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월호, 서해 바다의 기억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지난 여름캠프 이야기를 쓴다. 2013년. 올해도 지난 7월 23일~25일 제주도로 여름캠프를 다녀왔다. 아이들은 5월이 되자 이번 여름방학엔 캠프를 어디로 갈 건지 궁금해 했다. 자치회의에서 캠프를 주제로 논의를 했다. 예상대로 제주도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작년에 다녀왔던 제주도 캠프는 과정도 흥미로웠고 다녀와서도 이야기 거리가 풍성했다. 캠프에 참여한 학생들도 모두 좋아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 캠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불안하고 찜찜했다. 계산해 보니 캠프 예산이 천만원 정도 필요했다. 운영비, 급식비로는 많이 부족했다. 일찌감치 CJ나눔재단에 여름캠프 제안서를 올리고 나누미, 후원인 분들에게 캠프비 후원을 요청했다.


사진 022.jpg 7월 23일 인천 서해대교


게다가 캠프 비용 마련에 예상치 못했던 문제도 하나 터졌다. 전전긍긍했다. 문제도 읍소, 부탁, 애원, 할수 있는 방법은 동원하여 캠프비 천만원을 마련했다. 이번 제주 캠프 세부 일정도 길***의 도움을 받았다. 출발 당일은 무척 덥고 습했다. 제주행 여객선은 청해진 해운의 '오하마나호' 였는데 이번엔 다른 여객선이었다. 여객선 이름이 '세월호'다. 배 이름이 뭔지 모르게 선득했다. 선체 크기는 작년에 탓던 오하마나호와 비슷했다. 내부 구조도 비슷했다. 지나가던 승무원에게 작년과 여객선이 다르다고 물었더니 일본에서 중고로 구입한 후 올 초부터 <인천-제주> 운항을 시작했단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인솔교사가 셋 뿐이다. 이박삼일간 스물 다섯명을 안전하게 인솔해야 하는 양 어깨가 철근을 짊어진 것처럼 무겁다. 출발 전 H와 M에게 이번 제주도 캠프 영상 촬영을 맡겼다. H는 언제나 듬직했고 M은 민첩하고 감각이 좋았다. 이번에도 멋진 영상을 기대해도 될것 같았다. 티켓팅을 하고 개찰구를 지나 선착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설렌다.


여객선 맨 위 갑판 중앙에선 대안학교 학생들이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승객들 앞에서 댄스 공연을 펼치고 있다. 댄스 동아리 멤버인 S와 K가 부러운듯 그네들을 쳐다본다. 바람이 불때마다 전방에 있던 탑에서 매캐한 연기가 우리쪽으로 불어왔다. 눈이 맵고 기침이 났다. 갈매기 수십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채 물살을 가르는 배를 쫓는다. 승객들이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거나 사진을 찍고 있다. Y도 휴대폰 카메라로 갈매기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133.jpg 서해 바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공연을 더 보겠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객실로 돌아 왔다. 작년에 탔던 오하마나호는 남자 여자 객실이 따로 였는데 세월호는 남녀 구별 없이 넓은 객실 하나가 배정됐다. 선생님들이 커다란 상자에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김밥과 도시락을 꺼내고 있다. 모둠별로 앉아서 도시락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모둠 활동을 진행했다. 이번 캠프에 자원봉사로 참여한 아수라수란 샘이 아이들과 함께 모둠활동을 진행했다.


열시다. 밤이 늦었지만 아이들은 잠을 자지 않고 매점이나 노래방등 여객선 선내를 돌아다녔다. 일부는 객실에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있다. 밤 열한시 경 일학년 J가 울먹이며 나를 찾아왔다. 지갑을 잃어 버렸단다. 욕실 세면대에 놓고 온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세면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갑엔 만원짜리 다섯장이 들어 있다고 했다. 안내 데스크에 안내 방송을 부탁했다. 시간이 늦어 아침에 방송을 해주겠다고 했다. Y와 K가 울먹이는 J를 다독였다.


