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정사 템플스테이 둘째 날
템플스테이 둘째 날이다.
어제까지 남겨둔 미련이나 후회는 사라져 버린 가차 없는 아침이 밝는다.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내 집 처럼 한 번도 안 깨고 푹잤다. 사위는 아직 잠에 스러져 있는 듯 소리는 낮게 깔린다. 방안의 풍경은 고즈넉하다. 격자무늬의 창살로 노란빛이 들어온다. 방 문을 열자 이름 모를 새소리가 열린 문의 틈을 비집고 들려온다. 산까치, 황조롱이가 아닐까? 배가 고프다. 아침은 제공이 안되기에 어제 슈퍼에서 산 과자와 컵라면으로 오전의 허기를 면했다.
오전 열 시부터 두 시간 동안 처사님과 명상을 할 예정이다. 귀정사에 머무는 동안 템플스테이 참여자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오늘 명상은 마음 챙김을 위한 호흡법이다. 처사님은 명상의 목적은 좋거나 싫은 것이 아닌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첫 단계가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처사님은 몸과 말과 마음 중에서 마음이 셋을 이끈다고 한다. 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단다.
처사님의 설명을 듣고 반가부좌를 한 후 눈을 감고서 호흡에 집중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로 과거와 미래의 번다함과 산사의 꾀꼬리 같은 방해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처사님은 자연스러우니 명상 중에 상념이 끼어들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란다. 그렇게 호흡을 하며 숱하게 부유하는 마음을 잡는다. 가부좌는 참을만했지만 조금 어지러웠다. 삼십 분이 넘자 발이 저린다. 조금씩 사지를 꼼지락거렸다.
명상은 과거나 미래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이 와 닿는다. 시각, 촉각, 청각에 집중하는 것. 그 처음이 호흡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하던 '카르페디엠'이 떠오르는 까닭은 왜일까?
호흡을 통해서 번뇌하는 마음을 다스린다.
'좋다' 거나 '싫다'가 아닌 마음의 평정심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을 통해 걷기나 숨 쉬기, 물 마시기 같은 일상의 행복을 깨닫고 질병과 노화, 죽음 같은 인생의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한 좌절과 분노 같은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의 성찰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명상은 기대했던 것보다 배움이 컸다. 처사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떠오르는 인물들이 몇 명 있다. 몇 년 전 성남시청에서 사회복지사 교육을 받으며 M.B.T.I(성격유형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난 INFJ 형이다. 50여 명중 딱 두 명이다. 강사는 이런 유형은 내향형, 감각형이며 주로 구도자나 예술가형에서 많이 보이며 직업은 스님이나 작가가 많다고 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스님'에서 빵 터졌다. 세상 적확하다고.
점심공양을 했다. 오늘은 죽순 무침이 맛있다. 시금칫국은 장맛이 담백했고 열무 지도 맛있다. 묵은지는 시큼했다. 콩 밥은 약간 질었지만 찰기가 넘친다.
점심 후 가까운 마트에 다녀왔다. 오늘 밤과 내일 아침의 출출함을 달래줄 참외와 컵라면, 그리고 콜라를 샀다. 메로나도 샀다. 한 잎 베어 물었다. 입안이 얼얼하고 달콤하다.
산사의 오후는 여유와 나른함이 절반쯤 뒤섞인 채 흐른다. 계곡 물을 타고 유유히, 시원스레 흘러간다. 사사삭 다람쥐 세 마리가 돌담을 타며 술래를 한다. 순둥 순둥 한 고양이는 다람쥐를 보더니 몸을 웅크린다. 산사의 맹수가 된다. 나는 꾸부정하게 앉은 채 하릴없이 흘러가는 산사의 모습을 즐긴다.
배롱나무 앞의 벤치에 앉아서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끝나는 책을 폈다. 사놓고 팽개쳐둔 지 오래다. 책도 시기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이다. 몇 페이지 못 넘긴 채 까무룩 졸음이 밀려오는데 휘리릭 바람이 볼을 때리고 앞에 있던 배롱나무 가지와 나뭇잎과 사위의 연등이 동시에 위아래로 출렁거린다.
그와 동시에 산속 어딘가에서 뻐꾸기가 호꾹 호꾹 울기를 반복하고 크고 낮은 산의 도처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휘바휘바, 꾀리릭 꾀리릭, 호롱호롱, 비시시비베베 거린다. 내가 국어책에서 배웠던 자연의 소리와는 많이 다르다. 마침 읽고 있던 이 책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책 한 권을 내고 세상을 일찍 등진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점을 찾는 순간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언어는 세계에 비춰볼 때 유한하며 무한한 자연의 소리가 말과 문자에 갇혀버리면 상상력은 사라지고 세계를 위한 표현은 그만큼 좁아지고 줄어든다.
저녁 공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침은 흘리지 않지만 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간다. 공양을 하면서 먼저 거처하던 분과 말문을 텄다. 한 달째란다. 같은 날 입소한 창원에서 왔다던 사내와는 드디어 통성명을 했다.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공통점이 많다. 대화의 주제는 보리와 산동이다. 보리는 고양이, 산동이는 개 이름이다. 공양 때마다 보는 보리는 친화력이 갑이다. 한마디로 개냥이다. 아무 때나 와서 사람들의 허벅지에 제 얼굴과 몸을 비벼댄다.
산동이는 웰시코기다. 다리가 짧다. 혓바닥과 두 귀를 나풀거리며 뛰는 게 귀엽다. 산동이는 아래에 주인과 집이 따로 있는데 사찰을 제 집처럼 돌아다니며 새로 온 사람들에게 아는 체를 한단다. 산사 입구로 내려가는데 앞서서 산동이가 충총거리며 온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헤헤거리며 마구 뛰어와서 덥석 안긴다. 반갑다며 짖어댄다. 산동아! 조금만 더 애써라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볼 수 있도록.
근데. 컥컥 인마 너, 털갈이하니?
2020년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