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늘어지게 하품이 나오도록 심심하시거나 무료하시나요? 아니면 무언가를 정신없이 읽고 싶으신가요? 그렇다고요? 그렇다면 정말 잘 됐군요. 저는 지금 아무나 붙잡고 미치도록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요. 이를테면 재활용 센터에 가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 싶어요. 재활용 센터라고요? 그래요. 재활용 센터. 냉장고나 텔레비전 같은 중고제품을 사고파는 곳이지요. 임산부와 노약자 그리고 심장이 약한 분들은 제 이야기를 듣기 전에 미리 말씀해 주세요. 왜냐고요? 그곳은 마치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처럼 여러분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렇다고 바이킹이나 자이로드롭을 탈 때처럼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사양합니다. 환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 사실과 다르잖아요. 그냥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이 환상이 주는 놀라움과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되는 거죠. 살짝 미소를 짓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그전에 약간의 상황 설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렇다면 누가 좋을까요? 일단 한 명 만 초대하기로 하죠. 그는 이십 대 후반의 남자이고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어요. 대기업은 아니지만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인터넷 관련 IT기업의 전문 프로그래머죠. 그는 주말이면 회사 동료들과 함께 제법 물살이 센 강에서 래프팅을 하거나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전형적인 신세대예요. 그의 취미를 호기심과 모험심이 강한 사람으로 설정한 이유가 뭐냐고요? 저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호기심이 많다고요? 하지만 실망하실 필요는 없어요. 대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거든요. 그럼 그 남자가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이상한 가게를 들어가게 되는 과정부터 살펴볼까요?
어느 날 남자가 퇴근을 하고 집에 와보니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텔레비전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남자는 출근하기 전에 전원 버튼만 한 번 눌렀을 뿐인데 말이죠. 집 근처 어딘가에 내리친 번개 때문에 텔레비전의 중요한 부품 하나가 타버렸나 봐요. 그날은 몹시 비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까지 몰아 쳤거든요. 남자는 잠을 설쳐 가면서까지 어떻게든 텔레비전을 고쳐 보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남자는 텔레비전이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가 없는 텔레비전 마니아였죠. 당신도 그렇다고요? 우리 모두가 그렇잖아요. 어쨌든 남자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구입한 지 3년 이상 된 텔레비전은 미리 바꾸는 것이 좋겠군요. 여하간 남자는 다음날 회사 출근도 미룬 채 수리기사를 부르죠. 하지만 수리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는 사실에 남자는 깜짝 놀라죠. 한동안 고민하던 남자는 결국 중고 텔레비전을 구입하기로 해요. 아예 최신 기능이 내장된 63인치 HD 텔레비전을 사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요즘 남자의 지갑은 가벼웠고 게다가 신용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거든요. 땀을 뻘뻘 흘리며 동네의 중고 가게들을 둘러보던 남자는 마음에 드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낙담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죠. 그렇게 맥이 빠진 채 터벅터벅 걸어오던 남자는 집 근처에서 특이한 이름의 재활용 센터를 발견하죠. 남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을 하며 그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그 가게 이름이 ‘환상의 문’ 일거라는 사실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1. 환상의 문으로 들어서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오늘 이곳을 방문하신 첫 번째 분이시군요. 오늘은 한 명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던 참이었거든요. 장사를 하다 보면 그런 날들이 있지요. 들어오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밖에서 보시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요? 대부분의 손님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답니다. 생각보다 넓다고요? 그래요. 이곳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내부가 무척 넓어요. 족히 삼백 평은 넘을 거예요. 개미도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바닥은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천연 대리석으로 깔았어요. 좀 망설이긴 했지만 벽과 천장도 같은 재료를 사용했답니다. 천장 중앙에 매달린 샹델리에는 또 어떻고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지 않나요? 주위를 천천히 돌아보세요. 금빛으로 반짝이는 아치형의 문이 원통형의 대리석 기둥에 하나씩 달려있죠. 이곳의 기둥이 모두 서른 두 개니까 문은 모두 해서 서른세 개가 되겠군요. 네? 중고 텔레비전을 사러 오셨다고요. 이런, 정말 죄송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만 저 혼자서만 신나게 떠들었군요. 손님이 찾으시는 텔레비전은 김치냉장고와 청소기 코너 바로 옆에 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물건이 있을지 염려가 되는군요. 어쨌든 한 번 둘러보세요. 그쪽으로 가시면 얼굴도 예쁘장하고 마음씨는 더욱 예쁜 여직원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새 고르셨군요. 이 제품이 마음에 드신다고요. 정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제품을 보시는 안목도 뛰어나시군요. 출시된 지 1년도 안 된 제품이거든요. 게다가 이 제품을 만든 회사는 지금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는 회사잖아요. 결제는 무엇으로 하실 건가요? 아! 현금으로 하시겠다고요. 저희야 당연히 현금이 좋지요. 그렇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군요. 물건은 마음에 드는데 가격이 문제라니.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좋습니다. 그 가격으로 해드리지요. 오늘 저희 가게를 찾아주신 첫 손님인데 비싸게 받을 수는 없잖아요. 배달도 되냐고요? 주소만 알려주시면 저희 가게 직원이 설치까지 해드릴 겁니다. 이곳에 사인 하시고 주소만 정확히 적어주세요.
