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삶이 보이는 창' 5,6월호 수록
2008년 리얼리스트100, 제3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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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 .”
서울행 고속버스는 튕기듯이 터널 속을 빠져나왔다. 마지막 휴게소를 벗어날 때부터 김 노인은 속이 느믈 거리고 토할 것 만 같았다. 붉은 요철과 둔덕을 넘을 때마다 속에서 덩어리 같은 것들이 쑥쑥 치받고 올라왔다. 노인은 불현듯 누렇게 색이 바랜 소매를 걷어 올렸다. 몇 년을 입었는지 소매 끝자락은 군데군데 실밥이 터져 있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손가락은 검고 뭉툭했으며 팔목 또한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노인은 시계를 봤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삼십 분을 더 가야 했다. 물방울무늬의 보라색 커튼을 젖히더니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밤에 불어온 황사 때문인지 하늘이 부옇다. 밑으로 보이는 한강도 탁한 흙빛을 띄고 있었다. ‘서울이란 곳이 본디 이렇던가!’ 노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뿌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노인은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그렇지만 바쁘게 움직이는 차량을 제외하면 현기증을 느끼게 할 만한 그 무엇도 차창밖엔 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흙빛의 강물 때문이었을까?
점점 속력을 높이던 버스는 잠실 대교의 중간쯤 멈춰 서더니 한동안 꼼짝을 하지 않았다. 몸을 좌우로 비틀어대던 노인은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 건너편에 펼쳐진 것은 대규모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굵은 철근이 우후죽순 솟아있는 아파트 사이로 대형 크레인들이 철근 뭉치와 시멘트를 가득 담은 포대 자루 같은 것들을 분주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크레인을 연결하고 있는 가느다란 줄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노인의 불안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크레인의 줄이 끊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 땅으로 곤두 박칠 친 것은 바로 노인 자신이었다. 어떤 예고도 없이 고통스러운 기억 하나가 노인의 복잡한 상념을 저리게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노인의 막내 동생 춘식이었다. 십 년을 훌쩍 뛰어넘는 오랜 시간이었지만 춘식의 모습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노인은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숨이 몹시 가빠졌다. 춘식을 기억에서 떠올릴 때면 으레 그랬으므로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형님 이제 되도 않는 농사는 그만 때려치울라요.”
춘식이 십 년을 넘게 짓던 고추 농사를 연거푸 세 번씩이나 작파하고 그동안 정부에서 빌린 융자라도 시나브로 갚겠다며 읍내의 한 공사판에 날품팔이로 나서는 것을 막은 것은 바로 김 노인이었다.
“시방 그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거여. 공사판은 뭐 쉬운 줄 아는 개벼! 그 몸으론 애저녁에 글러 먹었응께 나 말대로 혀 봐! 사람도 서넛 붙여 줄팅게. 그라고 양파는 작황이 좋을 거여! 올해 시세를 보니께 그 정도면 괜찮고... .”
“아 글씨 지는 이제 농사라면 넌더리가 난다니께요.”
“이눔아, 한번만 더 성을 더 믿어보란말여. 이번엔 정말로 잘 될 거구먼.”
노인의 예상대로 그해 양파의 작황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시세도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얼마간 빚도 갚을 수 있었다. 이제야 춘식에게도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이듬해 춘식은 양파 농사를 더 많이 짓고 싶어 했다.
“이참에 고추농사도 다시 시작할 거구먼요. 농기계도 쌈마이한 걸로 새로 장만하고.... .”
춘식은 이참에 트랙터와 콤바인도 새로 들여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춘식은 노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채업자를 찾아갔다. 그때만 해도 중국산 양파가 대량으로 들어올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수학을 거두기도 전에 시세는 반값으로 떨어져 버렸고 인건비는커녕 비료 값도 건지지 못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사채는 순식간에 일억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필리핀에서 시집을 온 춘식의 마누라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집을 나가버렸고 어깨 보증을 섰던 뒷집 백산 양반도 쥐도 새도 모르게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춘식의 삶은 바닥까지 곤두박질쳐 있었다.
