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은 운남성 곤명시의 숙소.
불과 6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완전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지금 기록을 남겨 놓지 않으면 어젯밤 경험하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을 한나절도 안되서 모조리 잃어버릴 것만 같은 강박증이 생긴다.
갑작스러웠던 출장길에서 예기치 않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한 하룻밤 때문에 삶의 의미가 저리고 욱신해서 더욱 그렇다.
적을 얘기가 참 많고 길다.
1.
중국의 입장에선 수입이 꽤 괜찮은 관광지이나, 티벳의 영기를 받았다고 하기엔 뭔가 수수한 중전시에서, ‘티벳탄 마스티프’의 조상견이 중국정부의 지원 하에 집중 육성 되고 있다는 북경발 전언이 갑작스러운 출국의 시발점이었다.
모든 캐릭터가 개로 이루어진 우리 프로젝트의 성격상 이 개와 이를 둘러싼 중국측의 사업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다. 곧 있을 한국 소프트웨어 진흥원의 글로벌 테스트베드 선정 심사에도 영향을 줄 생각이었다.
모든 마스티프의 아버지이자, dogue와 dog의 원래 이름인 Do-Ki의 주인, 풀어 쓰자면 '묶어 놓는 개'라는 티벳어를 그 이름으로 하는 '티벳탄 마스티프'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와 그 보존사업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출장의 목적이었다.
예지력이 있어 달라이라마를 수행하는 '신견'이라고도 했던가. 전세계 개 애호가들로부터 늑대와 1:1로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견종이라는 칭호를 듣는 개의 야성을 볼 기회였다. 오죽하면 낮 동안 묶어 두어 호전성을 높여 놨다가 밤에만 풀어 온갖 맹수로부터 가축을 보호하게 했을까.
어제, 샹그리라로 알려진 중전시에 도착한 우리는 목적지인 매리설산을 향해 갔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던 송찬림사엔 가볼 엄두도 못내고 멀리 칼날처럼 하늘을 베듯 서 있는 설산을 향해 차를 타고 가기를 두시간. 해가 왼쪽을 향해 꽤 많이 기울어져 그 붉고 노란 풍광이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지경이라 입을 다물지 못할 무렵, 차가 갑작스레 고장으로 서고 말았다. 본넷을 열고 한참을 이리저리 손대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당장 북경어가 통하지 않는 촌이라 일행은 모두 당황했다.
그러나 목적지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며, 현지 가이드는 일단 멀리 운무가 오르는 마을로 우리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다른 차를 빌려타고 가려는 게 계획이라고 했다.
그 마을은 지나쳐 오며 보았던 다른 관광지와 달리 화려한 전통의상으로 억지차림을 한 이들도 없이 그저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그곳이 운령(蕓嶺)지역의 한 자락에 묻어나듯 숨어있는 마을이라는 사실은 사건이 있은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대략 20호쯤 될까 말까 한, 돌과 나무로 단단하게 조이듯이 만든 전통 가옥들이 있었고 마을입구로부터 한 가운데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맑은 개울이 흘렀다. 마치 하늘을 그대로 결빙시켜 물길 바닥에 깔아 놓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이드는 마을의 몇몇 젊은 남자들을 잘 아는 듯 했다. 외지의 사람들이 신기하고 두려웠는지 아이들이 어디에선가 우르르 몰려와 어른들 뒤에서 고개만 내민 채 우리를 쳐다봤다. 가져 온 s602로 그 아이들을 찍고 싶었으나 어쩐지 무례하게 보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잠시 후 계획이 변경 되었다.
한시간 이내에 밤이 될텐데 지금 떠나게 되면 길이 험해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계절이라 만에 하나 산 속에 갇히면 추위에 큰 곤욕을 치룰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간혹 몇 년에 한번씩 타지 사람들이 산 속에서 길을 잃고 동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잠깐의 의논 끝에 우리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깊은 산 중의 밤은 일찍 오기 마련이다. 자신을 '궈위허난’ (발음 그대로 적었다.)이라고 소개한 마을의 젊은 지도자쯤 되는 사람의 집에 묵기로 한 우리를 위해, 동네 사람들이 저녁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대부분 채소나 근류를 찌고 삶고 구운 것들이라 신선한 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 꽤 맞았다. 무엇보다도 정체가 모호한 술 비슷한 발효액이 압권이었다. 우유나 야쿠르트 같은 것들을 풀과 함께 삶아서 발효 시킨 듯한, 막걸리 보다 더 됨직한 그 액체를 가이드는 이해하기 편하게 그냥 술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걸 마시고 목구멍이 아닌 두뇌가 타들어가는 듯한 마성을 느낀 것을 두고 술기운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삶은 고기와 함께 대접 가득히 담긴 그것을 연거푸 내게 들어 올리며 “얼지누마, 얼지누마” 하고 말했다. 아마도 그 술을 ‘얼지누마’라고 부른다는 의미였을텐데 그들의 권유대로 수 순배를 돌리고 나서 그야말로 인사불성이 되어버렸다.
