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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철 Oct 05. 2024

[단편] 검은 핸드백

재활용 센터에 가면

1. 변호사 도그 씨의 이야기


  황혼이 내려앉은 도시의 불빛은 창백하고 희미했다. 거리의 가로등도 자동차의 전조등도 희미했다. 황혼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오후 내내 도시를 이글이글 데우던 공기는 밤이 되자 온몸에 습기를 머금고 도시의 모든 것들을 눅눅하게 적셨다.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형 플라스틱 간판에 적힌 ‘세이프티 존’이 눈에 들어왔다. 이국적인 이름의 도시는 그 이름만큼 세련되었지만 이상하기도 했다. 왜 그럴까? 도시라는 곳은 대개 인간의 욕망 때문에 생겨나게 마련이지만 이 도시는 필요에 의해서 스스로 생겨 난 듯 모든 것들이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다. 건물의 외벽은 전체가 반짝이는 유리나 흰색 타일로 덮여 있고 그 자리엔 독특한 문양의 그림과 문자들이 올올이 박혀 있다. 간간히 유럽풍의 고전적인 장식을 드러내는 건물들은 이 도시를 더욱 이국적으로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 도시는 정말 살아 있는 걸까? 도시를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도시 그 자체였다. 도시는 붉고 푸르게 흘러내리는 네온을 통해서 가쁜 숨을 쉬고 하수구를 통해서 배설을 했다. 선홍색 피가 무수한 혈관을 관류하듯 모든 것들은 도시의 지하를 통해서 흘러들고 흘러나왔다. 도시는 스스로 생식하고 필요에 의해서 모든 것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도시의 맏이였다. 그리고 인간은 도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도시는 또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규칙과 규범을 만들었다. 파랑과 빨강, 그리고 노랑은 이 모든 규칙과 규범을 관장하는 근거였다. 형형색색의 규칙과 규범으로 세워진 질서, 그것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지만 도시를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에게 강요되었다. 자동차가 지나간 하얀 선위에서 시뻘건 피를 뿌리며 다리를 벌벌 떨던 고양이는 도시의 규범을 알지 못했다. 도시는 정교했다. 아귀가 척척 들어맞는 시계태엽처럼 도시는 매 순간 모든 것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하나가 고장 나면 모든 것이 일순간에 멈춰 버렸다. 시계태엽처럼 정교하지만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공간, 이성은 낮잠을 자고 본능만이 살아서 꿈틀대는 치열한 삶의 격전장, 나는 지금 그 화려한 도시의 태엽 위에 서있다.


  세이프티 존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사무실은 전면이 유리로 된 빌딩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사무실은 삼십 평이 조금 넘었고 밤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일만큼 전망이 좋다. 사무실 기기들은 은빛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최신의 성능을 지닌 제품들이다. 사무장을 포함해서 세 명의 직원이 있었고 여유가 생기면 한 명을 더 채용할 계획이다. 사무실 벽에 걸린 대형 TV에서는 표정이 없는 아나운서가 9시 뉴스를 전하고 있다.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공원의 벤치에 누워 잠을 자던 한 노숙자가 그 옆을 지나가던 강아지의 다리를 물어버린 사건을 전하고 있었다. 노숙자는 그 강아지가 자기의 빵을 훔치려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숙자의 오해였고 빵을 먹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강아지는 그 노숙자를 폭행죄로 고소할 거라고 말했다. 여자가 나를 찾아온 것은 노숙자에게 물린 강아지가 나의 사무실을 찾은 다음날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남편은 이 도시에서 제법 커다란 빌딩을 몇 채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그 남자는 도시에서 제일 큰 성형외과의 원장이기도 했다.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의 부인답게 그녀는 기품과 교양이 넘쳐흘렀고 작고 앙증맞은 입술에서 조 분 조 분 나오는 말들은 애교가 철철 넘쳐흘렀다. 살짝 브리지를 넣은 찰랑찰랑한 생머리는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어깨에 걸쳐져 있는 줄무늬 핸드백은 다이아몬드라도 박힌 듯 반짝거리며 광채가 났다. 



  하지만 지금 나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불안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첫마디는 무척이나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남편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편이 고소한 것은 여자의 검은 핸드백이었다. 나는 한동안 귀를 의심했다. 사무실 직원들조차도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한 눈빛으로 여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토씨하나도 틀리지 않은 채 또박또박 ‘남편이 제 검/은/핸/드/백을 고소했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돈을 구걸하거나 행패를 부렸으므로 나는 여자의 말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지만 단호하게 사무장을 불렀다. 사무장도 그런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여자를 일으켜 세우며 장난은 다른 데 가서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문 쪽으로 떼밀었다. 하지만 체격이 건장한 사무장의 완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막무가내였고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직원들은 며칠 후에 있을 강아지 관련 재판 때문에 서류를 작성하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여자는 사무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러다가도 직원들을 붙잡고 열 군데도 넘는 곳을 돌아다녔다면서 자신의 사건을 꼭 좀 맡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사무장이 여자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며 나를 찾았다. 나는 여자를 떼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그녀의 사정을 들어 보기로 했다.


