤 미친 남자의 행태에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연성 말고도 연성의 친구들과도 자주 싸움을 일으켰다. 거기에, 그런 상황의 반복 속에서 독하게 버텨내는 그녀에게 좀 더 심한 환멸 또한 가졌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진정한 자신의 방에 들어왔지만, 이제 그녀는 혼자다. 어떤 점에서, 자신을 위한 방을 갖게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혼자이게 하는 속성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 전에, 좀 더 숨을 고르면서 그녀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메세지는 새벽 두시 반을 전후로 네차례 온 것이었다.
연성은 담배를 든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잠시 눈을 감고 한동안 있었다. 무려 일년 가까운 시간동안 그의 집을 수십차례 들락거리는 생활 속에 그녀는 보기 흉할 정도로 말라버렸고 살갗은 거칠어졌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런 속도로 자연스럽게 늪에 빠져들 수 있었는지, 사방을 다 둘러 볼 수 있었는데도 왜 그토록 감당 못 해 낼 방식으로 휘말려 갔는지, 도무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그녀는 문득 다시 선녀와 나뭇꾼 생각이 났다. 선녀는 불행했을 것이다. 선녀가 옷을 빼앗긴 것도, 아이들을 낳은 것도, 그럼에도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 간 것도,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이지를 않다. 나뭇꾼이 선녀를 쫓아 하늘 나라까지 올라갔을 때에 선녀는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녀는 그것을 머리로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연성은 갑자기 울컥하며 알수 없는 분노로 양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지순한 애정을 품은 착한 나뭇꾼이라는 모습처럼, 보여지는 이면에서 진실을 억누르는 모든 존재들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들은 모두 유치하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살 뿐이다.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도 다를게 없다. 그녀는, 무엇을 두고 사람들이 그 망할 동화에 그토록 온 마음을 빼앗기곤 했던 것인지 갑자기 어리둥절 해 졌다.



이전엔 단 한번도 눈길 준 적 없던 동화속 선녀의 억울한 불행을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것 같았다. 나뭇꾼이 선녀를 만나는 그 순간부터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순간까지 모든 곳에 범죄만이 가득할 뿐이다. 성희롱, 절도, 강제력에 의한 불평등 계약, 유인 납치, 감금, 강간, 스토킹, 사유지 침해, 업무방해 등등 지금 같은 세상에서라면 죽기전에 교도소의 철문을 나서기 힘들 정도로 온갖 범죄를 연달아 저지른 셈이다. 그런 자에게 무슨 칭찬의 말을 해 줄 수가 있는 것인지, 연성은 새삼 세상의 인식이 무서워졌다. 나뭇꾼이 훗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은 어느 것에도 통하지 않을 의미였다. 선녀는 친구도 없고, 자신의 방도 없이, 그저 나뭇꾼의 방에서 불행한 여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연성은 다시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말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곤 짧게 필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녀는 창밖을 다시 올려다 봤다.

"오빠, 나."

"응.."

"자려고 했어?"

"아니..."

"........있잖아, 내가 갑자기 생각 난 게 있는데.... 오빠,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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