“형님. 면목이 없어라. 껀껀이 농사는 망해불고 처도 생때같은 자식도 버리고 내빼 불고... 그나마 믿었던 백산 아재까지.... 그치만서도 지는 추호라도 형님 원망하지 않응께 괘념치 마셔라.”
그의 주검이 발견된 곳은 작년에 새로 산 트랙터로 양파를 통째로 갈아엎은 안개산 초입의 낮은 언덕이었다. 김 노인이 형으로서 춘식에게 가져야 할 죄책감은 그다지 없었다. 몇 년 전 자궁암으로 죽은 누이와 둘째에 이어 막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다는 상실감, 노인은 단지 그것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때만 해도 시간이 지나면 춘식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련 같은 것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었다.
-2-
버스는 어느 틈엔가 터미널에 들어서고 있었다. 철커덕.... 문이 열렸다. 계단을 내리자 도시의 비릿한 쇳내음이 노인의 코를 거칠게 자극했다. 노인은 조심스레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어 꼬깃꼬깃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산 4번지. 대지 184평.’ 요즘 시세로 치면 삼십억이 조금 넘었다. 남산 밑자락 삼만 평 정도의 땅이 그린벨트에서 해제될 거라는 소문은 지난가을 부동산 업자인 장 씨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노인의 땅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사실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자신의 명의로 된 땅이 있다는 사실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오래전부터 치매를 앓으시던 당신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노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 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난가을 정부의 토지 정책이 바뀌면서 그 일대의 상당 부분이 그린벨트에서 해제되었던 것이다.
“서울서 농사를 지어야겠어.”
“뭐라고라?”
“형님 시방 뭐라고 혔소?”
“그 나이에 벌써 귓구멍이 막혔는감. 서울에서 나락을 거두겠다니께.”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노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부지 그게 무신 소리다요. 이참에 그 땅 폴아서 빚 갚어불고 남은 돈으로 읍내에 모텔하나 사자니께요.”
승헌도 펄쩍 뛰었다.
“이눔아! 니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내 맘 몰를 것이여.”
“지는 암만 생각 혀도 아버지를 이해 못하겠구먼요.”
김 노인은 서울로 떠나던 오늘 아침까지도 대거리를 해대던 승헌을 생각했다. 어찌 보면 승헌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장 씨의 사무실은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도 한참을 가야 했다. 조용히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노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한쪽 벽면을 다 채운 커다란 지도였다. 잠시 외출을 했는지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장 씨를 기다리는 사이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지도는 명동과 회현동 일대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저 중에 자신의 땅도 있을 터였다. 그때 장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어르신 저녁에나 오신다더니....”
“그동안 잘 지냈는가?”
“네...승헌이는 잘 지내죠?”
“그려...근디.. 시방 여그가 내 땅 맞제?”
“네, 거기 녹색으로 표시된 곳이에요.”
“참말로 저 땅이 시방 삼십억이나 한당가?”
노인은 당최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그 땅을 사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니까요. 오늘도 벌써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온 임대 업자들이 세 명이나 다녀갔지 뭐예요. 어르신 행여 저 땅 파실 생각일랑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그동안 고생만 하시더니 늘그막에 복 터지셨네요.”
“허허... 복은 무신 놈의 복.”
“그런데 어르신.... .”
“왜 그랴?”
“저 금싸라기 같은 땅에다 뭘 하실 거예요?”
“글씨...푸성귀나 잠 심을라네....”
“에이 농담도...
“으째, 거짓부렁 같은가.... .”
“아니에요. 그냥 뭐 하실라나 궁금해서.... .”
김 노인은 거푸 너스레를 떨어대는 장씨를 등지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해거름의 땅거미는 시골의 그것처럼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사방에 가로막혔다. 어지럽게 번들거리는 네온과 출처를 모를 괴성과 불야성들...그리고 붙박이장처럼 콘크리트 속 깊이 박혀있는 칙칙한 빛깔의 건물들이 답답했다.
