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라이킷 23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일수도 있을까?

타인의 인정과 프로 작가의 간극

by 김인철 Feb 19. 2022

*이 글은 십여년 전 김영하 작가와 조영일 평론가의 프로 작가론 논쟁을 보고 쓴 칼럼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네요. 문학적 '길드'는 여전히 요원하고, 근근히 영악하게 살아만 있습니다.


요 며칠 트위터와 블로그 상에서 시작된 김영하 소설가와 조영일 평론가의 작가론[작가는 언제 작가가 되는가?]에 과한 논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일상에 치우친 나머지 결코 놓치지 않겠다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점점 식어 가고 있을 때였다. 더욱이 두 작가[이하 존칭생략]의 논쟁 중간에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접하면서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다.


사진-pixabay사진-pixabay


무명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상투적인 질문은 전도유망했던 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었다(?)는 식의 자극적인 보도로 인해서 '작가는 무엇을 창조하는가?'라는 질문과 동급이 되어 버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면 작가, 즉 ‘인류의 스승’이라는 명예로운 이름 앞에 무명이라는 수식어를 떼지 못한 자들은 대체로 밥벌이로 플랜 B를 선택한다. 그들을 후원해줄 가족이나 스폰서가 없다면 선택권이 없다. 플랜 B. 정의하자면 밥벌이로서의 두 번째 계획이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찾아올, 또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문학적 환희와 영광을 얻기까지 그의 생계를 잇게 해 줄 아르바이트 혹은 비정기적인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찾아야 한다.


타인의 인정과 프로 작가의 간극


김영하는 문학 지망생들에게 외부의 인정이 없어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꾸준히 쓰고 있다면 작가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악하게 살아남아 예술이 허락한 기쁨과 고통을 누리라고 말한다. 세상이 곧 바뀐다는 풍문에 속지 말고 타인의 인정이라는 가혹하고 희귀한 복권에 제 운명을 맡기지 말고 자기 소명을 찾아서 부디 살아남으라고 말한다.


영악하게 살아남아 예술이 허락한 기쁨과 고통을 누리 시라. 세상이 곧 바뀐다. 풍문에 속지 마시라. 타인의 인정이라는 가혹하고 희귀한 복권에 제 운명을 맡기지 말고 자기 소명을 찾으시라. 그리고 부디 살 아들 남으시라. 부디.

-김영하-


하지만 조영일은 작가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프로란 문학만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또는 그런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문학 지망생들에게 문학에 대한 환상을 지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길드(제도)를 세우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세계가 변하는 만큼만 자신도 변화될 뿐이며 예술가는 혁명가라고 말한다.


김영하 님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나는 나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뀔 뿐입니다.

(조영일, 그들은 왜 비평가가 되었는가: 젊은 문학 지망생에게 쓰는 편지 III)

그가 주장하는 모든 의견에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에 대한 환상을 지우는 것. 사실 이제까지 나는 어느 정도 환상 주의자였다. 하지만 이번의 논쟁으로 그 기대가 얼마나 희박한 가능성인가를 절실히 깨달았다.


'고래'를 쓴 작가 천명관의 표현을 거칠게 빌리자면 문학[작품]이나 비평에서 "라깡(프랑스 철학자)대고 지젝(슬로베니아 철학자)거리는" 행위는 문학 작품이라는 찬란한 수식어를 달고서 무수히 일어난다. 더구나 나는 기표, 기제, 표상 같은 비평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이따금씩 접하게 되는 비평서를 읽을 때면 그 현학적인 용어들에 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텍스트(문장)만이 아니라 컨텍스트(내용, 맥락)는 더욱 그렇다. 시나 소설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비유나 상징을 많이 쓰는 문학 언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등장할 때면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일 수도 있을까?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일 수도 있을까? 김사과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질문의 대상이 나를 향하고 있는 이 섬뜩한 물음은 이제까지는 육체적인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건설 현장이나 노동현장에서나 어울릴법한 질문이었다. 물론 이 물음은 어디서든 어울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이상한 물음에 대한 답을 미디어를 통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접한다. 그리고 그 비극적인 사건이 내가 아는 사람의 일이 아닌 이상 필요 이상으로 둔감해져 있다.


