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전화 번호를 지웠다

by 김인철

겉으론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 보여도 속에선 천둥이 치고 폭풍이 몰아칠 때가 있다. 오늘 나는 무엇에 그리 속을 끓였을까? 싶은데 막상 진정이 되고 속을 헤집어 보니 딱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 햇살 한 줌에 흐렸던 마음이 풀어지려던 순간, 곁에 있던 생면부지의 사내가 속절없는 짜증과 한숨을 내쉰다. 이마에 주름 가득한 사내의 긴 한숨이 오래된 프라이팬의 눅진 기름때처럼, 상처 입은 피부에 덧난 상처처럼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다.


저녁마다 한 시간 정도 운동장을 거닌다. 오후 8시가 되면 운동장 가운데에서는 산책을 나온 동네 사람들과 그들이 데리고 나온 '개들의 동창회'가 열린다. 밤에 열린 드넓은 운동장은 개들에게 천국이다. 사람들은 트랙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밤의 운동장에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있다면 진작에 귀머거리가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속 시끄럽던 사연들이 바람을 타고 내 귓등을 때린다. 하지만


"그 학교의 운동장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귀'는 없다. 단지 반쯤 감긴 외눈박이 눈 하나만 깜깜한 하늘에 단단히 박혀있을 뿐. "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없는 운동장, 밤의 차디찬 계단에 홀로 앉아서 스마트폰을 켠다. 한때의 인연이었을 사람들의 연락처를 훑어보며 그들과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낯익은 이름을 지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미소와 찡그림이 지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있다. 사소한 물음표들이 머리 위에서 말풍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사진출처-pixabay

하루가 지난 다음날 오후엔 가까운 도서관에 갔다. 연락이 뜸하던 시골 동네 후배와 중학교 동창 한 명과 통화를 했다. 동네 후배와는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소년 시절 우리는 무더운 여름엔 개울에서 물장구를 치고 '참외 서리'를 할 정도로 무람없는 사이였지만 시간과 공간은 서로를 빛처럼 멀리했다. 모두가 그렇듯이 좋았던 호시절은 대가 없이 잃어버렸다.


그를 통해 너머 너머의 소식을 접했다. 고향에서 잘 살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타지에서 건강이 안 좋은 동생도 있었고 연락조차 안 되는 이들도 있었다. 일부러 찾지 않는다면 연락이 끊긴 그들과는 오늘부터 살아서 영원한 이별을 시작했다.


주소록엔 017, 016으로 시작되는 번호도 꽤 많았다. 주소록에서 의미 없는 전화번호들을 지운다. 그러다가 하나 둘 셋. 삭제 버튼을 누르기 망설여지는 이름 앞에 멈춘다. 나는 왜? 지금 이 번호를 삭제하기를 망설이는 거지. 이름은 가물거리고 얼굴도 잃어버렸지만 그와 잊어서는 안 될 추억이 있는 게 아닐까?

몇 차례 망설임 끝에 오늘은 삭제 버튼을 넘긴다. 다음번엔 틀림없이 주소록에서 삭제될 것이다. 그와 나. 둘 중 하나라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과거가 되어버린 이름과 숫자, 그리고 잃어버린 얼굴들. 그들과의 빛바랜 추억을 삭제하기에 오후 네시의 동쪽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저녁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여전히 '귀'가 없는 운동장을 돌 것이다.


20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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