2. 사라진 아이쉐도우


  “갑자기 아이쉐도우가 사라졌어요. 아이라이너는 물론이고 마스카라도 함께 사라져 버렸어요. 평소에 건망증이 좀 있는 편이라 처음엔 그것들을 어디에다 두고서 잃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최근에 너무 자주 반복되는 거예요. 정말 이상했어요. 병원에도 수차례 다녀 보았지만 치매기나 기억 상실증 같은 이상은 없었어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냈어요. 아주 우연찮게요. 범인은 바로 제가 들고 다니던 검은 핸드백이었어요. 메이드 인 프랑스예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명품이지요. 지난번에 남편이 선물로 사다준 거예요. 제가 명품을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그날 저녁 무렵 동창회 모임 때문에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자동차 키를 두고 나오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었죠.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검은 핸드백이 제 보석함을 반쯤 삼키고 있지 뭐예요. 검은 핸드백, 아니 이젠 놈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 뒤부터 놈은 방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어요. 마치 블랙홀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놈은 제 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때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남편은 저를 아예 미친 사람 취급을 하고 이웃 사람들도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검은 핸드백은 제가 보는데서만 물건을 집어삼켰거든요. 참, 제 자동차가 흰색 메르세데스 벤츠라고 말했던가요?”


  나는 여자의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거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동화책을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보이면서 여자의 전직이 성우나 동화 구연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판타지 소설 같은 여자의 이야기는 그동안 바쁜 도시적 일상 때문에 감춰져 있던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시키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모처럼 있는 아내와의 저녁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자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이 남았는지 그 조그맣고 앙증맞은 입술을 끊임없이 조분 거렸다. 나는 되도록이면 여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을 끊은 다음 그녀에게 평소에 안면이 있던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주면서 조심스럽게 정신 감정을 받아 볼 것을 권유했다. 그녀는 몹시 실망한 듯했지만 그다지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내가 건네주는 명함을 받았고 여전히 당당하고 기품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이쯤에서 여자와의 인연이 마무리될 거라고 여겼었다. 일상은 다시 나에게 도시적 평온함을 되돌려 주었다. 하지만 노숙자에게 물린 강아지 사건에 대한 이차 공판이 열리던 날 여자는 예의 그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다시 나를 찾아왔다. 사무장이 그녀를 제지했지만 나는 그녀를 사무실로 들어오도록 했다.


  “처음엔 핸드백이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크기였죠. 외출할 때마다 항상 저를 뿌듯하게 해 주던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검은 핸드백은 마치 걸신들린 돼지처럼 리모컨, CD, LP판, 그리고 DVD를 차례로 삼켜 버렸어요. 스위스제 시계도 사라져 버렸어요. 아홉 시 정각을 가리키던 시계가 아홉 시 일 분이 되자 가방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거예요. 게다가 그 핸드백은 물건을 삼킬 때마다 점점 커졌어요. 점점 두려워졌어요. 핸드백이 저마저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괴물 같은 놈, 아니 괴물 같은 핸드백. 저는 더 이상 집에서 소중한 물건들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궁리 끝에 검은 핸드백을 대형 쓰레기 봉지에 구겨 넣고서 아파트 쓰레기장에 던져 넣었죠. 힘세고 우직한 반달곰이 그 가방을 청소차에 던져 넣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는 겨우 안심을 할 수 있었어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 방의 반이 비었더군요. 하지만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저는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어요. 놈이 배시시 웃으며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 있었거든요. 핸드백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어느 순간부터 눈으로 보이더라고요. 신경이 예민해진 탓 일거예요. 그리고는 화장대가 보이지 않았어요. 화장대만 한 크기의 모든 물건들이 제 방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이제 제 방에 남은 거라곤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대형 벽걸이 텔레비전 하나예요. 말도 안 된다고 여기시겠지만 분명 사실이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다음 일전에 소개해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느냐고 물었다. 물론 ‘아니요’라는 대답을 예상한 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라고 대답함으로써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의사는 잠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상한 그림카드를 보여주며 질문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의사로부터 자신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소견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늙다리 염소 의사가 분명히 뭔가 착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씩이나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 대는 여자를 정상이라고 판단하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늙다리 염소는 싱싱하고 씹기 좋은 풀만 밝히고 힘만 무식하게 셌지 도무지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돌팔이였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백번 양보를 해서 지금까지 여자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도대체가 그녀의 남편이 여자의 검은 핸드백을 고소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왜 부인의 핸드백을 고소한 거죠?”