남산 밑자락으로 오르는 골목은 좁고 구불구불했다.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게 늘어진 전선이 골목과 회색 슬레이트 지붕을 더욱 나직하게 휘감고 돌았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였다. 이름 모를 성당의 뾰족한 종탑도 보였다. 명동성당인가 싶었다. 중턱에 다다르기도 전에 노인은 무릎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숨이 턱에 찰 때가 되어서야 장 씨가 말하던 낡은 낙원 아파트가 흉물스러운 몸체를 드러냈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노인을 기억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억센 손에 이끌려 왔던 기억이 살아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편처럼 부서진 몇 개의 장면들에 불과했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놀던 동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등지거나 노인처럼 시대의 뒷마당에서 비쩍 마른 허벅지와 활처럼 휘어져 버린 등짝을 토닥이고 있을 터였다.
낡은 아파트를 에두르고 있는 붉은 담벼락엔 재개발을 환영하는 펼침막들이 빳빳하게 펼쳐져 있었다. 서울의 몇 개 남지 않은 달동네, 재개발이 되면 볕이 잘 들고 살기 좋은 해동네가 되는 건가? 노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땅을 팔지 말라던 장 씨의 말을 떠올렸다.
-3-
강길만 사장은 벌써 며칠째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도대체 어떤 작자일까?”
강 사장은 그 공터의 주인이 무척 궁금했다. 몇 달 전만 해도 구청 건축과장은 낙원 아파트 재개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입주해 있던 조합원들 간의 갈등도 극에 달하고 있었고 아파트 아래쪽에 그린벨트 지대가 포함되어 있어서 어렵다는 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 달 전에 갑작스럽게 재개발 확정 발표가 나버렸던 것이다. 강 사장은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백화점을 지으려고 수년 전부터 곳곳에 작업을 해오고 있던 터였다. 건축에 필요한 상가와 토지도 거의 사들였고 몇 년 전부터 상인들에게 세를 주고 있었다. 여차하면 보상금을 조금 쥐어주고 몰아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이백여 평의 공터였다.
“우라질...”
강 사장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이 인간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차 부장이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오늘도 해결을 못하면 아예 돌아오지도 말라는 엄포를 던져놓긴 했지만 미덥지가 않았다.
“차 부장 아직 연락 없었어?”
“네....”
그는 답답한 듯 다시 책상 위에 있던 담배 한 개를 꺼내 입에 물었다. 반쯤 피다만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비벼 뭉갰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차부장이었다. 어깨는 축 쳐지고 면상은 구겨져 있었다.
“어떻게 됐어?”
“그게...얼마 전에 전라도 부안이란 곳에서 올라온 시골 노인네랍니다.”
“뭐? 부안이라고... .”
강사장은 깜짝 놀랐다.
“그자가 무슨 수로 그 알짜배기 땅을.... .”
“상속받은 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네?”
“평당 십만 원을 더 얹어주겠다는데도 싫대?”
“네...”
“참나 원.”
“근데.. 저...꼭 실성한 노인네 같지 뭐예요. 자기는 이 땅에다 농사를 지으려고 한다면서 갈 때마다 바짝 날이 선 낫으로 잡풀을 베고 있더라고요....”
차 부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으이그, 한심한 인간아, 그게 다 값 더 올리려는 수작인 줄 몰라.”
강 사장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봐 그 땅 없으면 다른 땅은 있으나 마난 거 알아 몰라?”
“내일 다시 찾아가 보겠습니다..”
“값을 더 올려봐.”
그는 까치 발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나서는 차 부장을 한심한 듯 바라봤다.
-4-
김 노인은 벌써 한 시간이 넘도록 횟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공터에서 가장 인접한 슈퍼와 정육점에다 말을 넣어봤지만 모두가 안 된다고 거절을 한 터였다. 낙원 아파트 재개발 조합장이라는 정육점 사장은 노인을 아예 실성한 사람 취급을 했다. 하긴 노인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마침 횟집 주인인 듯 체격이 작달막한 사내가 손님이 주문한 횟감을 꺼내려는지 문을 열고 나왔다. 사내는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고 한 손에는 작은 뜰채를 쥐고 있었다.