제품을 포장하는 동안 구경 좀 하시겠다고요? 얼마든지요. 그런데 좀 이상하시다고요? 상품 우측 상단에 붙은 메모지를 말씀하시는군요. 각각의 메모지엔 제품을 처음 구입하신 주인의 이름과 제품과 관련된 추억이 적혀 있어요. 그러니까 저희는 제품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과 관련된 추억도 함께 판매하는 셈이지요. 저희 가게만의 독특한 차별화 전략이지요. 손님들도 상당히 흥미로워하셨어요. 저기 맨 구석에 있는 텔레비전은 이십 대 여성의 것인데 사연이 좀 특이하죠.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아니 분노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군요. 그 여자의 사연이 궁금하시다고요? 손님은 호기심이 무척 강하시군요. 그럼 간단히 말씀드리죠. 저 텔레비전은 군에서 제대한 남자 친구에게 사준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여자는 직장을 다녔고 남자는 복학생이었어요. 여자는 돈이 있었고 남자는 돈이 없었다는 뜻이죠. 하지만 남자를 너무나 사랑한 여자는 남자의 자취 생활이 편하도록 세탁기며 냉장고 등을 할부로 사주었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남자의 자취방을 찾아가서 청소도 해주고 서투른 솜씨지만 정성껏 반찬도 만들어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 남자의 자취방에 찾아간 여자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죠. 더욱 기가 막힌 건 잔뜩 겁에 질린 여자가 바로 그녀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는 점이었죠. 여자의 기분이 어땠겠어요. 게다가 그녀는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과격파거든요. 하지만 여자는 그날 의외로 침착했어요. 단지 화장실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 와서 연놈에게 퍼부은 다음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어 그동안 남자에게 갖다 바친 전자 제품을 몽땅 쓸어 담았죠. 그리고 곧장 저희 가게로 달려온 거예요. 그동안 남자에게 줬던 용돈까지 받아 냈다고 하더군요. 어때요? 궁금함이 조금은 풀리셨나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2. 두 번째 문
아, 아직도 계시는 군요. 혹시 뭐가 더 필요하시나요? 지금 어디를 보고 계시는 거죠? 두 번째 문을 보고 계시는군요. 저곳을 알고 싶으신 건가요? 사용하지 않는 문이냐고요? 맞아요. 필요한 경우 외에는 잘 열지 않아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을지도 몰라요.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열려 본 적이 없거든요. 궁금해하시는 것도 당연하죠. 이곳을 찾은 다른 손님들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거기까지였어요. 사실은 이곳 직원들도 잘 모른답니다. 저요? 그래도 명색이 이 매장 수석 관리자인데 당연히 알고 있지요. 저곳엔 좀 특별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거든요. 뭐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일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대형 거울이 마주 보고 있을 거예요. 그것은 다른 문도 마찬가지예요. 두 개의 거울 사이에 텔레비전이 하나 놓여 있죠. 뭐랄까? 고전적 스타일의 네모난 갈색 수상기. 왜 있잖아요. 어릴 적에 만지면 고장 난다고 어른들이 브라운관 앞에 열고 닫을 수 있는 창문에 자물쇠를 잠가 놓았잖아요. 전원을 눌러도 한참 달궈진 다음에 화면이 나오는 진공관 텔레비전. 아시겠죠? 바로 그거랍니다. 볼록 튀어나온 브라운관 오른쪽에는 많은 작동 버튼이 붙어 있어요.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나는 로터리 버튼도 재미있었지요. 그 위에는 V자 모양의 안테나가 달려 있죠. 하지만 요즘엔 이런 구식 텔레비전은 박물관이나 가야지 볼 수 있죠. 이런, 제가 또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네요. 잠시 어릴 적 향수에 젖어서. 지금은 단지 지지직거릴 뿐이지만 문이 열리고 조금만 기다리면 화면 속에서 뭔가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그 거울 속에는 또 다른 거울과 텔레비전이 들어 있어요. 거울들이 서로를 끝없이 비추는 셈이죠. 