  “그이도 피해자거든요.”

  “네?”

  “그이의 물건을 삼키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왜 부인이 먼저 고소하지 않으셨나요?”

  “전 명품을 아주 좋아해요.”

  "처음엔 버리고 싶어 하셨잖아요?”

  “새 걸 사면되니까요.”

  “무슨?”

  “그게 인간적이잖아요.”


  도무지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여자와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사실 그이도 처음엔 변호사님처럼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텅 비어있는 방을 보여줘도 남편은 오히려 그 비싼 물건들을 어디다 버렸느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죠. 하긴, 남편이 그럴 만도 해요. 제가 금방 싫증을 내는 타입이라 예전엔 종종 그런 짓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한동안 얌전하던 검은 핸드백이 조금씩 꾸물거리기 시작하더니 남편의 방을 기웃거리는 거예요. 처음엔 넥타이였어요. 남편이 출근을 하려다 깜짝 놀라서 저를 불렀어요. 장롱 속에 있어야 할 넥타이가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는 거예요. 특히 이태리제 물방울무늬 넥타이는 남편이 무척 아끼던 거였어요. 저는 단번에 검은 핸드백을 의심했죠. 아니나 다를까, 가방 주위에 사파이어가 박힌 넥타이핀이 떨어져 있지 뭐예요. 그다음부턴 말해 무엇하겠어요.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남편도 자꾸만 자기가 아끼던 물건이 사라지자 검은 핸드백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그때쯤부터였어요. 조금씩 커지던 핸드백이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던 때가. 그이도 처음엔 잃어버린 물건을 핸드백 속에서 꺼내려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었어요. 아무리 자크를 열려고 해 봐도 소용이 없자 날카로운 칼로 북북 긁어 대기도 하고 가위로 찢어 보기도 했어요. 제가 소용없을 거라고 아무리 말려도 그이는 막무가내였죠. 더럭 겁이 났어요. 저러다가 검은 핸드백이 남편마저 삼켜 버리는 아닐까 하고요.” 


3. 수의를 입은 고양이.


  여자가 이야기를 끝내고 사무실을 나간 것은 퇴근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사무실에 앉아서 그녀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무실을 나가면서까지도 꼭 검은 핸드백의 변론을 맡아달라고 사정했다. 여자의 이야기로 복잡해진 머리를 겨우 정리하며 퇴근을 하려고 옷을 갈아입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캐츠 씨였다. 그는 나와 사법 연수원 동기생이었다. 그는 연수원 시절에 동기생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했었는데 인간들보다 성적이 우수한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의 쫑긋한 귀와 솜이불같이 보송보송한 털, 그리고 그의 독특한 복장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연수원 시절 모의 법정이 열릴 때면 항상 노란색 수의를 입고 나타났다. 게다가 수료 직후 변호사를 하리라던 우리의 예상을 깨고 그는 강력부 검사를 자원했고 지금은 이 도시를 관할하는 강력부 부장 검사가 되어있었다. 그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의 굵은 목소리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지금도 노란색 수의를 입나?”

  “물론이지.”


  캐츠 씨는 여전히 노란색 수의를 입었다. 생선가시를 권했지만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배가 고프다며 먹을 것이 없냐고 물었다. 마침 냉장고에는 생쥐 허벅다리를 다져서 만든 샌드위치가 몇 조각 있었다. 보졸레 산 적포도주와 함께 생쥐 허벅다리 샐러드를 내밀었다. 캐츠 씨는 삽시간에 샌드위치 서너 조각을 집어삼키더니 목이 메는 듯 적포도주를 연거푸 두 잔이나 들이켰다.


  “자네의 생쥐 허벅다리 샐러드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


  꺼억 거리며 너스레를 쏟아놓던 캐츠 씨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최근에 들어온 황당한 사건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상한 의뢰인을 만났어.”

  “그래?”

  “성형외과 의사라고 하더군.”


  나는 방금 전에 나간 여자의 남편이 떠올랐다.


  “그런데?”


  “글쎄, 그치가 자기 아내의 핸드백을 고소하겠다는 거야. 메이드 인 프랑스. 색깔은 검은색이고 꽤나 명품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그 핸드백이 얼마 전부터 자신이 아끼던 물건들을 모조리 집어삼킨다나 어쩐다나. 처음엔 남자가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지. 미치지 않고서야 검사인 나한테 어떻게 그런 소릴 지껄이겠어. 그치는 나를 찾아오기 전에도 이미 몇 군데를 들렀던 모양인지 무척 지쳐 있더라고. 하지만 형사들이 모두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바람에 검사인 나한테 바로 왔다는 거야.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지. 하긴 누가 그런 정신 나간 이야기를 몇 시간씩이나 죽치고 앉아서 들어주겠어.”