“영감님, 거기서 뭐하세요.”
이사 온 첫날부터 몇 차례 왕래가 있던 터라 주인인 듯한 사십 대 중반의 최 씨는 노인을 보더니 살갑게 아는 체를 했다.
“오늘도 바쁘신가 보구먼.... .”
“네, 지금이 한창 바쁠 시간이라... .”
“우럭이 아주 힘이 좋아 보이는 구먼....”
“그렇죠... 들어오세요.”
“응...그려, 근디... 나가 에려븐 부탁 하나만 해도 될랑가 모르겄네... ”
“뭔데요?”
“긍께...거 뭐시다냐....”
“말씀해 보세요.”
“난중에 여기서 물 좀 빌어쓰면 안되겄는가 싶어서.... ”
“물을요?”
“그려. 실은 나가.... .”
노인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최씨는 노인을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금...농담이시죠?”
“아 나가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거그한테 허튼 소릴 하겄는가? 내 물 값은 솔찮케 쳐 줄터이니 좀 빌어쓰면 안 되겄는가?”
“저야 뭐, 물 값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쓰셔도 상관없지만... .”
“그라믄 쓸 수....있겄제?”
“까짓거 그러시죠 뭐.... .”
최 씨는 그러면서도 당최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인은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이번 참에도 일이 틀어지면 아예 돈을 좀 들여서라도 아파트 옥상에다 탱크를 설치해서 직접 빗물을 받아 쓸 심산이었다. 이제 승헌이에게 전화해서 농사에 쓰일 농기구만 실어오면 되었다.
“준비 다 되았겄제?”
“아부지 지는 아무래도....”
전화를 받는 승헌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쯧쯧 고막 터지겄다. 그만 하믄 됐응께 내일 아침 일찍 일러둔 장비나 보내드라고.”
노인은 모처럼 홀가분한 맘으로 방바닥에 누웠다. 모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빛이 촘촘히 빛났다. 시골의 그것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지만...
다음날 오후가 되자 일체의 농기구와 누런 황소 한 마리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음매에.... 워워... .”
“세상에나...이게 무슨 일이래.. ”
고삐를 단 누런 황소를 본 시민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횟집 주인 최씨도 상가의 조합원들도 난데없는 황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한 걸음에 달려 나왔다.
“이랴~~ 이랴~~ .”
김 노인은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낡은 창고 쪽으로 소를 끌고 가려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인 소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커다란 눈만 깜빡 거리며 휙휙 콧바람을 불어대더니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혼자서 낑낑대던 김 노인이 불쌍했던지 횟집 주인을 비롯한 낙원 아파트와 상가의 조합원들 서넛이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주었다.
“와, 고놈 잘생겼다.”
“그러게 말이네. 참 실하게 생겼어.”
노인은 저녁이면 채소 가게를 하고 있던 부녀회장에게 부탁해서 팔다 남은 채소를 구해다가 소에게 줄 여물을 충분히 만들어 먹였다.
“이눔아, 조만간 힘 좀 써야 하니께 많이 먹어둬.”
후덕하게 생긴 사십 대 후반의 낙원 아파트 부녀회장도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시던 당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저녁이면 팔고 남은 채소를 거의 공짜로 주다시피 했다. 노인은 여물을 충분히 만들어 먹이면서 한편으론 곡괭이로 팍팍해진 땅을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노인은 마침내 소를 몰고서 땅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땅을 농지로 개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땅이 얕게 파여서 물을 대도 매번 옆으로 새 나가 버렸다. 트랙터로 땅을 더 깊이 갈아야 했다.
“어르신 무슨 문제라도 생기셨어요.”
“땅이 팍팍해서 그런가 도무지 쟁기 날이 짚이 들어가질 않는구먼.”
“그럼 트랙터를 쓰시지 그러세요.”
“잉! 그러지 않아도 그럴참이었구먼. 근디 그걸 어디서 구한당가. 시골에 털털거리는 놈이 한 대가 있기는 한디 워낙에 오래 되나서리... .”
“마침 잘 됐네요. 제 친구가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데 한번 말해볼게요.”