거울은 그 속에 나타나는 형상들도 끝없이 보여주고 있어요. 그 형상들이란? 이를테면 살아 있는 것들.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들이죠. 재활용 센터에 살아 있는 애완동물이라니 조금 놀라셨을 거예요. 게다가 그들은 인간들과도 상당히 친숙하고 게다가 유명하기까지 하거든요. 이를테면 도널드 덕이나, 미키마우스, 톰과 제리 같은 동물들이죠. 몸 전체가 파란색인 스머프도 있어요, 저길 보세요. 아즈라엘과 가가멜이 파파스머프를 쫓고 있군요. 가가멜과 아즈라엘은 숨을 씩씩거리며 인상을 쓰고 있고 파파스머프는 도망을 다니면서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네요. 기타를 치고 있는 아기공룡 둘리도 있군요. 다른 것들은 없냐고요? 이런, 좀 당황이 되는군요. 사실은 그런 질문을 해주기를 바랐어요. 인간을 말하는 거냐고요? 저런, 설령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을지라도 제발 놀라지는 마세요. 저 문을 열기도 전에 저는 눈물을 머금고 당신을 돌려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선 놀라움과 탄성과 기쁨 같은 감정은 가장 금기시되거든요. 그냥 조용히 둘러보거나 듣기만 하는 것이 무난하지요. 이제 문이 열릴 시간이 되었군요.
3. 최초의 고양이
다섯 번째 문으로 들어오셨군요. 이곳은 저희 가게에 있는 서른세 개의 문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곳이죠. 인류 최초의 고양이가 탄생된 곳이니까요. 뭐가 보이시나요? 에덴동산 같은 것이 보이신다고요. 그렇다면 에덴동산은 아담과 이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리고 또 뭐가 보이나요? 진흙이 보인다고요? 당연하지요. 아담이 그랬듯이 고양이도 원래 흙이었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어디선가 두 개 의 손이 나타나서 진흙을 빚기 시작할 거예요. 보세요. 허공이 꿈틀거리잖아요. 드디어 왼손이 나타났군요. 오른손도 보이죠. 말랑말랑하던 진흙에 물이 부어지고 있군요. 물을 머금은 진흙이 묽게 게워지고 있어요. 진흙 속에서 퐁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오는군요. 마치 솜씨 좋은 요리사가 환상적인 손놀림으로 파이를 굽는 것 같지 않나요? 진흙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가 납작해졌다가 길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어요. 호호호, 저걸 보세요. 이번엔 다시 뭉툭해졌어요. 고양이의 창조주는 대단한 요리사이기도 한가 봐요? 그분이 진흙으로 반죽을 만들고 있어요. 진흙으로 파이를 굽고 있어요. 물론 그 파이의 결과물은 최초의 고양이가 될 거고요. 몸통이 만들어지고 팔과 다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만들어지는군요. 저는 창조주가 먼저 고양이의 머리를 빛은 다음 그 외의 것들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셨다고요. 이런, 고양이의 창조주는 우리의 허를 찌르는 센스도 지녔군요. 바벨탑을 무너뜨리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참 친근한 존재로 느껴졌을 텐데 말이죠. 이젠 고양이의 형상이 거의 완성되었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날씨도 별로 덥지도 않은데 진흙이 흘러내리고 있어요. 마치 눈사람이 녹아내리듯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아주 천천히. 하긴 그래요. 인류 최초의 고양이인데 창조주가 그렇게 쉽게 만들지는 않았겠지요. 진흙 고양이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군요.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던 아담의 눈물 같지 않나요? 진흙은 앞으로도 서너 번은 더 흘러내릴 거예요. 그리고 나면 창조주는 마침내 완성된 진흙 고양이의 코에 숨을 불어넣을 거예요.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탄생과정도 지켜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둘러봐야 할 곳이 많군요.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창조주가 이브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의 갈비뼈를 빼낼 때 그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번엔 저쪽으로 가볼까요!