  “......”


  캐츠 씨의 이야기는 내가 여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상당히 흡사했다. 정황상 캐츠 씨의 의뢰인은 여자의 남편일 가능성이 높았다. 자기 아내의 핸드백을 고소하고 또 자신의 핸드백을 변호하려고 하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여하간 캐츠 씨도 나처럼 처음엔 남자에게 정신 상담을 받아 보라고 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 남자도 지극히 정상으로 밝혀졌지만 말이다. 남자의 정신 상담을 그 늙다리 염소의사가 했는지는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여하간 남자의 끈질긴 부탁으로 캐츠 씨는 그 검은 핸드백의 범죄 현장을 직접 확인하러 남자의 집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남자의 말이 사실이더라고.”


  캐츠 씨의 말에 따르면 여자가 말한 검은 핸드백은 실제로 그녀의 집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괴상한 핸드백은 여자의 남편이 직접 고소를 해야 할 정도로 집안에서 기이한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캐츠 씨가 남자의 방에 막 들어설 때 검은 핸드백은 최신형 노트북을 집어삼키던 중이었다고 했다. 캐츠 씨는 더럭 겁이 났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먹성 좋은 검은 핸드백이 아직까지는 살아 있는 것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검은 핸드백을 향해 짖어대고 있는 래브라도산 골든 레트리버의 존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여자가 그랬듯이 남자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자 그 핸드백을 청소차에 버려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칼로 잘근잘근 찢어발긴 채 근처 야산에 묻어 버리기까지 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다음날이면 그 검은 핸드백은 여지없이 자신의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그나마 이제는 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해져서 옴짝 달싹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그들 부부의 집안에서 무사한 곳이라곤 부엌과 욕실뿐이었다.


4. 빨간 우체통이야기


  세이프티 존은 이따금씩 지루함을 느꼈고 그때마다 인간들과의 소통을 원했다. 도시는 자신의 지루함을 풀어줄 소통의 매개체가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세이프티 존은 도시의 모든 곳에 CCTV를 설치했고 모든 것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감정적 교류나 대화가 없는 일방적인 관음에 지나지 않았다. 세이프티 존은 다른 매개체를 갈망했고 마침내 그가 선택한 것은 빨간 우체통이었다. 세이프티 존은 도심의 곳곳에 우체통을 설치했다. 캐츠 씨의 사무실에도 조그마한 우체통이 하나 놓여 있다. 식별 번호는 3번. 그 우체통은 전면이 빨간색, 하얀 글씨를 제외하면 다른 색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상하지? 세이프티 존의 모든 우체통은 빨간색, 모든 정보가 흘러들고 흘러나오는 빨강우체통이다. 근데 왜 우체통은 모두 빨간색인 거지? 언젠가 한번 캐츠 씨에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캐츠 씨는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그럼 우체부는 왜 거북이일까?”

  “.......”

  “인간들에게 물어봐. 도시가 만들었으니까. 인간은 도시의 맏이니까.”


  정말 그럴까? 짧은 커트 머리가 매력적인 피자 가게의 여직원은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이피클을 집어던지고 치즈가루를 뿌렸다. 흰 모자와 파란 제복, 그리고 은빛 호루라기가 잘 어울리는 교통순경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우체국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아뿔싸! 허스키한 음성의 우체국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빨강은 강렬하다고. 강렬한 것은 뭐든 눈에 잘 띄는 거라고. 눈에 잘 띄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딴은 그랬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처럼 색맹인 강아지들은 어쩌란 말이지? 고양이, 염소, 그리고 제 얼굴에 맞는 안경테 하나 없는 나무 경비병들의 초점 없는 눈알들은 어쩌라고? 세이브 존은, 안전지대, 모두에게 유익해야 하는 공공의 장소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건 숫제 얼굴은 납작하고 머리는 검은 인간만을 위한 발상이 아니던가? 나는 그때서야 13번 우체통이 파란 이유를 알았다. 우리는 파란색을 좋아하니까. 색깔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들은 파란색을 좋아하니까. 영악한 도시와 인간들은 우리들이 분노하거나 폭발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둔 것이다. 모두 파랑으로 바꿔 버려야지. 하지만 도시는 여전히 빨간색 우체통을 고집했다. 도시의 장자는 인간들이고 그들 말처럼 빨강은 강렬하니까. 누구나 그 빨강 우체통을 열고 밤새워 쓴 편지나 엽서를 집어넣었을 테니까. 그것은 열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관계와 소통의 매개체로서 순수와 낭만, 그리고 담백한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던 빨강 우체통은 속도와 최신 기술에 밀려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편지는 엽서로 엽서는 전화로 전화는 문자와 이메일로 소통의 수단을 바꿔나갔다. 이제 빨강 우체통은 각종 세금과 카드 명세서만을 위한 비루한 공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인간들이 백화점에서 쏟아낸 무수한 욕망의 찌꺼기만을 담아내는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소통의 방식이 다양해 진만큼 우체통은 소용이 없어졌지만 도시는 여전히 인간들과의 소통을 원하며 곳곳에 빨강 우체통을 설치했다. 오늘도 청거북이는 인간들의 무수한 욕망을 어깨에 둘러 맨 채 울툭불툭한 보도블록을 터벅터벅 걷고 있다.