“고거이 참말인가. 아 그라면 내사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제.”
노인은 각박한 도시에 저토록 살갑고 인정 있는 사내도 있는가 싶어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최 씨뿐만 아니라 여물을 넉넉히 챙겨주던 부녀회장을 위시한 상가의 조합원들도 모두 친절했다. 노인의 우려와는 달리 서울서 만나본 사람들 대부분은 성실하고 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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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사장은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한 택시 노동자의 분신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F.T.A인지 뭔지 하는 미국과의 협상을 반대하는 오십 대 택시 노동자가 자기 몸에 시너를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모양이다. 그는 네모난 화면 속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검게 그을린 채 바닥에 누워서 몹시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그는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무엇인가를 열심히 외쳐대고 있었다. 식도까지 화상을 입었는지 그의 외침은 검은 연기와 함께 흘러나왔다. 화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강 사장은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렸다.
“쯧쯧....저런, 막장 인생이 뭔 투사가 되겠다고 벌건 백주 대낮에 분신은 분신 질이야. 죽는 놈만 불쌍한 거지.”
그는 툭하면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 바닥에 투신하거나 자기 몸에 시너를 퍼붓고 불을 싸질러대는 소위 열사라는 작자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비장한 목소리로 읊어대는 그 신념이란 것이 요즘 같은 세계화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시대에 씨알이나 먹혀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고 설사 그런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못난 치들의 어리석은 투정일 뿐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가진 자가 있으면 없는 자도 있게 마련이고 득세하는 자가 있으면 착취당하는 자도 있게 마련이다. 알랑방귀는 꾸지 못할망정 기어들고 대들면 무작정 깔아뭉개야 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면에서 강 사장은 자신을 늘 행운아라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껏 사업운도 제법 따라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그는 무슨 삼재라도 낀 것 마냥 하는 일마다 삐걱거렸다. 신경질이 난 나머지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금빛 골프채를 꺼냈다. 공도 없이 마음껏 휘둘렀다. 평소 같았으면 기분이 좀 나아졌을 텐데 그는 여전히 속이 뒤틀려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채 숨을 할딱거리며 깊은 신음을 토해내던 작자 때문이 아니었다. 쇠고집 같은 시골 영감탱이 때문이었다.
“급살 맞을 영감탱이....”
한 달이 넘도록 그 노인네는 굵은 철근이 올올이 박혀야 할 자신의 땅에 삽질을 해대고 있었다. 도대체 법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바람 불면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노인네 하나 어쩌지 못하는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구청과 경찰서도 묵묵부답이었다. 담당 경찰관이라는 작자는 꽤나 깨끗한 척을 하는지 수표 몇 장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제깟 것도 사람인데 액수가 문제지.... .’
이제껏 그가 돈을 찔러 넣어서 해결 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따르릉.”
“현대 산업 개발, 강길만입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박 사장님 그저 면구스럽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
“아! 다 아실만한 분이 왜 그리 박하게 구십니까. 이번 달 내로 꼭...”
“사, 사장님...박 사장님....!”
강 사장은 끊겨 버린 전화를 붙잡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네, 이놈의 영감탱이를....”
믿을 것은 역시 그것밖에 없었다.
-6-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 한 복판에서 소를 몰며 논을 가는 노인의 모습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음메에~ 음메에~ 논에서, 아스팔트에서, 그리고 임시로 만든 축사에서 이따금씩 울려 퍼지는 살풍경한 소의 울음소리는 낯섦을 넘어서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차량의 경적이나 그 밖의 출처를 알 수 없는 도시의 소음들에 묻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골의 향수를 실은 듯한 소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로 잡아끌었다. 낙원 아파트 주민들은 물론 상가 조합원들과 복지관 노인들에게 그곳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을 처음 지나치는 사람들은 아무리 바쁜 걸음을 걷다가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참이나 머물다 가곤 했다. 게 중에 소싯적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본 희망 복지관의 노인들은 두렁에 앉아서 김 노인이 하는 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고 때로는 노인이 부러운 듯 넌지시 말을 붙이기도 했다.