4. 행복의 근원
일곱 번째 문이 열리는군요. 들어가 보시겠어요?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잘 모르시겠다고요? 불행한 것 같기도 하다고요. 그렇다면 이곳에 아주 잘 오신 거예요. 그 이유를 알 수 있거든요. 행복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붙잡은 사람에게는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죠. 게다가 그 행운이 물질과 명예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기쁨은 더욱더 크겠죠. 사랑이라고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당신은 어쩌면 물질화된 세상의 마지막 낭만주의자 같군요. 과연 그럴까요? 저 문안에는 수정처럼 맑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물체가 하나 놓여 있어요. 그런데 저 물체의 원래 형상이 궁금해지는군요. 처음엔 둥그런 형태였다가 타원형이었다가 삼각형이었다가 다시 둥그런 형태로 변하고 있어요. 한데 그 물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저것은 또 뭘까요? 마치 죄인을 가두고 있는 철창처럼 촘촘한 흙빛 선들이 신비한 물체를 가두고 있군요. 신기하죠? 저 선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촘촘해졌다가 느슨해졌다가 아예 단단한 철판 같은 것이 되어 버리네요. 그럼 도대체 저 선 안에 있는 신비한 물체의 정체는 뭘까요? 행복의 근원, 인간의 모든 행복이 바로 저 물체로부터 비롯되지요. 이제 아시겠어요? 인간이 항상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그것은 바로 행복의 근원을 감싸고 있는 빌어먹을 검은 선들 때문이지요. 저 선들이 틈을 내어주지 않으면 행복은 결코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행복을 느낀다고 말씀하시겠죠. 그렇긴 해요. 행복하다는 것은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인간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죠. 길을 가다 오천 원을 줍고 행복해하셨나요? 비둘기를 쫓아다니는 강아지를 보고 아주 잠깐이라도 미소를 지으셨나요? 연인과의 화창한 주말 데이트는 어떨까요? 그들은 서로 아! 지금 나는 너무도 행복하여라. 행복하고 행복하고 또 행복하여라,라고 외쳐 부를지도 모르죠. 그럴 때면 행복은 미칠 듯이 나가고 싶어 하지만 선들은 더욱 촘촘해지죠. 어쩌다가 한 번씩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의 비명을 들은 선이 틈을 보이면 그때서야 비로소 행복의 빛이 세상 나들이를 하는 거예요. 혹시라도 슬프다면 지금 당장 비명을 질러 보세요. 혹시라도 당신에게도 행복의 빛이 스며들지도 모르잖아요.
5. 다리미의 용도
3과 2분의 1, 저 문에 적힌 숫자는 상당히 특이하군요. 3도 아니고 4도 아닌 3과 2분의 1이라니. 어쩌면 저곳은 저도 알지 못하는 뭐가 있을 것 같군요. 조금 겁이 난다고요? 그래도 들어가실 거잖아요. 자신이 젊다고 생각하세요? 젊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당신은 방금 약을 떠올렸을 테지요. 하지만 저는 약이라면 이가 갈려요. 저도 예전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온갖 종류의 약을 가지고 다녔거든요. 살 빠지는 약, 살찌는 약, 우울할 때 먹는 약, 슬플 때 먹는 약, 심지어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때 먹는 약도 있었지요. 그중에 가장 압권은 젊어지는 약이었어요. 모처럼 휴일이라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말쑥한 차림의 아리따운 여자분이 초인종을 누르더군요. 초인종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지요. 처음 보는 순간 너무나 눈이 부셔서 그대로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니까요. 제가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오더니 돋보기처럼 생긴 이상한 기계를 들이대면서 제 얼굴과 팔과 다리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피부가 심하게 노화되었다고 한참 겁을 주었지요. 그런 다음에 하얀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젊어지는 약이라면서 저에게 권하는 거예요. 아시잖아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을 사게 된다는 사실을. 마침 저도 그날 거울을 보며 푹 파인 다크 서클과 늘어진 주름살을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뭐라고요? 제가 그 약의 효과를 본 것 같다고요. 그렇게 보이시나요?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 약 때문이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약이라면 이가 갈린다고. 당신은 보기보다 기억력이 떨어지는군요. 비난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이곳에선 굳이 젊어지는 약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아요. 항상 그렇듯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약이란 이가 흔들리거나 얼굴이 붓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 언제나 부작용이 따르거든요. 저도 그랬어요. 다리미, 다리미 하나만 있으면 족해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파놓은 젊음의 샘에서 담아온 물을 물뿌리개로 주욱 주욱 늘어진 살갗에 뿌린 다음,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잘 버무린 쇳물을 차가운 바람으로 식혀서 만든 다리미로 아주 부드럽게 천천히 밀어 대기만 하면 되는 거죠. 혹시라도 살갗이 녹아내릴 거라는 염려는 아지 마세요. 이 다리미는 뜨겁지 않거든요. 오히려 동상에 걸릴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영하의 온도에서 작동이 되는 제품이에요. 파워 코드가 없다고요? 당연하지요. 이 다리미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나약함과 비정함, 그리고 냉정 함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존속하는 한은 그것이 닿아 없어질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요. 효과에도 유통기한이 있냐고요? 물론 있죠.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상품도 있나요? 특히나 중고품을 파는 가게에서 유통기한을 묻는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 아닌가요? 그렇지만 이런 말을 해주고 싶군요. 누가 그런 멋진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일만 년으로 해 달라고 말이죠. 멋진 말이긴 하지만 그 남자 좀 오버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일천 년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당신의 육체는 당신의 기억보다 더 오래 젊음을 유지할 거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요.