사진-pixabay사진-pixabay


도로 위를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폐지 할머니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당신들의 시선처럼. 하지만 이제 이 지극히 문학적이면서도 섬뜩한 물음은 전도유망했던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이후 책상 앞에 앉아서 연필이나 컴퓨터로 창작열을 불태우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나 이름 없는 예술가들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일 수도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어느 날 미친것처럼 밥벌이로서의 플랜 B를 포기한다면. 게다가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불치병까지 앓고 있다면.


지명도 낮은 문예지와 전태일 문학상 작품집에 단편 두 편 발표한 것이 전부인 나는 딱히 작가라고 말하기도 뭣하다. 처음에 중견 작가와 평론가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작가(?)로서 적어도 밥벌이에 관한 한 플랜 B를 선택한 나의 위치가 어느 정도 규정되어 버렸다. 현재의 나는 낭만적인 예술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업 작가 선언을 한 프로도 아니다. 단지 현실 속에서 이상을 쫓는 가난한 리얼리스트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김영하가 말하듯 작가가 되는 방식에서만이라도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꿈꾼다.


문학 사조로서의 낭만주의가 아닌 작가로 규정되는 방식으로 [리얼리스트의 자장] 안에서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꿈꾼다. 적어도 이 점에서 나는 조영일 보다는 김영하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우리는 대부분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는 더 심한 편이다. 그런 내가 한 작품을 가지고 세 번이나 거절을 당했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내 글을 심사한 그분들은 나보다는 프로였고 또 작품을 보는 시선도 정확했다.


무엇보다 우연에 희망을 걸었던 나의 무책임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신인들이 자주 빠지는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진 나머지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방식이나 서사가 너무 헐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미련 없이 휴지통에 버려버렸다.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에 비하면 이제껏 나의 글쓰기는 형편없었다. 작년에 겨우 단편 두 편을 쓴 것이 전부였다. 다른 폴더를 보니 아직 발표하지 않은 [혹은 되지 못한] 중편 한편과 몇 년째 퇴고 중인 장편 한편이 저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라는 물음이 따른다. 밥벌이도 되지 않는데. 하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껏 했던 일중에서 가장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 의한 인정을 받아 보았기 때문이다. 잠시였지만 인정을 받는 그 순간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약과도 같아서 더 이상 어떠한 인정도 허락되지 않을 때 상처는 배가 되었다. 더 이상 "문학에 대한 환상"이나 "타인의 인정과 복권" 이라는 가혹한 운명"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영하가 주문하듯 영악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이 주는 환희와 희열을 누릴 것이다. 설령 조영일이 말하듯 먹고사는 문제에서 프로 작가가 아닐지라도 계속 풍차를 돌릴 것이다. 어마어마한 자기 확신이(문학에 대한) 없는 것과 풍차를 돌리는 것(문학)을 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로서 플랜 B를 선택한다.


아직까지 나에게 글은 마음의 양식은 될지언정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밥이 되어주지 못한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난 몇 년 동안 원고료[칼럼, 기사, 소설, 수필]로 받은 돈은 채 이백만 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밥벌이 수단으로. 나도 플랜 B를 선택한 경우다. 플랜 B는 말 그대로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작가는 그들의 밥벌이로 플랜 B를 선택한다. 더욱이 스폰서가 없는 무명작가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내 경우도 그렇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시인이나 작가들도 그렇다. 그들은 열광해줄 독자도 스폰서가 없다. 출판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이도 있고 기간제 교사, 화물 운전기사.


달리 보면 그것이 나를 포함한 그들이 예술 영역에서 최고가 될 수 없는 까닭인지도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밥벌이에 대한 대안이 없이 최고가 되려고 했기에 그녀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처음 자극적인 제목을 단 그녀의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그녀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지인(학교 선배)을 통해서 확인한 바로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무책임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한때 한 일간지의 문학 담당 기자였다가 지금은 소설가가 된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했지만 나는 서른다섯 평 공간에서 천장이 없다면 어쩌면 구름까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능력으로 넘쳐나는 서른 명의 아이들과 밤 열 시가 넘도록 부대끼며 밥벌이의 지난함을 토로한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온몸으로 글을 쓴다. 적어도 그렇게 위안을 삼는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공간은 원고지이고 아이들은 아직 끝이 닿지 않은 몽당연필인 셈이다.


2011년 2월 22일


-끝-

매거진의 이전글 만화방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