5. 배내옷을 입은 강아지.


  그 후로도 여자의 방문은 계속 이어졌다. 여자가 찾아올 때마다 검은 핸드백의 범죄 행각은 더욱 다양하고 화려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캠코더까지 동원해서 나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었다. 네모난 화면 속엔 거대한 검은 물체가 여자의 방으로 보이는 장소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그 검은 물체는 이따금씩 마치 트림을 하듯 그 거대한 몸체를 좌우로 꾸물거렸다. 여자의 남편도 그 이후로 계속 캐츠 씨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서 너 건의 사건 의뢰가 더 들어왔지만 사무장이 처리할 정도의 경미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노숙자에게 물린 강아지 사건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결심 공판이 열리던 날 재판부는 인간은 강아지에게 광견병을 옮기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며 노숙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강아지는 징역 6개월과 집행 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인간에게 물린 강아지가 지독스러운 탐욕증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재판부 구성도 강아지와는 대대로 앙숙 관계인 고양이였다는 사실도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강아지가 패소한 결정적이 이유는 노숙자가 그랬던 거처럼 강아지는 재판부에게 도시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던 생선가게의 참다랑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바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실의에 빠진 채 상고를 포기하겠다는 강아지를 다시 한번 설득했다. 조카뻘쯤 되는 앳된 얼굴의 강아지는 목을 축 늘어뜨린 채 슬픈 눈빛으로 힘들지만 다시 한번 도전해 보겠다며 용기를 내었다. 여자는 포기라는 것을 몰랐다. 그녀의 끊임없는 애원 때문인지 나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캐츠 씨로부터 정식으로 검은 핸드백 소송 사건을 수사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캐츠 씨가 사건을 맡기로 한 이상 나도 더 이상 여자의 의뢰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나는 옷장에서 오래전에 입던 배내옷을 꺼내 세탁소에 맡겼다. 연수원 시절 모의 법정에서 캐츠 씨와 설전을 벌일 땐 나도 항상 배내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뱃살이 좀 늘어난 탓에 몸에 맞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다행히 못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6. 검은 핸드백 법정에 서다


