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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철 May 30. 2022

쓸쓸하고 결핍된 이들이 만나 따스하게 어우러지는 이야기

JTBC 나의해방일지 15화, 최종회

오월의 바깥은 여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데 나의 해방 일지 끝자락은 겨울이었다. 나의 해방일지가 끝났다. 나는 반팔을 입고 선풍기를 틀었는데 화면 속 염미정과 구 씨는 코트를 입고 냉골 아파트에서 히터를 틀었다. 겨울이었지만 미정과 구 씨는 차가운 아파트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달달하고 온기가 흘렀다. 기정의 사람들과 창희의 동료들은 겨울처럼 차갑고 시리다가 따스해졌다. 



"이 사람 날 완전히 망가지게 두진 않는구나. 날 잡아주는구나."


구 씨가 미정에게 전화를 했다. 미정이 돈 떼먹은 전 남자 친구, 아니... 개개개...개새끼의 결혼식장에서 완전히 망가지려는 순간이었다. 미정이 대사로 치는 장면인데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상상이 되었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틔여도 살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참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창희는 대출을 받아서 편의점을 인수했고 성실하게 일해서 대출을 다 갚았다. 자신이 70억 중에 1원이 아닌 편의점 저 멀리 보이는 인왕산이 라고 했다. 그는 이 드라마가 끝나면 창희로 남아 스님이나 신부가 될 것 같다. 아니 그는 잘못 들어간 강의실에서 운명처럼 장례지도사가 되었다. 




기정은 태훈의 딸 졸업 사진을 함께 찍지 못해 삐졌다. 사춘기가 찾아온 태훈의 딸 때문에 매번 긴장했다. 화를 풀어주려는 태훈의 차 안에서 귤을 까먹었지만 임신은 아니었다. 다행!이라는 태훈의 말에 다시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사랑이 사랑답지 않아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잘랐다. 그래도 좋아하는 태훈을 떠날 수 없었다. 강북의 로미오와 줄리엣. 술에 취한 태훈이 베란다 밑에서 건넨, 모가지가 떨어진 장미 한 송이에 행복해했다. 기정은 역시 (사랑) 받는 사람이었다.



미정은 다른 회사로 옮겼다. 새로운 일터에선 당당하고 행복해 보였다.  미정은 어디에도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또 어디서든 잘 스며든다. 조이 카드 최 팀장과 불륜녀의 시원한 복수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구 씨가... 개개 개... 개새끼인 최 팀장의 대갈통 한번 시원하게 날렸어야 하는데. 아님 미정이라도. 돈 떼먹은 선배는 조금씩이라도 갚는다며 미정에게 사과했다. 


"염미정 나, 너 좋아했었다. 좋아했었다."

"염미정. 아르바이트 안 할래?  내 이야기 들어줘. 딱 10회만. 부족하면 10회 더 하고. 그러다가 더 할 말이 없으면 끝내는 거야."  


미정은 술에 취한 구 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서로를 향한 추앙이 일상이 되었다. 이 드라마 종합 선물세트처럼 스릴러, 로맨스, 코미디를 왔다 갔다 하더니 마지막은 누아르로 끝났다. 구 씨 액션도 어찌 그리 멋있다니.



 

자경의 주머니에서 나와 또르르르 굴러가던 오백 원짜리 동전이 시궁창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쳤다. 기적처럼 시궁창에 빠지지 않았다. 시궁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오백 원짜리 동전이 구 씨, 미정, 창희.... 아니 나이기를 바랐다. 



기정, 창희, 미정, 구 씨. 태훈.... 마지막에 모두 웃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저마다 해방의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나도 나의 현실에서 해방하고 싶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작가와 연출진이 만들고 현실은 나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만든다. 지난 두 달간 간절히 원했던 나의 해방 하나가 결국 비껴갔다. 간절히 기대했는데. 마지막 기회였고 그래서 상심이 더욱 컸다. 세워 두었던 계획이 어그러졌다.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이 나를 울렸다. 



마흔이 넘으면 알게 된다. 인생 사이클이 두세 번 반복됨을. 그 때문인지 젊은 날의 설렘이 사라졌다. 나의해방일지를 보는 동안 미정이처럼 설렜다. 창희 볼 때마다 5초, 기정이 7초, 구 씨는 8초, 염미정은 볼 때마다 휘뚜르마뚜르 30초간 설렜다. 강아지 한 마리라도 나를 보며 설레게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그래 너! 너를 생각하니 그래도 한 명은 있었다 싶어 다행이다. 상처받고, 쓸쓸하고, 결핍된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끌어안으며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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