한창 모닥불 옆에 앉아서 불꽃이 오르고 사그라드는 과정을 쳐다보며 마을 전체에 내려 앉은 안개의 묘한 기운에 몸이 늘어진다고 느꼈을 때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캄캄한 밤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카메라 가방을 멘 채 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때 완전히 필름이 끊긴 상태였다.
2.
오들오들 떨리는 어깨를 쥐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의 첫번째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 내 귀에는 낮은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슥삭 대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하게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희뿌연 색이었다. 눈에 뭐라도 들어간 것 처럼 눈앞이 온통 뿌옇기만 하고 아무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실은 안개 때문이란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무심하리만치 짧은 시간이 흘렀다. 나 혼자서 깊은 산속의 안개 속에 갇혔다는 것을, 이젠 꼼짝없이 얼어죽게 생겼다는 것도 거의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사태 자체가 가늠이 안 될 만큼 크다보니 별로 낙담하거나 공포심을 느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라고 느낀 것은 그 다음의 상황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사지를 간신히 펴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바로 몇미터 앞의 나무도 형체가 흐릿할 정도의 안개 때문에,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참을 숨을 고르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제자리에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까 고민하다 결국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위기상황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간결한 사고구조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모든 것이 0 아니면 1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 위험한가와 무엇이 위험하지 않은가만을 선택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맞춰서 행동할 뿐인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이 생존의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일단 오른 손을 들어서 나의 정면으로부터 90도 오른편에 있는 나무를 잡았다. 그리고 그 나무를 기점으로 두팔을 펴고 직진하기로 했다. 만약 한쪽 손만을 이용해서 나아가면 계속해서 같은 지역을 빙글 빙글 돌게 되어있으므로, 50발자국 앞에 갔다가 아무런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그대로 180도 돌아서 돌아오면 된다. 양 손끝에 닿는 나무들의 볼륨과 대강의 개수 정도만을 기억한다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앞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기분 나쁜 인기척이었는데 안개속에서도 확 끼쳐오는 냄새부터가 평이롭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굵직한 몸뚱아리의 그림자가 안개속에서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것이 호랑이쯤 되는 것이 아닐까 했다. 어릴 적에 읽었던 어느 소설의 삽화가 생각났다. 주책맞은 러시아 사냥꾼은 다리가 얼어붙어 도망도 치지 못하고 그자리에서 대소변을 보고 주저 앉아버렸고, 죽음은 순간의 틈도 없이 찾아왔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 그림만 계속 떠올랐다. 정말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죽음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떨치고 움직여야 한다는 두개의 신호가 동시에 머릿 속을 궤도열차처럼 획획 지나갔지만, 난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중에 살펴보다 안 거지만 카메라 가방 끈을 어찌나 세게 움켜 쥐었던지 손톱에 강하게 눌린 자국이 12시간이 넘게 지나도록 좀체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긴 1초 몇 개가 하늘로부터 큰 소리를 내며 땅위에 곤두박질 때리고 부숴졌다.
아직까지 그 소리를 기억한다.
쾅! 쾅! 쾅! 쾅!
3.
창문 밖에서 한국 관광객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제 뜻을 고스란히 알아 들을 수 있는 소리가 귓전을 넘나드니 머릿 속이 방해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일단 외국에서 만나는 모국어는 반갑기 보다는 성가신 간섭의 느낌이다. 심지어 중전(中甸)의 장족(壯族)들이 나누는 장어(壯語)의 복판에서도 알아듣는 언어가 있으면 그저 깨지는 것은 고즈넉한 심상뿐만은 아니었다. '내가 떠나 온 곳으로부터 진정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는 생각이 들자 메마른 초조함이 가슴을 덮게 된다.