“어디서 오셨소?”
“전라도 부안에서 왔소만.... ”
“내는 정읍서 왔는디....요 며칠 두고 본께로 참말 대단허요. 내도 한때는 신태인에서 꽤나 큼지막하게 농사를 지었지라.... 근디 몇 년 전에 고추 농사를 짓다가 중국산 고추 때문에 빚만 지고 이제는 큰 놈 신세를 지고 있다오.”
“우리네 나이쯤 되면 어디 사연 없는 사람이 있겠소.”
어느새 김 노인의 작은 논바닥은 동네 사랑방이 되어 버렸다. 볕이 좋으면 한편에 돗자리까지 깔고서 막걸리도 마시고 새참으로 자장면도 시켜 먹었다.
그렇게 도시 한복판에서 뿌리를 내린 벼는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잘 자랐다. 노인은 힘이 부치는 가운데도 벼에 비료나 농약을 뿌리지 않았다. 농약 대신 우렁을 풀고, 오리도 몇 마리 풀어놓았다. 김을 매거나 피를 뽑을 때는 무릎이 시렸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럴 때마다 희망 복지관의 노인들이 더러 팔을 걷어 부치고 김 노인을 도와주기도 했다. 낙원 아파트의 주민들은 이따금씩 베란다에 나와서 노인이 심어놓은 파란 모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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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된지도 한참이 지났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비는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최 씨의 물을 빌어서 간신히 물을 대고 있기는 했지만 강 사장 같은 훼방꾼들이 간혹 호스를 잘라 버려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비라도 왕창 내려줬으면 신경이 덜 쓰일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보게 김 씨 큰 일 났네 그려.”
복지회관의 장 영감이 한뎃잠을 자고 있던 노인을 부리나케 깨웠다.
“와, 무신 일이 났당가?”
“자네 논에 있던 물이 죄다 없어져 버렸구먼...”
“뭐시라..고거시 무신 말이당가.”
“아 빨리 가보드라고...”
장 영감의 말은 사실이었다. 누군가 펌프로 물을 죄다 퍼내기라도 한 것처럼 하룻밤 사이에 논에 가득했던 물이 없어져버렸다. 게다가 횟집과 이어져 있던 호스의 물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었다. 김 노인은 횟집으로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이보게 최 씨 이것이 어찌 된 일이당가.... .”
횟집 주인은 무슨 일이 있었던지 평소의 부드럽고 살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저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게 되었네요.”
“그...그게 무신 말이당가? 아 싸게 말해 보드라고.... .”
그때 일단의 사람들이 횟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낙원 아파트 재개발 조합원들이자 상가 주인들이었다. 게 중엔 조그만 정육점을 운영하는 조합장도 있었고 소에게 줄 여물을 넉넉히 챙겨주던 부녀회장도 있었다. 노인에게 땅을 절대로 팔지 말라며 시세를 알려주던 부동산 주인 장 씨도 그들 틈바구니에 슬그머니 섞여 있었다. 미간이 좁고 양쪽 눈이 째진 조합장은 평소에도 땅값 떨어트린다며 김 노인의 벼농사를 곱게 보지 않고 있던 터였다. 그가 좁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앞으로 나서더니 노인에게 말했다.
“영감님, 더 이상 사람 현혹시키지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세요.”
“나가 사람을 현혹시키다니 고거이 무신 말이당가?”
“누울 자리를 보고 자리를 뻗으셔야지요. 영감님이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도시에서 농사라니, 그것도 벼농사라니..... .”
노인은 도시 한 복판에서 자라는 벼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 버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 내 땅에다 내가 농사를 짓겄다는디 거그들이 무신 권리로 그런단 말이오.”
“우리 목숨이 달렸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만 농사 포기하시고 시골로 돌아가시라고요.”
“고거시 뭔 말이시?”
노인은 이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영감님 때문에 우리 일터를 뺏기게 생겼단 말이에요.”
“보소 최 씨, 당신도 강길만 사장에게서 일터 뺏기지 않으려면 우리말 듣는 것이 고마 신상에 좋을 것이여. 그리고 금명간에 아파트 재개발되면 한밑천 잡을텐데..... .”