  세이프티존은 이따금씩 재채기를 동반한 감기 몸살을 앓았다. 가끔씩 콧물도 흘렸다. 그럴 때면 도시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강 위의 다리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를 달리던 버스가 뒤집힌 채 물속으로 뽀로록 거리며 가라앉았다. 빗물에 푸석푸석해진 건물은 물기 먹은 소금자루처럼 흐물흐물 지상으로 녹아내렸다. 도시가 깊은 슬픔에 잠기면 하늘은 비를 내리고 도시의 자식들은 물속에 잠겼다. 도시가 분노하면 지하철이 화염에 휩싸이고 지하도는 우물 속의 게으른 어둠처럼 죽음의 연기를 몽실몽실 피워 올렸다. 옛날부터 도시는 그랬다. 우리가 다 아는 것들을 똑똑한 척하는 인간들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잊을만하면 도시는 인간들이 망각하고 있던 모습들을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런 경험을 한 인간들이 도시에 대형 검은 핸드백 하나가 나타났다고 해서 크게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을 것이다. 검은 핸드백을 법정에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문제는 검은 핸드백을 법원으로 옮기는 방법이었다. 거대한 핸드백을 무슨 수로 담장 밖으로 끌어내지? 이미 집안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 검은 핸드백은 비대 해질 대로 비대해져서 그 상태로는 도저히 좁은 현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설사 빠져나온다고 해도 법정까지 운반하는 것도 문제였다. 저명한 토목공학과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의 자문은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그냥 허무세요.’ 해머와 포클레인, 그리고 굴삭기를 동원해서 멀쩡한 콘크리트 벽을 허물었다. 우려와는 달리 검은 핸드백은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 나왔다. 일반 크레인으로는 핸드백이 들려지지가 않아 아파트를 건설할 때 쓰이는 타워 크레인을 불렀다. 핸드백을 싣자마자 5톤짜리 트럭의 타이어가 펑하고 터졌다. 11톤이 넘는 대형 트럭을 불렀다. 거대한 핸드백을 실은 트럭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육중한 탱크 수십 대가 지나간 듯 도로가 푹푹 주저 않았다. 차가 지나가는 근처의 집들은 거대한 굉음 때문에 우지직거리며 창문에 금이 갔다. 난생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을 보며 거리의 구경꾼들은, 인간이 아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앙앙 거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법원에 도착해서도 문제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좁은 현관문으로는 거대한 핸드백을 집어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법원입구에서부터 재판이 열리는 104호 까지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틀을 기다린 후에야 처음의 사각에서 아치형으로 넓힌 문을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재판이 처음 열리던 날의 상황은 대강 이랬다. 높은 연단에 놓인 세 개의 의자엔 중앙을 제외한 채 두 명의 재판관이 각양각색의 몸짓과 표정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왼쪽엔 겨드랑이 쪽으로 지푸라기가 쑤욱 삐져나온 허수아비가 하품을 하며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고 오른쪽엔 관절 마디마디에 굵은 실을 매단 꼭두각시 인형이 팔과 다리와 목을 까딱 거리며 부스스 졸린 눈으로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었을 것 같은 허수아비는 매 재판마다 딱 부러지는 논리로 모든 이들을 놀래 키곤 했으므로 이 희한한 소송 사건의 재판관으로 선임되었다.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던 꼭두각시 인형이 내리는 판결 또한 허수아비 못지않게 공정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하지만 본 사건을 주관할 재판관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십 여분을 더 기다리자 문이 열리더니 눈동자는 파랗고 머리는 갈색인 사람 형상의 나무토막 한 개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피노키오 13세였다. 솔로몬 13세의 조카라는 소문이 나돌던 재판관이었다. 국적과 인종이 다른 피노키오와 솔로몬의 가문이 어떤 인척 관계로 맺어졌을 확률은 거의 없을 테지만 저 나무토막이 그만큼 공명정대한 판결을 내려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무토막이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소송의 당사자인 검은 핸드백은 법원의 맨 가운데 자리에 묵직하니 놓여 있었다. 그 뒤쪽으로 검사와 변호사의 자리가 있었고 그다음 줄부턴 관람석의 자리였다. 갈대 옷을 입은 관람객들은 대부분 인간들이었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대형 출입문엔 경비원 둘이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는데 그들 역시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었다. 캐츠 C의 옆에 남자가 앉아있었고 내 옆에는 여자가 앉아있었다. 둘 다 법정은 처음인지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백 여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관람석 자리는 한 자리도 비어 있지 않았다.


7. 캐츠씨와의 팽팽한 설전


  피노키오 13세의 코는 소문만큼 길지 않았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캐츠씨의 거뭇하고 촉촉한 코보다도 조금 높다고나 할까? 그의 코는 왜 정상일까? 그의 공정함은 저 납작한 코에서 오는 것일까? 그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흩어지거나 불의로 기울 경우 마치 거짓말 탐지기처럼 기다랗게 늘어나서 그의 양심을 되돌려 놓을지도 모른다. 나의 궁금증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캐츠 C는 준비해 온 자료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피노키오 13세가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오동나무의 가장 얇실한 가지에서 튕겨져 나온듯한 나무토막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본 사건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했다. 재판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질의를 시작할 캐츠씨는 그의 말처럼 노란색 수의를 입고 있었다. 피노키오 13세가 피고를 호명하고 증인석에 앉기를 명했다.


  “재판장님, 아시다시피 피고는 단순한 핸드백일 뿐 살아있는 생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말을 하거나 보거나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요?”

  “대리인으로 피의자의 주인인 여자를 신청합니다.”


  순간 얌전하게 앉아 있던 검은 핸드백이 꾸물거렸다. 피노키오 13세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콧잔등에 내려앉은 안경을 지그시 누르며 허락했다.


  “인정합니다.”

  “피고의 핸드백은 지난 4월 3일 아침 8시경 어디에 있었습니까?”

  “방에 있었습니다.”

  “8시 15분경 남편 방에 들어갔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선 장롱 문을 열고 넥타이를 삼켰죠?”

  “잘 모르겠습니다.”

  “예, 아니오로만 답하세요.”

  “아닙니다.”


  그 뒤로도 캐츠씨의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묵묵히 자리에 앉은 채 ‘모르겠다.’ 거나 ‘아니오.’라는 답으로만 일관했다. 그녀는 사전에 연습을 한 대로 아주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이어서 나의 차례가 되었고 증인석엔 검은 핸드백을 고소한 남편이 앉았다. 


  “맨 처음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입니까?”

  “넥타이입니다.”

  “삼키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최근에 없어진 물건은 무엇입니까?”

  “노트북입니다.”