그것은 커다란 늑대였다. 아니 첫 느낌에 늑대나 혹은 늑대개 같은 그런 것이었다. 아니다, 어쩌면 영화 ‘늑대의 후예’에서 나온 그 갑주를 뒤집어 쓴 사자 같았다. 그 괴물이 어슬렁 거리면서 내 앞 다섯발자국 정도까지 와서야 나는, 그것이 미리 서울에서 자료로 보았던 그 티벳탄 마스티프일거라고 확신하게 됐다. 지금 생각 해보면 뚜렷한 증거도 없이 대번에 그 놈일거라고 믿어버린 것이지만, 당시엔 불행하게도 육감이 오히려 더 정직했다.
그 사납다던 공포의 개가 바로 눈 앞에, 몇시인지도 모를 심야의 숲속에서 나와 맞닥뜨린 것이다. 숲속엔 단 둘 뿐이었고, 그렇게 흔한 표현이던 ‘숲의 적막’을 몸서리치게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다른 풀 벌레며 동물들이 실제로는 제 내고 싶은 소리 다 내었더라도, 나는 들을 수가 없었을 거라고 기억한다. 완벽하게 귀가 떨어져 나간 상태, 자신의 심장소리와 숨소리만 들리는 상태를 경험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눈사이의 비강이 급속하게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눈도 저리듯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 상황이 전혀 예측이 되질 않았다. 머릿속은 다시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나는 거의 기절할 듯이 몰아쉬던 숨을 멈췄다. 머리가 거의 내 배에 닿을 정도로 큰 그 놈이 고개를 숙여 내 손을 핥은 것이었다. 목구멍에서 저절로 '힉' 소리가 났다. 이제 앞으로는 아찔하다라는 표현은 웬만해선 못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완벽하게 아찔한 경험을 했다. 달빛 외엔 아무 광원도 없기 때문에 진한 검정으로 보이는 놈은 제 커다란 머리로 내 허벅지를 툭 하고 쳤다. 그 순간부터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아무튼 난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풀썩 쓰러져 버렸다. 내가 쓰러지자 놈은 거의 반사적으로 내 품에 달려들었는데, 그때 난 꼼짝없이 목을 물리는 줄 알았다.
머리 꼭지까지 냉랭한 기가 꽉 들어차는 느낌을 받고 순식간에 몸에 힘이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정신을 차려보니, 녀석은 내 얼굴을 핥고 있는게 아닌가!
나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았다.
실컷 울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일거에 목울대로부터 뭔가가 퍽 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조금 눈물이 났던 것도 같다. 누군가를 강하게 원망하거나 누군가를 강하게 비난하고 싶어졌다. 어떤 분명한 대상이 있어줘서 나의 허무맹랑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받아주었으면 했다.
아마 그 상태로 일이분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보았다면 반 실성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녀석은 계속해서 제 머리로 나를 툭툭 치고 몸으로 부대끼고 했다. 그 친밀한 동작에 갑자기 집에 두고 온 마르스가 생각났다. 물과 밥은 충분히 주고 떠났는데, 내가 지금 이 조난 상태를 제대로 벗어나면 녀석을 이전 보다 더 아껴 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뒤이어, 녀석이 올라가지 말아야 할텐데 씽크대 하수구는 잘 막아 놨는지, 밤엔 추울텐데 채광창 쪽 유리문은 꼭 닫았는지, 혹시 화장실 문은 열어 놓고 온 것인지, 정말로 보일러를 외출모드로 해 놓고 온 것인지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차츰 차츰 나는 중국 운남성 중전시 외곽의 어느 안개 숲에 이름없이 버려져 있는 미물이 아니라, 내 생의 뿌리를 강하게 안고 있는 뚜렷하고도 분명하며 강렬한 존재가 되어갔다. 손가락, 발가락, 팔, 다리, 목, 몸통, 머리, 하나하나가 내가 되어갔다.
그렇게 고양이 마르스로부터 내가 한국에 두고 온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온전한 나임을 자각 할 것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이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물고 순식간에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자리에서, 나는 정말 그보다 더 서럽기 힘들 정도로 엉엉 울었다.