아침에 J의 지갑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묵던 객실안이었다. 지갑은 비어 있었다. 그럼 오만원은? 그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우리 아이들중 누군가가 J의 지갑을 가져 간게 분명했다. 머리속에서 몇몇 이름이 스쳐지났다. 아닐거야.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지갑이 객실 밖에서 나왔다면 좋았을 텐데. 지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캠프 내내 찜찜 할 게 분명했다. 선생님들과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여객선은 예정된 시간을 조금 넘겨 제주항에 도착했다. 아홉시가 조금 넘어 하선을 했다. 항구에선 작년에 우리를 인솔했던 가이드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 버스를 타고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지갑 분실 사건이 찜찜했다. 여전히. 산방산으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숙소로 향했다. 나는 다시 한번 형사가 되어야 했다. 선생님들과 미리 상의를 했다. 다행이 J의 지갑에 손을 댄 아이는 확인했다. 예상했던 아이중 한명이었다. 객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웠다고 했다.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믿고 싶었다. 아이들에겐 비밀로 했지만 대충 아는 눈치였다.


다시 홀가분해진 맘으로 산방산을 올랐다. 언덕 정상에 오르니 바람이 무척 세계 불었다. 한림공원, 용머리해안, 쇠소깍, 성읍민속마을, 송악산, 만장굴. 제주도는 언제 어느 곳을 봐도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 이번에도 제주 해안선을 따라 자전거 트래킹을 했다. 곽지 해수 욕장까지는 약 두시간 정도 걸리는데 가는 내내 사고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박삼일간의 제주 캠프는 무사히 마쳤다.




4월 16일 아침 뉴스 속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 중이었다. 그런데 배의 이름이 낯익었다. 세월호. 여덟달 전에 우리가 탔던 바로 그 세월호였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가슴이 두방망이 쳤다. 하지만 전원구조, 라는 자막이 떴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야탑, 세월호 사고 희생자 합동 분향소


열두시경 사무실 출근 후 인터넷을 보는데 단원고 아이들 포함 수백명 실종이라는 속보가 떴다. 전원구조는 오보였다. 잠시 후 센터에 온 아이들도 모두 놀란....아이들과, 부모님...모두 놀랍고 당황스럽고 ...말문이 막혔다. 그날 저녁, 다음 날도 제발 한 명이라도 더 구조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며칠 후 휴가를 내고 단원시에 마련된 분향소로 향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텔레비전을 보기 힘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힘들다고 내 뱉었던 투정은 상상 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한낱 우스개 짓이 되어 버렸다. 지난 여름, 아이들과 떠났던 제주도 캠프. 김밥을 먹었던 세월호희 2등 객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던 매점,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주던 갑판, 선상위의 화려한 불꽃놀이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선상위에서 펼쳐지던 화려한 불꽃놀이의 이면에 아무도 모르는 몰라야 하는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구나. 아이들과 하루 이상의 집단 여행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달 전 부터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육중한 무게감에 짓눌려 캠프 일주일 전에는 한 두 번은 뜬눈으로 지새우거나 악몽에 시달린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푸른학교 앞에서 안녕! 인사를 나눌 때까지 긴장은 놓지 못한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라는 말보다도 몸이 몸살로 신호를 보낸다. 눈물이 난다. 참으려 해도.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았다는 죄책감으로 그 엄청난 무게를 견디고 살아야 한다.


야탑, 세월호 사고 희생자 합동 분향소


5월 16일. 아이들과 함께 야탑에 마련된 세월호 분향소에 왔다. 모두에게 비극이고 고통이다. 해당 학교의 교감 선생님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무게감 얼마나 버거웠을까.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tv를 보기 힘들다. 그래도 두 눈 똑바로 뜨고 이 비극을 직시해야한다. 힘들다고 외면 할 일이 아니다. 철저히 고통스럽고 힘든 상태로 겪어내어 온 몸에 그 고통을 각인시켜서. 다시는,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keyword
이전 08화중학생들이 만든 '독립영화' 한편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