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원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압니다, 알지만...

일부의 잘못으로 다수가 느껴야 하는 사회적 피로감

by 김인철


며칠 전, 잘 사용하던 전기면도기가 고장 났다. 전원 버튼이 불량이다. 가격이 꽤 나가는 브랜드 제품이다 보니 새로 구입하기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매일 면도를 해야 하기에 해당 브랜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면 상담원에게 연결되기 전까지 상당히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상담원과 연결되기 전 반드시 들어야 하는 멘트가 있다.



IE003589537_STD.jpg ▲상담사고객센터 상담사 ⓒ PIXABAY


"상담원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폭언과 욕설은 삼가 주십시오. 통화 내용은 녹취될 수 있습니다."


해당 브랜드 고객센터도 상담원과 연결되기 전 예상했던 멘트가 흘러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소비자가 자신이 구매상품에 문제가 생기면 A/S를 받을 권리가 있듯이 고객센터 상담원도 소비자에게 폭언이나 욕설, 성희롱 등에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 민원인은 자신의 민원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상담원에게 폭언, 욕설 등은 범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고객센터 상담원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상담원과 연결이 제대로 안 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왜 처리가 되지 않는지 항의를 한 적은 있다. 물론 내 기준이기에 불편을 느낀 상담원도 있을 것이다. 상담 결과 면도기는 보증기간이 지나서 수리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갈 상황이다. 고심 끝에 A/S를 포기하고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번엔 상담원과 빠르게 연결된 편이다. A/S건으로 고객센터 상담원과 상담을 하다 보니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2023년 정주리 감독이 연출한 영화 '다음 소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통신사 콜센터의 현장실습생인 소희(김시은 분)의 비극적인 사연을 다룬다. 고등학생으로 상담원 실습생이 된 소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상담 고객의 폭언과 욕설에 시달린다. 회사에서 정한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팀장에게 질책을 당한다. 회사도 학교도 감추고 참으라고만 한다. 결국 시은은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한다.


현실도 영화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현실이 영화보다 더 비극인 경우도 많다. 고객센터 상담원을 향한 폭언과 욕설, 성희롱은 잘못을 넘어 범죄행위다. 상담원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성격 파탄자나 이상한 사람일까? 그들은 왜 상담원에게 폭언과 욕설을 할까? 그들도 처음엔 나처럼 사용하던 제품이 고장 나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다수가 느끼는 피로감


상담원들이 받는 고통에 충분히 공감한다. 익명성을 이용한 폭언이나 욕설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화를 하기 전부터 '폭언과 욕설을 하지 말라'는 경고성 멘트를 듣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한 나도 폭언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한 경고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고객센터에 전화를 할 때마다 이런 멘트를 들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는 사람들 중 폭언이나 욕설을 퍼붓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극단적 폭언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일부가 반복적으로 폭언과 욕설을 한다. 일부의 잘못으로 대다수 선량한 민원인들이 고객센터에 전화를 할때마다 듣고 싶지 않은 멘트를 듣는다. 소수의 잘못 때문에 선량한 다수가 집단적인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견뎌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공식적인 전국 통계는 많지 않지만, 콜센터 사례를 보면 폭언 민원은 전체 상담에서 극히 일부다. 서울시 120다산콜센터의 경우 하루 약 3만5000건의 상담 가운데 폭언이나 협박 등 악성 민원은 2~3건 수준으로 보고된 바 있다. 비율로 환산하면 0.01% 안팎이다. 상담원들이 폭언을 경험하는 현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전체 민원인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A.I상담 VS 인간 상담원


고객센터에 문의를 할 때 드는 불편함은 또 있다. 상담사와 연결되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 과거에는 전화를 걸고 버튼 한두 번만 누른 후 기다리면 상담원과 바로 연결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담원과 연결 되기까지 짧게는 수분에서 길게는 수십 분이 걸린다. 특히 고객센터에 AI 상담이 도입되고 나서는 단계가 더 복잡해졌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담원과 연결이 되면 다행이다. 기다리다 중간에 끊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담사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 라는 친절한 경고성 멘트를 듣고 긴 대기 시간까지 감내해야 한다. 상담사와 통화하면 몇 마디면 해결될 민원도 이런식으로 몇 단계를 거쳐야 한다. 상담원들은 AI 챗봇이나 음성봇을 거치면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도 '불만 콜'로 변한다고 한다.


AICC 도입, 만족도는?


최근 많은 기업과 공공기관이 AICC(인공지능 컨택센터)를 도입하고 있다. 통신사, 카드사, 공공기관 고객센터까지 AI 상담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라는 명분이 있다. 그러나 상담을 받기 위해 회원가입을 요구하거나 앱 설치를 유도하는 절차는 이용자에게 또 다른 피로감을 안겨준다.


AI 상담이 이용자들의 만족도를 높였는지도 의문이다. 지난 1월 22일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인간 상담사와 AICC 중 선호하는 상담 주체를 묻는 질문에 87.5%가 사람을 선택했다. AICC 상담에 만족했다고 답한 집단에서도 68.9%는 인간 상담사를 선호했다. AICC 확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0.7%로 과반을 넘었고, 동의한다는 응답은 19.4%에 그쳤다. 콜센터 상담사들 역시 AICC 도입 이후 노동 여건이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AI 상담원 도입이 인간 상담원들의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와 달리 오히려 상담원의 일자리를 줄이고 이용자의 피로를 확대 생산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한다. 실제로 일부 기업의 고객센터에서는 AI 상담 도입 이후 민원인들의 불만이 더 늘고 그 불만이 인간 상담사에게 전가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집단적 피로 언제까지?


고객센터 상담원의 인권 침해와 시민들이 느끼는 집단적 피로감은 언뜻 서로 충돌하는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갈등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은 실적 중심 운영과 비용 절감에 몰두하고, 그 부담은 상담원에게 전가된다. 한편 고객들은 복잡한 ARS와 긴 대기 시간 속에서 짜증과 분노를 쌓아 간다.


그렇게 쌓인 분노는 결국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상담원에게 향한다. 고객센터 상담원을 향한 폭언과 욕설, 성희롱은 분명 근절 되고 보호받아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 해결 방식이 선량한 다수의 시민들까지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방향이어야 하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고객센터에 전화를 할 때마다 이런 집단적 피로감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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