무엇이 나를 울리고 있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내 몸 속의 모든 공간을 담아서 오열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구원을 받고 싶었다. 예닐곱살의 아이와 같이 어머니의 따듯한 품에서처럼, 아버지의 부드럽고 두툼한 손에서처럼 구원을 받고 싶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기를, 구해주기를 울음으로 대신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잡풀들을 손으로 쥐뜯어가며 안개 속에서, 저 높은 곳에 분명 달이 있을 것만 같은 뿌옇고 흐릿한 어두운 은빛의 밤 하늘 아래 숲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는 거의 한시간 가까이를 울었던가 보다.
조금씩 숲의 다른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자 마음이 가라 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는 그냥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있었다. 얼굴의 신열이 내리며 격앙된 감정이 풀리자, 나는 개를 향해 비실 비실 웃기 시작했다. 그 순간 혹 이것이 정신적인 충격에서 오는 행위가 아닌가 싶어 갑자기 뚝하고 웃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또 '오로지 함께 할 생명은 너 밖에 없으니'라는 의미를 띈 채 웃고 그랬다.
갑자기 개가 나를 더욱 툭툭 치고 제 꼬리를 보이며 뒤를 돌아보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 그 즈음이었다. 어릴 적 부터 숱하게 보아오던 외화 속에서 개들이 길 안내를 하던 그 자세였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 자세라 하더라도 나는 녀석의 몸짓을 알아들었을 것 같았다. 조금 전의 울음으로 체내에 남아있던 모든 독소들을 다 증발 시키기라도 한 것 처럼, 나는 갑작스럽게 좀 더 완벽한 감각을 가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하루 전의 나보다 더욱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세상의 아주 작은 움직임도 다 알아차리는 듯 했고, 내가 누군지, 지금의 나는 무엇인지, 내가 서 있는 우주는 정말로 어디인지,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일목요연하게 내 안에 또렷해졌다.
갑자기 내가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붕 떴다.
막막하던 마음도, 허무한 낙관도, 줄기찬 어둠의 공포도 모두 이 세상에 없었다. 세계는 오직 나와 나를 둘러 싼 것들이 함께 있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나는 분명한 자아였고, 그런 내가 갑자기 이 안에서 죽을리가 없다는 결정을 했다. 내가 무엇에 의해 죽는게 아니라 내가 나를 안 해쳐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구원하기로 결정 했다.
그 순간 이미 구원 되었음을 알았다.
4.
주섬 주섬 어깨에 멘 카메라를 고쳐 쥐고 내가 따라 가려는 몸태를 보이자 개는 앞장 서서 걸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개는 안개 속에서 나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나도 물론 그러했다.
이 숲속의 지리를 매우 정확히 아는 듯 했다. 그것은 그의 달리는 행동으로도 정확히 느낄 수 있었고, 무엇 보다도 뒤따라 가면서 나는 강한 유대감과 일치감을 그로부터 받고 있었다. 몇시간인지 몇십분인지 모를 시간만큼 따라갔다.
갑자기 넓고 탁 트인 풀밭이 나오면서 안개도 동시에 퍽 하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치 비가 오는 경계면을 경험 하듯이.
생각보다 밤 하늘은 파란 색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의 뒤에는 다음날 운령이라고 알게된 산맥의 한 지류의 옷이라도 된다는 듯이 안개가 한무더기 덮힌 숲이 있었다. 머릿결이 흐르듯 안개는 차가운 밤바람에 조금씩 일렁였다.
다시 앞을 보았을 때, 거짓말 처럼 나의 눈앞에 작은 불빛이 보였다. 사람이 낸 불빛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왔지만 나는 크게 두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껑충 껑충 뛰었다. 그리고 숲속에서 나를 빼내준 개를 보며 하!하! 크게 웃었다. 정신없이 개와 함께 불빛을 향해 달렸다.
어젯밤에 술을 마신 그 마을의 한 집일까? 외딴 숲 가장자리에 사는 촌로의 집일까? 달리는 겨를에도 기쁜 상상을 해댔다. 가까워 보였던 그 곳은 생각보다 멀어서 중간에 서너번을 제자리에 서서 가쁘게 숨을 쉬어야 했다.
