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시에 지인과 탄천을 걸었다. 지인과의 약속은 어제 오후 네시였다. 산책을 위한 시간과 장소는, 단 두 문장이면 충분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서 무람없는 익숙한 형식의 대화였다.
"샘 투사가 무슨 의미야?"
탄천을 걷던 지인이 내게 '투사'에 관한 사전적 의미를 물었다. 나는 '투영'을 떠올렸다. 동시에 전라도 사투리인 '방안 퉁수'를 속으로 두 번 뇌까렸다. 방안 퉁수는 요즘 나의 귀벌레다.
지인은 가끔, 소설을 쓰는 내게 잘 쓰지 않는 단어나 어휘를 묻곤 한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답을 찾을 때가 많다. 나도 그렇다. 투사와 투영, 같은 듯 다른 의미다. 지인은 투사는 부정을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런가? 나는 투사보다는 투영을 즐겨 쓴다. 내 마음을 투영시키는 대상은, 사람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대부분 말랑말랑 하지만 가끔은 금속처럼 딱딱하다.
봄이 오기 전 기대했던 몇 개의 작은 기대들이 낙담으로 답했다. 이런 어긋남은 실망이라기보다는.... 더 큰 기대를 위한 반작용이다. 하지만 상심은 어쩔 수 없다. 실패에 익숙해지는 지름길은 없다. 견디고 극복하는 것밖에. 최근에 교체한 만년필 펜촉으로 '실패'라는 단어를 수차례 휘갈겼다. 상상과는 다르게 필체가 제법 멋지다.
저 멀리 하늘 높이 솟은 롯데타워가 보인다. 타워는 언제 봐도 '반지의 제왕'의 탑(사우론의 탑)을 연상시킨다.
탄천을 거닐던 중 누군가 앙상한 나무 가지에 걸어 놓은 검은 봉지가 시선을 붙잡았다. 그 검은 봉지 속엔 얼굴도 모르는 이의 위장으로 들어가고 남았을 음식의 껍데기들이 들어 있었다. 지인과 나는 얼굴도 모르는 이의 공중도덕의 불량함을 탓했다. 그의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나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사흘 정도 고요했다. 내 몸속 어딘가에서 생성되고 곰삭여진 언어 이전의 사유들이 무람없는 지인을 만나면 향기로운 말의 형태로 육화 된다. 그러니까 내 안에서 조탁된 사유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향기로운 말이 되던가 의미 없는 외침이 되어버린다.
지인은 사과와 단감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단감을 선택했다. 한 잎 베어 문 단감이 약간 물렀다. 무른 과육이 마른 혀와 잇몸에 물감처럼 스며들며 달콤했다. 한동안 그 달콤한 맛에 취해 있는데 문득 지인이 단감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지인도 사과를 한 잎 베어 물었다. 미안해요. 자의식 짙은, 지랄 맞은 예민함은 이럴 때만 곰처럼 둔감하다. 나뭇가지에 두고 온 검은 비닐봉지가 떠올랐다.
어제 김혜수가 주연을 맡은 '소년심판[넷플릭스]'을 보았다. 드라마 '시그널' 이후로 김혜수를 좋아한다. 시그널의 그녀와 소년심판의 그녀는 같은 듯 다른 분위기다. 비스듬한 고개, 날카로운 눈빛, 가느다란 턱선...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 지인은 그의 연인을 닮았다던 A를 좋아한다고 했다.
기형도의 표제어처럼, 내 '입속의 검은 잎'에서 그 말의 맛을 느낄 때 나는 빙의라도 한 것처럼 약간의 어지러움과 황홀경을 느낀다. 오늘 지인과의 대화 속에서 역시나 그런 희열을 느꼈다. 어지럽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뒤를 돌아보는데 거대한 사우론의 탑(롯데타워)에서 흰 연기가 난다.
자세히 보니 연기 모양의 구름이 롯데타워 꼭대기에 걸쳐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샤오미 밴드는 오랜만에 20,000이라는 숫자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