  “직접 목격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럼 지금 원고는 뚜렷한 물증도 없이 검은 핸드백이 원고의 물건을 삼켰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내가 계속 그렇게 말해 왔기 때문에.....”

  “좋습니다.”


  남자는 긴장을 했는지 목소리가 떨렸고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원고는 지난 4월 2일 어디에 있었나요?”

  “세미나 때문에 인근 도시로 갔었습니다.”

  “혹시 그곳이 OO모텔이 아니었나요?”

  “........”

  “이의 있습니다. 변호인은 지금 본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 뒤로도 한 시간이 넘도록 질의와 답변이 이어졌지만 캐츠씨도 나도 재판에서 확실한 우위를 잡지 못한 채 그동안 검은 핸드백이 삼켰던 부부의 물건들만 밝혀졌다. 놀라운 사실은 여자가 이미 자랑삼아 늘어놓기는 했었지만 이 검은 핸드백이 삼킨 물건들이 하나같이 고가수입품에다가 명품 중에서도 명품이었다는 것이다. 목록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관람석에 앉은 갈대 옷을 입은 인간들은 수도 없이 탄성을 질러댔다.


8. 도시를 점령한 검은 핸드백.


  첫 번째 재판은 비교적 무난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검은 핸드백의 문제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것도 아주 창조적으로 나타나서 캐츠씨와 나를 괴롭혔다. 힘겹게 법원까지 옮겨온 육중한 검은 핸드백을 다시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노키오 13세는 꼭두각시 인형과 상의를 하더니, 허수아비는 삐져나온 지푸라기를 겨드랑이에다 집어넣느라 여념이 없었으므로, 법원 안마당에 대형 천막을 세우고 검은 핸드백을 넣은 다음 체격이 건장하고 무술이 뛰어난 나무토막 경비병 둘을 세워 다음 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키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역시 그들은 현명한 재판관이었다. 그 즉시 법원 안마당에 대형 천막이 세워졌고 반나절이 넘는 공사 끝에 검은 핸드백은 그곳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그날 저녁 우려했던 일은, 이를테면 검은 핸드백이 지퍼를 열고 무언가를 삼키려 드는 행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재판을 며칠 앞두고 놈의 기이한 행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놈의 짓거리는 이전보다도 더 대담하고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은 천막 앞에서 성실하게 근무를 서던 경비병이었다. 밤새 경비를 서고 있던 나무토막이 졸음을 깨기 위해서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 사이 놈이 한 입에 삼켜 버린 것이었다. 다른 경비병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쳐버렸다. 천막을 걷어 버린 검은 핸드백은 이제 법원의 담장을 허물려고 했다. 놈의 목표는 법원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캐츠 C와 나는 비로소 놈의 치밀한 계략을 깨닫고서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스스로 몸을 들어 바깥을 나올 수 없었던 놈은 남자의 계획을 알고도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남자의 집에는 더 이상 삼킬 것이 없었으므로 놈은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놈을 도와준 셈이었다. 게다가 노숙자와 강아지 사건도 쉽게 해결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날 저녁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그들을 마주 앉혔지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노숙자와 강아지는 서로를 적의에 찬 시선으로 노려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아지가 내세운 조건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노숙자는 인간이 어떻게 강아지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냐며 사과를 거부했고 강아지 또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려던 나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검은 핸드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법원의 담장을 넘어간 후 놈은 더 이상 무언가를 삼키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도시 전역을 관할하는 버스회사의 한 운전기사였다. 그는 자신이 몰던 버스의 정해진 노선을 무시하고 이상한 곳으로 버스를 몰고 다녔다. 멈춰야 할 곳은 지나쳐 버리고 지나쳐야 할 곳은 멈춰 서서 거의 반나절이 넘도록 움직이질 않았던 것이다. 승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곳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운전기사가 버스를 마지막으로 세운 곳은 도시의 맨 외곽에 위치한 자동차 폐차장이었다. 택시 운전사들도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캐츠 C가 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그를 데려다준 곳은 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난지도’였다면서 어리둥절해했다. 그의 말은 곧 사실로 확인되었다.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택시를 탔는데 그가 나를 데려다준 곳은 엉뚱하게도 ‘도시라트.’라는 이름의 넓은 광장이었다. 도시에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동물들 간에 갈등이 생길 때면 종종 집회장소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놈은 이제 그 거대한 지퍼를 도시를 향해 열어 인간들의 의식마저 삼키려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놈은 이제 우리의 기억마저 지배하려 들고 있어요.”  

  “증거가 있나요?”

  “놈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도시가 엉망이 되었다고요.”

  “증거가 있나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도 모르시나요?”