예상과 달리 그것은 집이 아니라 잡목과 말린 풀들로 엮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는지 안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내밀었다. 밤이었지만 달빛에도 대번에 안광이 빛나는 사람이었다. 입가에 굵은 수염발이 그의 오두막 이엉처럼 솟아나 조금은 무서운 느낌이 드는 순간, 개가 그 사람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 사람이 키우는 개가 분명했다. 그사람은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이 삼림 속에서 갑자기 문명의 옷을 입은 콧수염 기른 빡빡머리의 사내가 한밤중에 제 집 앞에 나타났으니 안 그럴리도 만무했다.
잠깐의 어색한 시간 뒤에, 나는 뭔가 말하려다 갑자기 그와 내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내가 어느 마을에 있다 왔는지 설명할 길도 없었다.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의 그 난처한 표정 하나에 그가 갑자기 숲 저편을 가리킨 다음 나를 한번 가리키고, 다시 왼손 바닥을 펴서 그 위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 걸어가는 시늉을 했다. 나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커져서 잔뜩 웃으며 고개를 마구 끄덕여 댔다. 그의 몸짓이 끝나자 나는 잔을 쥐고 술을 마시는 모습을 재현한 뒤, 두손을 포개 잠든것을 보여줬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호탕하게 고개를 뒤로 젖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다라는 느낌에 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그를 따라 웃었다.
그는 손짓으로 나를 자신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한쪽엔 작은 단상이 있었다. 몇개의 향로 비슷한 것들이 있었는데 여러권의 낡은 책들이 그 향로들을 괴고 있었다. 집 주인은 그냥 숲속의 사냥꾼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내 팔을 잡아 바닥에 앉히고 음식을 내었다. 그제서야 내가 매우 춥고 배고프단 것을 깨달았다. 엉덩이를 들썩 거려 불곁으로 좀 더 다가서면서 나는 작은 소쿠리에 담긴 몇개의 고구마 비슷한 것과 말린 고기들을 먹었다. 어디서 났는지 그가 우유 같은 것을 주었다. 다시 어젯밤의 '얼지누마'가 생각났다. 그러나 그가 준 것은 정말로 우유였다. 아마 근처 어디엔가 양이나 염소를 키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 옆집 아저씨가 목장을 했던 터라 가공 처리되기 전의 소젖을 많이 맛 보았던 나로선 그가 내민 자연 그대로의 생우유도 전혀 거리낌 없이 잘 소화 해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어디선가 뿔테 안경을 들고와 눈에 끼고 나를 인자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먹는 내내 간혹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서로 살짝 웃었다. 그가 준 음식을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버리자, 그는 흡족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알수 없는 몇마디를 중얼 거렸다. 내가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짓자, 그가 내손을 잡아 나의 가슴에 대더니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손끝을 나를 향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몸짓 언어는, 내가 숲을 빠져나오기 전 겪었던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다시 울컥하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나는 두눈에 힘이 들어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나의 손을 잡은 채로 무언가 불경을 외듯하는 투로 빠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뭔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공부하는 승려인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가 나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대고 나의 눈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숲에서 느낀 것을 자기도 잘 알고 있다는 신호 같았다. 언어가 같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곧이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게 몇조각의 담요와 모피들을 툭툭 펴서 잠자리를 만들어줬다. 아직도 이해 안가는 부분이라면, 바로 이순간이다. 나는 아무 의심도 아무 걱정도 없이 그의 손길이 나의 잠자리에서 떠나기 무섭게 쓰러져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5.
다음날 그는 내가 간밤에 그토록 미친듯이 헤매었던 숲속과는 다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나를 안내해서 마을로 데려갔다. 마을과 그가 사는 분지와는 도보로 한시간 정도 밖에 안걸릴 정도로 가까운 직선거리였고, 그 중간에 뱃머리처럼 튀어나온 숲이 왼편에 있었다. 오히려 그 숲을 통과하는 것이 더 멀리 돌아가는 바보 길이었던 것이다. 밤새 나를 지켜줬던 티벳탄 마스티프도 경쾌한 발걸음으로 함께 초원을 가로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함께 간 실장님도 밤 사이 술에 취한 채 잠들었고 현지인 가이드는 친구들과 일찍 취해서 집에 갔기 때문에, 정작 내가 사라졌다고 여긴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저 사진 찍다가 어디선가 잠들었겠거니 했던 것이다. 오히려 내 말에 다들 뒤늦은 걱정의 표정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를 데려가 준 분지의 운둔자는 마을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사람이었다. 현지가이드의 입을 통해 언뜻 보기에 마흔정도 인줄 알았던 그의 나이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들을 관장하는 일종의 승려 같은 사람이었다. 설마 티벳의 라마승 같은 그런 존재냐는 질문을 전해 들은 운둔자는 크게 껄걸껄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쳐 줬다.