6. 뜸이 들지 않는 밥솥
아홉 번째 문이 열리는군요. 저 문에는 또 뭐가 있을까요? 다리미 말고도 이 가게엔 이상한 물건들이 구석구석에 많이 숨어 있거든요. 사실은 저도 아직 모르는 물건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쫓겨 날 위기도 몇 번 있었죠. 왜냐고요? 그러한 것들이 한 번씩 튀어나올 때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으니까요. 이젠 아시겠죠? 이곳의 금기 사항을. 하지만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있죠. 전기밥솥. 매일 밥을 해 먹는 전기밥솥이 하나 놓여 있을 거예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밥솥 타령이냐고요? 들어보세요. 보통 밥솥과는 다르거든요. 지난겨울 폭설이 내리고 지독한 찬바람이 몰아치던 날이었어요. 그날 아침에 안경을 지그시 눌러쓴 늙수구레한 호랑이 한 마리가 저희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며칠 전에 사간 전기밥솥을 반품하겠다고 하더군요. 직원 중 한 명이 당황스러운 듯 밥솥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왜 반품을 하느냐고 물어봤었죠. 그런데 그 호랑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도대체가 전원을 켠 다음 쌀을 씻어 넣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뜸이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뚜껑을 열어보면 갓 부화된 병아리들이 먹이를 달라고 주둥아리를 내밀며 삐약 삐약 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청거북이 한 마리가 들어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검은 강아지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기도 했대요.
나중에는 전기밥솥이 점점 부풀더니 바삭바삭한 과자나 부드러운 빵이 되어 버리더라는 거예요. 물론 물에 부푼 생쌀은 그대로 인 채 말이죠. 그래서 지금껏 배고픈 호랑이는 빵이 되어 버린 전기밥솥을 조금씩 뜯어먹고살았다고 하더군요. 믿을 수 있겠어요? 육식을 즐기는 호랑이가 쪼그려 앉아서 아삭아삭 빵이 되어버린 전기밥솥을 씹어 먹는 모습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 모습이 되어버리는 전기밥솥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전기밥솥이 진열된 선반에 먹음직스러운 카스텔라나 바케트 빵이 놓여있고 빵가게에는 전기밥솥이 놓여 있는 모습을. 그래서 할 수 없이 반품을 받아주었어요. 저기 보이는 커다랗고 먹음직스러운 크로와상이 바로 그 전기밥솥이랍니다. 그 사이에 배고픈 누군가가 또 생쌀을 집어넣었나 보군요.
7. 집이 열리는 나무
그 옆에는 열다섯 번째 문이 있군요. 번호가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다고요? 그렇죠? 원래대로라면 열 번째 문이 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지금 저곳에 문이 있다는 거죠. 그 문 안엔 지금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어요. 이제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보통 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맞아요? 그런 나무들은 여기 말고도 세상에 널렸으니까요. 집이 열리는 나무예요. 세상의 나무들이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새싹을 틔우고 달콤한 열매를 맺듯이 집이 열리는 나무도 열매를 맺어요. 다만 그 열매가 과일이나 견과류가 아니라, 우리들의 안락한 휴식 공간이라는 점이죠. 그럼 나무가 엄청 클 것 같다고요? 그렇지도 않아요. 열매가 다 자라면 사과보다는 조금 더 클 것 같군요. 그렇게 작은 집에 사람이 어떻게 들어가 사냐고요? 하긴 그래요. 사람이 그만큼 작아지지 않는 이상은 힘들겠죠.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집이 알맞게 열리면 그것을 따다가 땅에 심기만 하면 되거든요. 거기다 생명력은 사막의 선인장이나 들판의 잡초보다도 질겨서 한 번 심어 놓고 물만 충분히 주면 돼요. 그 물이란 것이 좀 색다르긴 해요. 집 없는 서민들의 회환과 부동산 투기꾼들의 욕망을 반반씩 섞어서 도시의 하수구에다 잘 풀어 넣은 거거든요. 그러면 집이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거든요. 나무에 따라서 아파트가 열리기도 하고 빌라가 열리기도 하고 단독주택이 열리기도 해요. 그런데 당신은 보기보다는 참을성이 많군요. 왜 그런 말을 하냐고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를 내고 뛰쳐나가버리거든요. 당신은 정말 호기심이 강한 분이에요. 어쨌든 계속하자면, 한 번에 여러 가지 집이 열리는 나무도 있어요.