  “그건 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검은 핸드백이 있어야 할 자리는 움푹 파인 채 비어 있었다. 놈은 지금 광장 옆의 대형 백화점에 있었다. 그 백화점의 이름 또한 ‘세이프티 존’이었다. 그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대부분 명품들이었고 그만큼 비쌌다. 재판은 검은 핸드백 없이 궐석 상태로 진행되었다. 캐츠씨와 나의 설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검은 핸드백은 도시를 위협하는 범법자임이 분명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여자가 고용한 변호사였으므로 놈을 변호해야 했다. 여자는 여전히 검은 핸드백의 변론을 원하고 있었다. 캐츠씨는 더욱 강한 어조로 검은 핸드백의 범죄 행각을 조목조목 집어가며 유죄를 강조했다. 나 또한 놈의 행위가 비상식적이고 도시에서 물리적으로 해악이 되는 행위를 하고 있지만 현재의 법으로는 그것을 제제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강조하며 놈의 무죄를 강조했다. 피노키오 13세는 재판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허수아비와 호두까기 인형도 마찬가지였다. 캐츠씨와 나만이 검은 핸드백의 유/무죄를 놓고서 설전을 벌였다.


9. 피노키오 13세의 결정.


  상급 법원에 상고를 한 강아지는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 내내 알코올에 취해 있던 노숙자는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며 강아지에게 개 껌 다섯 박스를 건네며 화해의 악수를 청했고 마음씨 착한 강아지는 흔쾌히 노숙자의 화해 신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 핸드백 사건은 세이프티 존의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다. 놈은 지금 수많은 경비병들에게 둘러싸인 채 시계탑 밑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직원이 법원에서 온 편지를 전해 주었다. 이틀 후에 최종 선고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무실을 나와 공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비가 내려앉은 도시의 저녁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만들었지만 음울하고 눅눅하기도 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지상에 깔린 안개는 도시 전체를 삼켰다. 그 자욱한 안개로 가려진 도시는 흡사 모든 것이 가방으로 변해 버린 듯 모든 것이 닫혀 있었다. 하긴 공중전화박스와 대형 빌딩과 자동차는 투명하고 들고 다니지 못하고 도로를 굴러간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무엇인가가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가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가방에는 물건이 들어가고 빌딩과 자동차엔 인간이 들어가는 것 정도가 다를 뿐이다. 거대한 도시, 거대한 가방, 세이프티 존. 이 도시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세이프티 존은 무한한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그들의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되면 도시는 숨이 막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온갖 한탄과 욕설과 비방과 쓰레기를 무한정 생산해 내는 인간들에게 도시는 감사해야 한다. 어쩌면 ‘세이프티 존’의 모든 것들을 쓸어 담고도 허기에 지친 나머지 시계탑을 오르고 있는 저 검은 핸드백은 절제된 인간 욕망의 무수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화수분처럼 저 거대한 핸드백은 도시를 향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검은 핸드백이 광장의 시계탑을 삼켜 버린 시각은 일곱 시였다. 그리고 그 시각 법원에서는 마침내 검은 핸드백의 최후 판결이 내려졌다. 피노키오 13세는 익숙한 표정과 몸짓으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 관계의 대상이 무엇이든 모든 것들은 길들여짐으로써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은 편리함이 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도시에 길들여져 있다. 익숙해진 도시는 빠르고 편리하다. 빠르지만 조급하고 편리하지만 복잡하다. 도시의 편리함에 무감각해진 우리는 그 반대의 것들에도 둔감해져야 한다. 슬프지만 미소를 짓고 울고 싶지만 환호성을 지르며 쓰러져 자고 싶지만 일어나서 달려야 한다. 그것이 세이프티존에서의 올바른 삶이다. 그런 우리들 앞에 검은 핸드백이 나타났다. 처음엔 낯설음이었다. 낯선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덧 저 검은 핸드백에게도 길들여져 가고 있다. 익숙함이 되어 버린 검은 핸드백의 기이한 행동은 더 이상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재판관이 판결문을 읽는 동안 장내의 분위기는 숙연했고 엄숙했다.


  “도시는 필요에 의해서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동시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은 검은 핸드백도 도시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제 검은 핸드백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만들어낸 세이프티존 밖에 없다. 핸드백은 다시 도시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이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오는 도시의 하수구를 통해서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을 삼킨 핸드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도시의 하수구로 녹아들어 결국엔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자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침울해졌다. 캐츠씨와 남자 또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장내가 술렁거렸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끝-


-등장인물-


남자 : 성형외과 원장, 학원 원장.

여자 : 부동산 개발업자의 부인

캐츠씨 : 수의를 입은 고양이

도그씨 : 배내옷을 입은 강아지.

재판관 1 : 허수아비

재판관 2 : 꼭두각시 인형

재판관 3 : 피노키오 13세

배심원들 : 갈대 옷을 입은 인간들

경비병 : 오동나무 인형

염소의사

사무실 직원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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