그리고는 어젯 밤에 했던 것 처럼 나의 손을 잡아 내 가슴에 얹고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가 자는 동안 적었는지 뭔가를 빼곡하게 적은 두꺼운 종이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는 가이드더러 그걸 번역하게 한 다음, 그를 통해 말하기를 종이를 지니고 있다가 쿤밍을 떠나기 전에 펼쳐서 읽어보라고 했다. 읽고 나면 아마 다음 행선지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우리 일행은 어리둥절 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마치 모든걸 다 이해한다는 식의 웃음이었다.
정오에, 가이드의 친구집으로부터 트럭 한대를 빌려타고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차 뒷꽁무니를 장난치듯 따라오던 개가 떠오른다. 멀리서 그 운둔자가 높이 흔들던 팔도 생각난다.
6.
지금, 쿤밍시의 숙소다.
그가 준 원본 종이와, 가이드가 번역한 종이 두장이 옆에 있다. 아직 나도 읽지 않았다. 이 곳에 적으면서 읽을 참이다. 무엇이 나의 행선지를 바꾸어 놓는단 말인지 알길이 없지만, 아마도 밤새 울었던 그 격한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다.
틀린 단어를 조금씩 고쳐서,
이제 적는다.
"숲에서의 하룻밤이 어땠습니까. 모든 것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당신은 당신 안의 떨어져 나갈 것들을 두려워 합니다. 이곳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집, 당신의 옷, 당신의 신발, 당신의 마음, 당신 자신. 모두 당신이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밝혀지는 것을, 남들 앞에서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나 밝혀지는 것을 당신은 두려워 합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주저하지 마세요. 당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거짓을 지우세요. 당신은 거짓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 자신보다도 잘 압니다. 왜냐면 나는 당신이 지나온 그 숲을 하루에도 몇번씩 드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하룻밤을 압니다. 그래서 당신의 병도 잘 압니다.
당신의 병은 당신 스스로 고칠 수가 있습니다. 숲에서도 그랬듯이 당신으로부터 내던지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지십시오.
어제 당신을 취하게 만든 술을 앞으로도 기억하세요. 그리고 다시 이젠 그 술을 마시면 내뱉으세요. 거꾸로말입니다.
얼지누마 얼지누마 얼지누마
역시 또 거꾸로 내뱉으세요
마누지얼 마누지얼 마누지얼
그렇습니다. 당신의 병은, 당신 스스로 잘 알고 있듯이 역시 그것입니다.
마누지얼을 준비하는 강박관념입니다.
당신들 말로는
'만우절 강박관념'이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고국의 친구들에게 사실을 말하십시오.
당신이 삼일전부터 오늘 만우절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으로 떠났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말입니다.
친구들의 보복이, 당신의 자존심이 두려우면 당신은 쿤밍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의 나라로 돌아 갈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이 쿤밍 공항에서 이 글을 앞에 두고 고민 할 것이란 점을.
상그릴라로 간다고 거짓말 한 것과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의 쾌락과, 쏟아질 비난에 대한 고통의 순간 앞에서 앞으로 어느 목적지로 갈지 고민하게 될 것이란 점을 말입니다.
이젠, 숲에서도 그랬듯이
당신 자신이 되십시오.
덧붙여, 당신이 용의주도하게 꾸미기 위해 출국한 것처럼 차단 시켜 놓은 당신 친구들의 엠에스엔 리스트도 다시 풀어 놓으세요."
그의 글은 여기서 끝이었다.
나는 그의 예언대로 앞으로의 향방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나는 나의 상그릴라에 다녀왔다. 이제 다시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상그릴라에 다녀왔다.
물론 세상엔 없는 상그릴라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긴 삼일간의 상그릴라 여행을 겪었다.
이제 어디로 갈지는 내일까지의 숲의 길이 정해 줄 것 같다.
다시 한달의 숲이 일년의 숲이, 그리고 평생의 어느 길이.
만우절 시리즈 - 2005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