최 씨는 흥분한 사람들 틈에 둘러싸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논에 있던 물도 자네들이 뺐는가?”
“흥...누가 뺏건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다 말라죽을텐데.... ”
소에게 줄 채소를 대주던 부녀회장이 차갑게 힐난했다.
“듣자 하니 강 사장이 어젯밤에 용역들 시켜서 뺐다구 하드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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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노인에게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엔 강 사장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던 그들이 한번 그렇게 태도를 바꾸자 마치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김 노인을 폄하하고 벌레처럼 취급했다. 그나마 김 노인을 도와주던 복지관의 장영감과 다른 노인들도 하나둘 자식들 핑계를 대며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그들도 이제는 자식들에게 매인 몸이 아니던가? 노인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몇 차례 강 사장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차부장인가 하는 작자의 비웃음만 살 뿐 번번이 허사였다.
그사이 물을 대지 못한 논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쩌걱 쩌걱 갈라졌고 벼는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노인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직접 물을 길어오기 시작했다. 곱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쯧쯧, 정말 고집불통 영감이네...”
“이젠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 그 땅 팔면 한 밑천 단단히 잡을 텐데 뭣하러 저리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몰라?”
“아무래도 알박긴가 뭔가 그것 아닌가 몰라?”
“뭐, 알박기라고?”
“그래, 땅값을 더 올릴 심산인가 보지 뭐.”
“이봐, 강 사장 그 작자가 어떤 인물인데....그게 통할 것 같은가.”
“하긴 그렇지만서두... .”
사람들의 냉대와 비웃음은 여전한 도시의 쉿 내음 섞인 먼지바람을 타고 노인의 귓전에 흘러 들어왔다. 김 노인의 논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공사현장에서는 불도저가 수십 미터 깊이의 땅을 파기 시작했고 붉은 크레인이 철근과 콘크리트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겼다. 크레인은 마치 땅속에서 솟은 거인의 오른팔과도 같았다. 거인의 오른쪽 팔들이 곳곳에 흩어진 채 김 노인의 논과 공사현장을 수십 미터 높이에서 마치 위협이라도 하듯이 거칠게 휩쓸고 다녔다. 작업복을 입은 인부들도 매일 백여 명씩 드나들었다. 거대한 공사 현장 속에 갇혀 버린 김 노인의 논은 마치 광막한 바다 위에 떠있는 외로운 섬 같았다.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 것은 물길이 끊기고 나서 열흘이 지나서였다. 축사에 매어져 있던 소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동물원에서나 봄직한 소를 보는 것을 무척 불편해했다. 소는 사람들의 식탁에 올라오는 것 외에는 도무지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동물이 되어 버렸다. 소가 사라지고 며칠이 지나서 조합장의 정육점 유리창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문구 하나가 조심스럽게 내걸렸다.
“최고급 한우 오십 퍼센트 세일!”
