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철 Apr 02. 2022

낯선 거리에서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A구정에 가정집 하수구 처리과가 있나요?


꽤 오래 낯선 곳에 머물렀다. 사람도 골목도 곧게 뻗은 전선도 반듯하게 선 건물도 생경했다. 머리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과 흐린 하늘만 익숙했다. 거리는 한산했지만 도로를 뚫는 기계음으로 시끄러웠다. 길 모퉁이에 교실용 의자가 하나 놓여있다. 삼십 분 전이다. 시간이 남았다. 많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드르륵. 탁탁탁. 등 뒤가 시끄러웠다. 차량이 한쪽 골목을 막고 도로를 정비한다. 드르륵. 탁탁탁.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골목에서 분주했다. 좌측 골목에서 지팡이를 집은 할머니 한분이 천천히 다가온다. 반백의 할머니는 내 앞을 천천히 스치는가 싶더니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젊은이... 우리 집 하수구, 막혔는데... 구청 연락처." 


할머니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할머니 가까이 귀를 갖다 댔다. 할머니 집 하수구가 막혔는데 A구청 연락처를 모르니 확인해서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셨다. 9시 55분. 약속시간 오 분 전이다. 중요한 일정이다. 집에 보호자가 없는 걸까? 할머니는 간절했다. 면접직전의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할머니,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같다. 시간이 빠듯했다. 약속된 이에게서 확인 전화가 왔다.


"어디쯤 오셨나요?"


사진=PIXABAY


"할머니, 제가 지금은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그러니.... 연락처랑 주소 알려주시면 일정 마치면 도와드릴게요."


할머니는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낯선 젊은이를 믿었는지성함과 주소,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2021이 적힌 검정 수첩에 할머니의 성함과 연락처와 주소를 적었다. 중요한 만남은 삼십 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간이다. 처음이지만 늘 보았던 곳이다. 서로를 알기 위한 탐색과 질문, 약간의 호기심이 버무려진 시간이 재깍재깍 흘렀다. 


"올해 **가 있는데, 경험은 있으신가요?"


왼쪽에 앉은, 검정 마스크를 낀 여자의 질문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속으로 헉! 소리를 질렀다. 심장에 커다런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온몸을 관류하던 피가 멈춘듯 하얗게 질렸다. 그녀도 나의 표정을 읽었을 것이다. 그 순간 잔뜩 긴장된 채 경직된 나의 생각과 태도는 달라졌다. 상대는 필요를, 나는 절실함을, 그 사이에 선택이 있다. 어느 것에 방점이 찍힐까? 나는..이 순간 절실했을까. 어젯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아침에 지하철을 타기 전, 가장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묵직한 태클에 정신이 혼미했다. 


서로를 알기 위한 탐색과 질문, 호기심의 시간이 흐른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기에 삼십 분은 너무 짧다. 계단을 내려가는 걸음이 조금 버거웠다. 또각또각. 검정 구두 소리가 또렸했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자 할머니 생각이 났다. 유효기간이 지난 검정 수첩을 펴고 주소를 확인했다. 오분 거리다. 할머니 집 앞에서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받았지만 바로 끊는다. 그냥 갈까 하다가 다시 전화를 했다. 이번엔 사내가 받는다. 한 시간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고 반듯한 주택 이층에서 문이 열리더니 젊은 사내가 나왔다. 아들이라 하기엔 어리고 손자라 하기엔 나이가 많다. 계단을 내려온 사내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치매가 있으신데... 종종 나가셔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나 봐요. 저희 집 하수구는 이상 없으니 그냥 가세요."


짐작은 했다. A구청에 가정집 하수구 처리과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할머니와 약속은 했으니 확인차 전화를 하고 방문했다고 했다. 지하철을 탔다. 환승할 정류장 하나를 지나쳤다. 정류장을 지나친 건 오랜만이다. 나를 내려놓고 가는 지하철을 보며 잠시 멍했다. 다음 지하철을 탔다. 단대오거리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마을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할머니 한분이 *이마트용 카트에 짐을 한가득 싣고 온다. 카트엔 커다란 짐 3개가 담겨있다. 카트에서 짐을 내리는데 상자 하나가 꽤나 무거워 보인다. 할머니는 거침없고 씩씩하다. 하지만 상자를 들며 힘겨워하신다. 잽싸게 상자를 받았다. 상자는 내가 들기에도 무겁다. 택시를 타야 할 짐이다. 씩씩한 할머니는 꾸역꾸역 짐을 챙긴다.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행선지가 같을 것 같다. 벤치 위에 있던 상자를 들고 버스 계단을 올랐다. 상자를 버스 맨 앞에 내려놓았다. 승객들이 오른다. 마을버스가 출발한다. 텅 빈 정류장엔 빈 카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씩씩한 할머니는 뒤에 앉은 내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승객들이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집까지 정류장 두 개가 남았다. 씩씩한 할머니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상자는 들지 못하실 텐데... 속으로 생각했다. 정류장 두 개를 남겨 두고서 상자를 들고 할머니를 따라 내렸다. 씩씩한 할머니 집은 삼십 미터 남짓이다. 현관문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젊은이 고마워요. 복 많이 받으소."


오늘 낯선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을 만났다. 거리에선 예정에 없던 할머니 두 분도 만났다. 구청 하수구 처리과, 치매 걸린 할머니, 이마트용 카트를 끌던 씩씩한 할머니, 심중에 고요와 태풍이 공존한다. 오늘 내게 정말 중요한 만남은 무엇이었을까? 아침까지만 해도 간절했던 절실함이 태풍 치던 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줄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