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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철 May 16. 2022

5억이 든 통장의 여자와 5억짜리 차를 모는 남자

JTBC 나의 해방 일지 11화, 12화

나의 해방 일지는 드라마에서 흔히 있을법한 클리세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예측불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단 하나의 클리세를 꼽자면 단역마저 풍기는 쓸쓸함이다. 염미정이 독백을 해도, 미정의 가족이 밥을 먹어도, 태훈의 가족이 대화를 나눠도, 창희의 동료와 술을 마셔도, 심지어 기정이 태훈과 카톡을 주고받아도 그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달빛같은 고독과 쓸쓸함이 묻어난다. 


jtbc, 나의 해방일지


이 드라마의 무수한 당연함과 옮음 중에 단 하나 동의하지 못하는 걸 발견했다. 근데 기억이 안 난다. 까먹었다. 창희의 여자사람 친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전 남자 친구의 어머니에게 10점도 주지 않았다는 원망에 전 남자친구의 어머니는 1점도 아깝단다. 내 인생은 79점이다. 50점일 때도 89점일 때도 있었지만 평균은 79점이다. 학교 성적도 그 정도였고, 달리기를 해도, 만보 걷기를 해도 언제나 그 언저리다. 직장생활도 대략 그 점수였다. 93점 이상은 맞아 본 적이 없다. 지금은 49점. 한 달 동안 하루에 1점씩 올리자. 그럼 다시 79점.


jtbc, 나의 해방일지


염소, 돼지. 미정은 먹는 거엔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구 씨는 미정에게 잡아먹히기 싫다며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구 씨는 들판의 개들에게 파라솔을 가져와 그늘을 만들어 줬다. 이 장면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일까, 미정과 그의 가족을 보호하는 것일까? 구씨가 미정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가로등을 깬 밤에 구 씨와 미정이 키스를 했다. 별게 다 설렌다. 


-행복한 척하지 않는다.

-불행한 척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솔직해진다.


<나의 해방 클럽 규칙 세 가지>


jtbc, 나의 해방일지


나의 해방 클럽의 멤버가 한 명 늘었다. 행복지원센터장. 정직한 게 무섭다고, 억지웃음이 표정이 되어 상갓집이 제일 힘들다고 자신에게 솔직하다. 행복한 척 한적은 없지만, 불행한 척 한적은 많았다. 나도 세 번째가 가장 어렵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것은 홀로 거울 앞에 설 때였다. 결국은 홀로 될 운명인 나의 해방 클럽은 수증기가 사라진 거울 앞이다. 생각해 보니, 행복한 척하지는 않았지만, <무릎 꿇기>를 강요하는 이들에게 항복한 척 한적은 많았다.


jtbc, 나의 해방일지


첫 번째 턱을 내는 자리에서, 머리를 자르겠다던 기정에게 태훈이 머리를 자르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의미를 이해한 기정의 표정이 환희로 바뀌었다. 사귄다고 절대로 집까지 태워주지 말라고(기정), 새해와 크리스마스는 함께 하지 못한다고(태훈), 장거리 출퇴근과 아이가 있는 남자의 연애 조건이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근데 왜 둘이 결혼하면 조카(태훈의 딸)를 데리고 살고 싶다던 누나의 말에 공감이 되지.


jtbc, 나의 해방일지


5억이 든 통장의 여자와 5억짜리 차를 모는 남자. 창희의 찌그러진 롤스로이스는 보는 나도 살이 떨렸다. 차에 대한 남자의 로망은 승차감보다는 하차감이라는데, 운전자라면 티코를 몰아도 창희의 마음 다 알겠지. 구 씨와 창희의  추격적은 좀 많이 웃겼다. 추앙하는 여자의 친오빠인데 차 좀 긁혔다고, 쿨하게 넘어가 주지. 구 씨도 차를 많이 아낀 듯. 갑자기 운동화는 고쳐 신고 왜 달리는 건데, 금방 달리다 말지 싶었는데, 이어진 마라톤과 지하철을 보며 다시 쓸쓸해졌다. 


"내 인생 괜찮았어."

"연기 인생 아닌게 어디 있냐?"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없다고 어떻게 사는지도 상관없겠냐?"


둘이 키스 한지 얼마나 됐다고 구 씨는 미정을 떠났다. 신 회장에게 미정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정은 구 씨의 과거가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한다. 미정은 가끔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자신을 떠났어도 저주하던 이전의 남자들과 달리, 한 살짜리 당신을 업어주고 싶다고, 구 씨가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미정이 구 씨의 어두운 세계로 들어갈까, 아니면 구 씨가 다시 밝은(?) 미정의 세계로 나올까? 어느 쪽이 되어도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jtbc, 나의 해방일지


경찰에게 쫓기다 허망하게 죽어버린 백사장의 장례식장에서 웃는 구 씨의 웃음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맥락 없는 웃음에 검은 정장을 입은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구 씨는 정말 힘이 센 사람, 그 세계의 일인자였다. 그 일인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미정, 너란 여자는 도대체. 구 씨의 웃음은 신 회장에게서 미정과 그녀의 가족을 구했다는 안도였을까? 나의 아저씨가 그랬듯이 드라마는 고독과 쓸쓸함을 말하지만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식을 찾는 중이다. 나쁜 사람 말고, 좋은 사람, 착한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절망이 아닌 해방과 구원의 이야기. 나도 오랜만에 착해지고 싶다. 5억이 든 통장과 롤스로이스는 옵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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