나무에도 층이 있다면 일층에는 반지하가 이층에는 단독주택이 삼층에는 빌라가 그리고 맨 꼭대기에선 정원이 딸린 아파트가 열리죠. 가끔가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사람들이 종종 집을 사러 오고는 해요. 글쎄, 미국이나 캐나다, 그리고 호주 같은 외국에서도 손님들이 온다니까요. 게다가 몇 달 전에는 저 나무는 아주 황당한 경험을 했어요. 글쎄 누군가가 밤중에 몰래 들어와서는 저 나무를 뿌리 채 뽑아서 가져가 버린 거예요. 서울 한 복판의 금싸라기 땅에 아파트를 서른 채도 넘게 가지고 있던 한 부동산 투기꾼의 짓이었지요. 그렇지만 나무는 그냥 평범한 과일만을 맺었을 뿐이에요. 가져가기만 했지 가꾸는 법을 몰랐거든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뱃속을 가른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어떻게 다시 돌아왔냐고요? 저희 가게 직원이 시내의 대형 백화점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던 걸 발견했어요. 제자리를 찾은 나무는 다시 주렁주렁 집이 매달리고 있어요. 특이한 것은 외국 손님들은 주로 단독 주택이나 대저택을 사는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를 좋아하더군요. 하긴 그것을 탓할 수만은 없지요. 외국인들이야 워낙에 땅이 넓은 나라니 집을 사다가 아무 곳에나 심으면 되지만 우리는 아무리 좋은 주택을 사더라도 그것을 심을 땅이 없잖아요. 설령 땅이 있더라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허다하니 한 곳에 여러 세대가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선호하는 거죠. 그럼 이제 다른 곳을 좀 더 둘러볼까요?
8. 예술가들
어디선가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악이 들리지 않나요? 맞아요. 저토록 감미로운 멜로디라면 틀림없이 비틀스의 노래일 거예요. 저기 열한 번째 문에서 들려오는군요. 저기 저곳이라면 호기심이 가득한 당신의 커다란 눈망울이 더욱 커질 만한 곳이지요. 저곳은 인류의 삶에 긍정적 기여를 했던 유명한 문인이나 예술가, 그리고 사상가들을 한데 모아놓은 장소예요. 이제는 존재 자체가 역사가 되어버린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유명인들. 모차르트, 괴테, 엘비스 프레슬리,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그리고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어요. 그들과 악수도 나눌 수도 있고 말을 걸어 볼 수도 있어요. 우리는 그들을 단순히 책이나 그림 속에서만 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살았던 시간의 한 부분을 떼어다가 이곳에 옮겨 놓았어요. 말하자면 종합 선물세트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왜 한 부분밖에 없냐고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들의 삶 전부를 가져다 놓기엔 이곳의 재정이 충분하지 못하거든요. 아무리 값을 깎아 달라고 사정을 해도 머리가 두 개이고 심장은 세 개 인 개형 상의 문지기가 말을 듣지를 않는 거예요. 글쎄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고 있던 헤밍웨이를 데리고 오는 데만도 보통사람들 백 명과 바꿔야 했다니까요. 이곳의 지불 수단은 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바꾸는 물물 교환이거든요. 사람이 바로 돈인 셈이지요. 조지 오웰은 어떻고요. 아무튼 저는 그를 데려 오려고 별별 짓을 다 했다니까요. 그것도 동물농장을 집필하고 나서 오후의 한 때를 즐기던 시간만을 가져오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가 쓴 소설 덕을 톡톡히 보기는 했어요. 그의 책을 읽은 개형 상의 문지기가 사람 대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동물과 교환을 원하는 거예요. 우리로서는 뜻밖의 횡재를 한 셈이에요. 우리는 그를 단지 돼지 몇 마리와 맞바꾸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조지 오웰로서는 다소 기분이 나빴을 것 같기도 해요. 그 옆에는 턱수염이 얼굴을 거의 뒤덮은 사람이 화난 표정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군요. 세기의 미소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예요. 한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지금 무척 화가 난 것 같군요. 그런데 이상하죠!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이질 않으니 말이에요. 네? 혹시 다빈치가 아니냐고요? 호호호, 제가 착각을 했군요. 가끔가다 그런 실수를 하기도 해요. 특히나 외국 사람들 이름은 더욱 그렇죠. 어쨌든 지금 디카프리오 다빈치는... 네? 그것도 이상하다고요? 이런 당신은 호기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집요하기까지 하군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요? 그래요 알았어요. 하긴 이름이 중요하긴 해요. 사실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에요.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항상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모나리자가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의 실패작 중 한 점을 가져다가 모나리자의 미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놓았죠. 그가 정작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은 고뇌하는 모나리자의 모습이었어요. 그녀의 남편이 스물다섯 살 연하의 정부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거든요. 그는 지금 화난 모나리자를 그리고 있는 중이에요.
