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는 삼겹살까지라지만....갈비찜과 잡채는 이웃을 향한 정이죠
올해도 설이 지났다. 방송과 언론에선 설과 관련된 정겨운 이야기들을 보도 한다. 하지만 이번 설도 내겐 예년과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명절이다.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정이 있어 명절을 함께 보내지 않는다. 그렇게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설날 아침을 보내고 있는데, 같은 건물 일층에 사시는 어르신이 전화를 주셨다. 아침 식사를 했냐고 물으시길래 식사 전이라고 했다. 어르신은 "갈비찜이랑 잡채 했는디 좀 먹을 텨?"라고 하셨다. 내가 주시면 감사히 먹겠다고 하니 어서 건너 오라고 하셨다.
어르신은 지난 설과 추석에도 손수 만드신 갈비찜과 호박전, 잡채를 푸짐하게 주셨다. 어르신과는 같은 세입자로 가끔 왕래를 하는 사이다. 평소에는 말벗이 되어 드리기도 하고, 집에 가구나 가전제품등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드린다. 몇 달 전엔 어르신 댁 주방 전등 스위치가 고장 나서 교체해 드렸다. 그날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옆집 어르신이 전화를 하시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총각, 지금 집에 있어?"
"네."
"큰일났네."
"왜요, 무슨 일 생기셨어요?"
"주방 전등 스위치가 꺼지질 않아. 총각이 와서 좀 봐줄 수 있어?"
어르신은 나를 총각이라고 부른다. 나이는 지천명이 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총각이다. 어르신 둘째 아들은 일을 하는 중이라 지금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어르신 댁에 가서 보니 주방쪽 전등 스위치가 딸깍거렸고 전등은 계속 켜져 있었다. 나는 어르신을 안심시켜 드리고 근처 철물점에서 새 전등 스위치를 사와서 교체해 드렸다.
고장 난 전등 스위치를 무사히 교체 하자 어르신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셨다. 어르신은 고맙다며 현관 문을 나서는 내게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오리훈제 두 팩을 건네셨다. 때마침 우리집 주방 전등 스위치도 문제가 있었다. 내친김에 우리 집 거실과 화장실 전등 스위치도 함께 교체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어르신이 주신 오리훈제를 구워 먹웠다.
이 집에는 1층 어르신뿐 아니라 지하에 사는 여성 1인 가구도 있다. 그 여성분과도 안부를 나누며 지내는데, 한번은 겨우내 얼어있던 보일러 배관(https://omn.kr/2bxr4"도와주세요" 다급한 여자 목소리에 나가보니)
이 터져 여성이 무척 당황해 하던 상황에서 응급조치를 해 준 일도 있다. 얼마 전에는 키우던 고양이에게 발톱을 할퀴어 급히 응급처치용 밴드를 빌려간 적이 있다. 전동드릴을 빌려준 적도 있다. 나도 몇차례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 큰 일은 아니지만 혼자 사는 이들에게는 순간 순간이 막막할 수 있다. 그럴 때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존재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설 전날에도 어르신 댁에서 한 시간 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 시작한 일터에서 찬바람을 쐬며 일을 하다가 독감에 걸려서 일주일간 고생했다는 이야기, 그 일터에서 처음 본 사람이 내 외모를 지적해서 그뒤로 상종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 누군가 내 자동차 뒷범퍼를 긁고 도망을 갔는데 범인을 잡지 못해서 속상해 하다가 자부담으로 수리했다는 이야기 등 어르신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주인 내외분도 세입자도 모두 좋은 분들이다. 가족은 아니지만 도울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지내고 있다. 이 동네에서 삼십년, 이 집에서만 전세로 8년 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사는 곳을 달동네라고 부른다. 달동네라는 표현이 그리 달갑진 않지만 언덕이 높기에 달과 가장 가까운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난해 성남시 1인가구 회원들 11명과 함께 펴낸 에세이집을 집주인과 세입자 분들에게 한권씩 드렸다. 그 뒤로 주인 내외분이 나를 볼 때마다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작가라는 호칭이 조금은 민망하지만 집주인과 세입자를 떠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개인 사정으로 지난해부터 명절을 홀로 보낸다. 그 뒤로 명절이 되면 마음 한편이 조금 허하고 쓸쓸하다. 그런데 이번 설날은 어르신이 주신 갈비찜과 호박전, 잡채 덕분이지 조금 덜 쓸쓸하다. 호의는 삼겹살까지만이라는 말이 있다. 갈비찜도 마찬가지다. 어른신은 품이 많이 들어갔을 갈비찜도 주셨다.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고 배가 부르면 행복하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어도 서로의 일상을 살피며 챙겨주는 이웃이 있다. 이렇게 또 명절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