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래 '턱'이란 마땅히 그리하여야 할 까닭이나 이치를 뜻 하는 것으로 보통 "턱도 없는 소리 하고 앉았네!" 처럼 터무니 없음을 지적할 때 쓰는 단어다. 또한 흔히들 입에 착 감아서 강조하며 비슷하게 사용하는 '택'이란 단어를 턱의 경상도 사투리나 어림없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택의 어원은 턱이 아니다. 택은 20세기 들어와 생긴 외래신조어로서, 이 낱말의 형성과정엔 우울한 우리현대사가 숨어있다.
2.
일제가 1945년 패망하기 전까지 당시 경성으로 불리던 서울의 신여성들은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유럽식 양장을 접해왔다. 차분하고 고풍스러운 선과 고급양모의 듬직하고 톳톳한 감촉이 살아있는 양장은 당시 뭇 아가씨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고급스러운 원단의 두께 때문에 생겨나는 부자연스러운 활동성이 해결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미 1930년대부터 패션리더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살았다.
3.
그러다가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미군정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나서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양장시장에도 변화가 닥쳐왔다. 미국은 제 2차 세계 대전을 통과하며 폭발적인 공업생산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는데, 그 결과 의류 및 직물 분야에서도 신기술과 신제품이 넘쳐나게 되었다.
원래 전통적으로 신섬유들의 고향은 영국이었지만 전후 산업강국이 된 미국이 영국의 생산량을 앞서버리고 결정적으로 나일론과 함께 양모와 유사한 아크릴을 뒤퐁사가 만들어내므로서 신대륙의 섬유산업이 세계를 지배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3대 합성섬유라 불리는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중 영국은 폴리에스테르 단 한 제품의 종주국으로 간신히 체면을 차리는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미군의 문화가 강하게 유입된 한국에선 얇고 가벼운 소재에 품이 넉넉한 디자인을 가진 미국식 양장이 대유행을 하게 된다. 이는 당시 신여성의 의복을 다시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는 결정적 징표가 되었고, 당연히 미국식 양장이야말로 신선하고 세련된 여성미의 기준으로 통했다.
해방 이전의 신여성과 해방 이후의 신여성은 그렇게 나뉘었다. 영국발 구식 외투와 치마에 비하면 미국 양장은 깃털과도 같았다.
4.
그리고 그 만큼 탈도 많았다. 원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나 가질 순 없었다. 미군 피엑스를 통해 몰래 들여오는 원단과 완성품을 다 합쳐서 시장에 내놔도 제조와 유통의 구조가 후진적이라 전후 잿더미 속에 살아가던 일반 서민이 사기엔 너무 비쌌다.
심지어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실질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성용 양장을 훔쳐 팔면 이문이 꽤 남았던 것이다.
당시 신문 사회면 통계에 의하면 1958년 부터 1967년까지 10년동안 서울 지역에서만 양장점 의류 도난 사건은 무려 총 438회 일어났는데, 특히 60년대 중반이 되면 동대문과 남대문 인근 새벽시장에서 장물양장들을 대놓고 펼친 채 팔다가 적발 되는 사례도 빈번해졌다.
장물아비들이 이 양장들을 시장에서 장물로 팔 땐 당연히 가격과 출처를 알만한 모든 것들을 제거했다. 그래야 혹여 경찰에 적발 되더라도 다른 관계자들, 즉 중간 거래자와 훔쳐낸 조직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프라야말로 가장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5.
당연히 의복 내부에 붙여진 모든 tag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시장에서는 택이 없는 비싼 양장이 새벽마다 진열되어 여성들을 유혹 했다. 그대신 통상적인 정상가보다 최대 60%가 넘게 저렴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급격히 공업국가로 변하던 가난한 나라에서, 역시나 가난했던 아가씨들과 그들의 애인 또는 남편들에게 택없는 양장은 슬픈빛깔의 무지개였다.
어둠 속에서 구입한 만큼 마음 한 구석도 어두울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로선 택 없는 양장은 감춰진 치부이자 유리로 치장한 자존심이었다. 만약 누군가 여성이 입고 있는 양장옷을 가리켜 택이 없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조롱이자 공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필요이상 예민하게 거부반응을 보이곤 했다.
빈한한 마음과 그만큼 남루한 현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빛나는 젊은 날의 우리 딸들이 그렇게 옷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녀야 했다. 택없다는 말은 시대의 젊음이 느끼던 부끄러운 격차를 담은 말이었다.
6.
이후로도 사정은 좀체 나아지지 않아서 1970년대 초반이 되면
"턱도 없는 소리" 못지 않게 "택도 없는 소리"라는 문장이 여기저기 회자되기 시작한다. 라디오에선 70년대 중반 부터 택이 턱과 함께 쓰이기 시작했고 TV에선 칼라 수상기가 보급된 80 년대 이후 상용구로서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88 올림픽을 전후 해 한국의 공업과 제조업 수준이 올라가자 더이상 택의 유무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차츰 택 있는 옷을 득템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히려 옷 뿐 아니라 신발, 플라스틱, 피혁 제품등 전방위에 걸쳐 짝퉁 생산국가로 악명이 드높아질 정도로 기술력이 생겼기 때문에 차라리 택마저도 베끼고 말아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택없는 소리하고 있냐고 조롱 받을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7.
2015년, 우리는 SNS에서 해시태그를 달아 자신이 작성한 콘텐츠를 분류하고 색인이 가능토록 하여 어떠한 차별없이 공유하는 IT시대에 산다. 똑같은 tag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택은 정보를 원활히 유통시켜주는 꼬리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택없는 양장을 입고 속을 들킨 듯이 발그레한 눈빛으로 두리번 거리던 젊은 아가씨들은 어느새 주름이 성글게 잡힌 할머니가 되었다. 택없는 소리를 저어하던 세상을 지나 택없이 돌아가지 않는 세상과 그들은 공존하고 있다.
8.
물론 다 뻥이다.
페이스북 사용할 때 마다 택을 달아야지 달아야지 하면서도 매번 잊게 되니까 좀 정신 차리자고 쓴,
#택도없는소리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