문구가 게시된 지 채 두 시간도 되기 전에 최고급 한우는 몽땅 팔려 버렸다. 소머리를 누른 편육은 명동의 한 젊은 개발업자의 아홉 번째 건물 상량식에 쓰일 거라고 했다. 그것이 김 노인의 소라는 사실은 물론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저녁 식탁에 올렸고 최고급 한우답게 위장장애나 소화불량 같은 것은 없었고 아침엔 흰 타일이 박힌 화장실에서 소의 모든 영양분을 흡수하고 남은 찌꺼기를 시원하게 배설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
노인은 점점 메말라 가는 논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형님 이제 뻘짓거리 그만 하시고 시골로 내려가시랑게요. 형님이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
연일 악몽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춘식이 나타났다. 하지만 노인이 명동이라는 자본의 심장에 날이 바짝 선 ‘낫’을 꽂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비단 춘식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핑계였고 그저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모든 것이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변해서는 안 되는 것, 노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들을, 버려버린 것들을, 춘식의 말처럼 뻘짓거리를 해서라도 그들이 버려버린 것들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명동에 피어난 이삭, 그것은 단순한 이삭이 아니었다. 수 천 수 만 개의 볍씨가 명동의 검은 아스팔트에 고샅고샅 뿌리를 내리고 굵은 철근과 콘크리트를 뚫고 힘차게 피어난 이삭을 바라보는, 그것은 그저 양식으로 얻을 쌀 몇 가마니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뭐랄까? 인위적이지 않고 날 것 같은 생동감이었다,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고등어 같은 그런 생의 기쁨이자 환희였다. 하여 노인은 뼈가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의 농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춘식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다. 노인은 매일 그런 생각을 하며 물이 가득 담은 검은 항아리를 지게에 싣고 터벅터벅 명동의, 자신의 드넓은 들판으로 향했다.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무거운 철근 뭉치를 공사현장으로 옮기던 크레인이 무슨 이유에선지 줄이 끊어져 버렸고 수십 개의 철근 뭉치들은 메말라 가고 있던 논의 한가운데로 꽂혀 버렸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허수아비를 산산이 부숴버린 시멘트 포대는 무릎 높이까지 올라왔던 벼를 일순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주택용지에서의 불법 용지 사용이라며 구청 담당자와 경찰이 노인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한 달 뒤 김 노인이 강 사장이 보낸 대리인과 땅을 팔겠다는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고 구치소를 나왔을 때는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후였다. 비록 말랐지만 파랗던 벼가 노랗게 익어가던 그의 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검은 아스팔트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명동과 회현동, 그리고 낙원 아파트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몸이 쇠약해져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 노인은 퇴원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서울의 다른 변두리에서 그 해괴망측한 짓거리를 다시 시작했다는 소리도 들렸고 땅을 판 돈을 고아원을 비롯한 보육시설 서너 곳에 골고루 기부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인이 정말로 실성을 해버린 탓에 고리사채 빚에 허덕이던 둘째 아들이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그가 살던 읍내에다 커다란 모텔을 열었다는 소문을 가장 그럴듯하게 믿었다.
-9-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김 노인의 존재가 거의 사라져 갈 무렵 낙원 아파트가 있던 자리는 영문 이니셜을 브랜드화시킨 최신식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최신식 아파트는 주변의 상가마저도 삼켜 버린 듯 일층에서부터 삼층까지는 세탁소에서부터 국내 제일의 00 은행 명동 지점까지 입점해 있었다. 그러니까 최신의 건축 기술이 발현된 저 아파트는 밤이 되면 밖에서도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아파트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노회 하며 냉정하고 탐욕스럽고 게다가 더없이 유능하기까지 한 명동의 건축업자는 그런 방식으로 이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을 ‘유럽을 닮은 아파트라’고 속삭였다. 그렇다면 저 수백 세대의 초현대식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노인을 실성한 사람처럼 취급했던 조합장도 부녀회장도 사람들이 물길을 끊어 버려 곤혹스러워했던 최 씨도 독일산 셰퍼트 두 마리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초현대식 아파트 경비실의 금빛 테두리를 두른 검은 명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거기엔 김 노인의 경우와는 달리 어떤 강요나 협박이나 폭력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전에는 삼만 원이면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삼겹살을 십만 원어치를 시켜야 되는 상황, 삼만오천 원이면 할 수 있었던 파마를 십만 원을 넘게 주어야 되는 그런 상황들이었다. 수입 외제차들이 즐비한 주차장 사이에 십 년도 더 된 구닥다리 차를 집어넣다 접촉사고를 내고서는 소형차 한 대 값을 물어주어야 하는 그런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 말이다.
또한 아파트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십 삼층 높이로 세워진 백화점은 그 어느 곳에 있는 백화점보다도 현대적이었으며 화려하고 멋있었다. 층층마다 기둥마다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양탄자와 대리석이 깔려 있었으며 한강의 야경이 돋보이는 최신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고 각 매장에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물건들이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진열된 채 자신들을 맞아줄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노인이 그토록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땅은 다시 굵은 철근과 두꺼운 콘크리트로 덮인 채 백화점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높고 너른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