9. 보통사람들
이곳은 보통사람들의 방이에요. 저기 거울 안쪽으로 비치는 텔레비전을 보세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이곳에서는 농부와 어부와 광부들과 회사원들과 그 밖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죠. 다른 곳보다 훨씬 넓어 보인다고 말하셨나요? 당연하지요. 왜냐하면 저들은 모두 평범하잖아요. 평범하다는 것은 무수히 많다는 것을 뜻하잖아요? 많다는 것은 무가치하거나 별로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그들이 원해서 이곳에 왔냐고요? 글쎄요. 하지만 이곳이 가장 넓기는 해요. 저의 할아버지도 계시냐고요? 할아버지는 평범한 어부셨어요. 그런데 어부라는 직업이 평범한 건가요? 농부는, 광부는, 회사원은 평범한가요? 사람들이 모두 평범하다고 하니까 저도 그렇게 말하기는 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튼 제가 어렸을 때 말이에요. 저희 마을 뒤쪽으로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었거든요. 우리는 종종 그 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숨바꼭질도 하고 야구도 하고 그랬어요. 여름에는 근처 과수원에서 풋풋한 사과나 떫은 감을 따먹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 번은 비가 한 달도 넘게 마을에다 퍼부었던 적이 있었어요. 산이 저를 찾아주지 않는다고 삐쳤던지 마을을 향해 돌을 던지더군요. 그 전날에 비가 심하게 와서 산이 신경질이 났었나 봐요. 다행히 돌덩어리들은 마을이 아닌 저희 집 화장실만 습격을 했죠. 마침 그곳에서 볼일을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돌들의 습격을 받고 한동안 시름시름 앓으셨어요. 나중에는 밤중에 우리가 잠든 사이 일어나셔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셨어요. 돌들이 무너져 내린 산으로 올라갔다는 사람도 있었고 풍랑이 이는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어요. 뿌연 안개 사이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아무튼 그 뒤로 저희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어요. 할아버지는 어부셨어요. 어부는 평범한 건가요? 농부는, 광부는, 회사원은 평범한 건가요? 비가 걷히고 햇빛 쏟아지는 무더운 여름날을 상상해 보세요. 시골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어요. 뭐가 보이죠? 순박한 농부와 그의 아내가 보인다고요?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그들은 논에서 사이좋게 벼를 심고 있어요. 한가로워 보인다고요? 그들은 정말 한가로운 걸까요? 오후의 햇살 속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는 것을 한가롭다거나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텔레비전에 종종 얼굴을 비추고 좋은 일이건 그렇지 않건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만이 특별한 것인가요? 평범함과 특별함 사이에는 사람들의 의식이 있을 뿐이에요. 저는 그냥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을 하고 싶어요.
10. 과학자들
저기 저 작은 체구의 남자는 누군지 아시겠어요?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인데 잘 모르시겠다고요? 잘 생각해보세요. 그는 바로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기 일주일 전의 아인쉬타인이에요. 21세기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의 고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지 않나요? 그는 요즘 자신의 논문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고민하느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낡은 책상과 스탠드에 앉아서 턱을 괸 채 상념에 젖어 있는 모습이 흡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지 않나요? 저기 사과나무 아래에 누워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맞아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죠. 만유인력의 법칙을 모르신다고요? 세상의 모든 물건들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 크기에 따라서 끌려가고 끌려온다는 그런 이론 말이죠. 처음엔 뉴턴의 옆자리에 아인쉬타인이 있었어요. 둘 다 물리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잖아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죠. 아시다시피 위대한 사람들일수록 이해력이 부족하고 자신의 아집만 주장하려는 성향이 강하잖아요. 한 번은 책상에 앉아 있던 아인쉬타인을 뉴턴이 몰래 다가가서 넥타이로 목을 졸라 버린 적이 있었죠. 아인쉬타인 때문에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갔다는 거예요.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창피하기도 하겠죠. 상대성 이론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뒤집어 버렸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인류의 역사와 지식은 진보하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선의의 피해자도 생기기 마련이니. 기나긴 역사의 시계로 보면 뉴턴의 불운이죠. 저기 저쪽에는 쇠창살이 쳐진 창가에 앉아서 조용히 밖을 응시하는 사람이 보이는군요. 표정이 없는 것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해요.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누더기처럼 해졌어요. 보세요. 그가 하얀 분필을 손에 쥐고 흑색 칠판에다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어요. 넓은 칠판에 가득 쓰여 있는 것이 수학 공식 같기도 하고 대단한 이론 같기도 한데 도대체가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군요. 저 사람이 누구냐고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는 사람이군요. 암튼 그는 과학자인 것은 분명해요.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그렇지만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이론을 만들었을지도 몰라요. 그의 표정이 모호한 까닭은 그가 아인쉬타인이나 뉴턴처럼 유명하지 않아서 일까요? 우리가 가끔씩 그의 존재를 생각해준다면 그의 표정엔 웃음이 머물 수 있을까요?
