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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요 며칠 날씨가 화사하지? 무지막지한 여름을 맞이하려는 게으른 봄볕의 뒤늦은 발악처럼 '오늘의 날씨'와 햇살은 참 화사해. 조만간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에어컨을 설치해야겠어. 하지만 오늘처럼 화사한 날에도 내 더딘 감정은 와르르 무너져버려. 맞아, 때로 감정이란 것은 너무 더디거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육체적 고통과는 다른. 감정의 무너짐에 날씨는 죄가 없어. 감정 선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때가 더 많지.


사진출처-pixabay


일주일 혹은 열흘 전에 있었던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감정은 반응했을 테니까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에. 하여 누군가를 쓸데없이 원망하거나 슬픈 기억으로 함몰시킬 필요는 없어 그건 생각보다 너무 힘이 들거든. 한 번씩, 길에서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만나다'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사실 그때 우리는 만난 것이 아니야. 생면부지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서로를 외면하고 지나칠 테니까.


횡단보도, 지하상가, 골목, 우연한 만남의 마지막 장소는 대개 집 근처의 술집이지. 영어를 가르치던 남학생, 휠체어를 타던 뇌성마비의 청년,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옛 직장동료까지. 잠깐, 그와는 잠깐의 목례를 건넸어. 우리는 서로를 공식적으로나마 알아야 했던 지난날 최소한 원수가 되지는 않았으니까.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비긴 거지.


우연한 만남의 압권은 별로 아름답게 헤어지지 못한 옛 연인과의 어색한 만남일 거야. 그녀의 옆에는 다른 사내가 서있어. 그는 대개 검정 구두와 곤 색 정장 흰 와이셔츠와 검은 선글라스를 썼어.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바짝 날이 선 그의 왕관 표 와이셔츠는 그녀의 선물이 확실해. 어색한 웃음으로 안녕을 물었어. 다른 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오늘도 길에서 과거의 인연을 만났어. 횡단보도에 한 여자가 서있었지. 어디서 보았지? 아, 그때 그 사람이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친했었나. 사소한 오해. 그녀와의 불편했던 장면이 떠올라. 횡단보도를 두고 마주 선 우리는 서로를 엇갈린 채 단지 정면을 응시했어. 당신은 그때 왜 그랬을까? 왜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 그런 말들을 했을까? 시간을 거스른 물음은 이토록 화사한 오후에 적색이 빛을 발하는 신호등 건너편의 당신에게도 해당되지. 이때 햄릿의 '독백'은 불필요해. 그의 우유부단함이 결코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지는 않기에.


신호가 바뀌면 나는 가고 당신은 오고 서로를 알지만 아는 체를 하지 않아 '오늘의 날씨' 속에서 더 이상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기에. 그냥, 파란 신호에 길을 건너는 자들의 무의식처럼.


"너도 잘 살고 있구나!"


십중팔구는 당신도 나와 같을 거야. 비가 오거나 흐리거나 바람이 불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한 번쯤 말을 걸었을지도 모르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오늘의 날씨가 화사하기 때문이야. 다시 말하지만 날씨는 죄가 없어. 단지 쓸데없는 자들의 침묵 속에서, 이렇게 화사한 오늘의 날씨 속에서 나의 더딘 감정만 와르르 무너지거든. 그래서 견딜 수 없이 아프냐고? 하염없이 쓸쓸하냐고? 부탁인데. 그런 식으로 묻지는 마. 사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잖아. 너도 그렇고.


2014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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