11. 정치가들
저쪽에선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고뇌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지금 그는 탈출을 꿈꾸고 있어요.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옛 영광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거든요. 이곳에서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그의 사전엔 불가능이란 단어만 없는 것이 아니라 포기란 단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때로는 포기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폴레옹의 옆자리엔 로마에 불을 질러놓고 환호하는 네로의 모습도 보이는 군요. 로마의 장군 시저도 보이는 군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정복했노라.’ 그가 남긴 유명한 말들이죠. 그가 지금 자신이 아끼던 로마를 불태웠다고 네로의 오른쪽 뺨을 후려치고 있네요. 저기 저쪽 비쩍 마르고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는 남자는 누군지 아시겠어요? 맞아요. 노예 해방과 게티즈버그 연설로 유명한 링컨 대통령이죠. 노예 해방으로 유명한 링컨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가 단지 흑인들만을 위해서 노예를 해방시켰다고 보지는 않아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세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세금과 전쟁은 항상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그런 사실을 밝힐 필요도 없어요. 한 사건을 두고도 인간은 항상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 마련이잖아요. 역사의 어두운 면은 그대로 묻히는 것이 더 좋을 경우도 있어요. 방금 링컨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셨나요? 케네디와 윈스턴 처칠이에요. 저들은 가끔씩 만나서 포커를 치기도 하죠. 우리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집무실이 보이지 않는다고요? 가만 저쪽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저기 있군요. 그런데 다른 나라의 대통령 집무실과는 달리 참 초라하군요.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의 집무실은 조금 낫군요.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히로이토의 자리는 비어 있군요. 그들은 어딘가에서 또 다른 욕망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몰라요. 나치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 저들의 야욕은 이곳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특히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는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를 바라보는 히로이토는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군요. 그런데 가만 저기 큰 칼 옆에 찬 채 두 눈을 부릅뜨고서 저 쓸개 빠진 망상 주의자들을 노려보고 계신 분은 누구시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고요? 맞아요. 광화문 사거리에 가면 볼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이시군요. 지금 장군께서 여차하면 뎅겅 목이라도 내려 칠 기세로 저들 뒤에 서서 감시를 하고 계시는군요. 그리고 그 옆엔 황제의 명을 받은 김좌진 장군이 총을 겨누고 있어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들에게 여기까지 와서도 고생을 시킨다고요? 저희도 그 점은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12. 서른세 번째 문
이제 서른세 번째 문 앞에 와있군요. 아직 절반도 보여드리지 못했는데 아쉽군요. 다음에 와서 보시겠다고요? 그러면 저도 좋겠는데 저희 가게의 규칙상 하루가 지나기 전에 모든 곳을 돌아보아야 하거든요. 밖을 보니 어둑어둑 해지는 것이 벌써 저녁이 되었네요. 지금쯤이면 저희 직원이 텔레비전을 배달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을 들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겠죠. 왜냐고요? 잠시 후면 알게 되실 거예요. 서른세 번째 문이 열리는군요. 저곳은 거쳐 가는 문이라고도 해요. 지금 보여드린 모든 것들이 처음에는 이 문을 거쳐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이상하지 않나요? 저곳은 지금껏 봤던 문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지 않나요? 잘 모르시겠다고요? 잘 보세요. 마주 보고 있는 대형 거울이 보이질 않잖아요. 그렇죠? 단지 중앙에 대형 텔레비전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또 이상한 점이 있어요. 그렇군요. 전원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화면이 지지직거리질 않는군요. 왜 그럴까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정말 모르시겠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아주 순수하거나 아니면 바보로군요. 제가 이제껏 다리 품 팔아가며 입이 아프도록 당신에게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한 이유가 뭐겠어요. 그래요. 당신의 자리라고요. 이제야 플란더스의 개를 데려 올 수 있을 것 같군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