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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때문에...'뮤직비디오를 찍다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연말은 항상 숨이 차다. 12월엔 '씨앗과 열매' 발표회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했고 1월에 열린 성지연 '가족 문화제'엔 2학년이 주축이 된 댄스 팀이 공연에 참가했다. 오케스트라는 의무방어였다. 하지만 가족문화제에 참가한 댄스 동아리 팀의 공연은 의외였다. 귀가시간과 청소문제로 매번 갈등이 있었기에 예상치 못한 그들의 댄스 실력에 깜짝 놀랐다. 공연을 펼친 아이들도 무척 들떠 있었다. 두 행사는 전초전이다. 다음 달에는 푸른 학교 문화제가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문화제 기획단장이란 묵직한 감투까지 달았다. 중등부를 맡고 있다는 핑계로 몇 년째 스텝으로만 참여했는데 더 이상 도망갈 핑계가 없었다. 첫 번 째 문화제 기획단 회의를 진행했다. 이번 문화제, 무엇을 하지? 어린이날 행사나 여름 캠프 등 굵직굵직한 행사를 앞두고 늘 하는 고민이지만 일 년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푸른 학교 문화제는 마치 '종합 선물세트' 랄까? 두 차례 기획단 회의를 진행 하면서 문화제를 위한 키워드 몇 개를 선정했다. 꿈, 자유, 성장, 세련됨!


"이번엔 푸른 학교 일 년 나기를 뮤직비디오 형식의 립덥 영상으로 찍어 보면 어떨까?"

"립덥이라고요, 그게 뭐죠?"

"곡을 하나 선정해서 립 씽크를 하면서 편집 없이 한 번에 찍는 뮤직비디오라네요."


처음엔 '립덥'이란 단어조차도 몰랐다. 새로 푸른 학교 대표가 된 신** 선생님이 유튜브에 이런 영상도 있다면서 스마트폰으로 한번 보여준 게 다였다. 별생각 없이 영상 몇 개를 봤는데 신선했다. 내친김에 유튜브를 검색해보니 기업체와 고등학교 여고생들이 만든 립덥 영상들이 많았다. 기발한 아이디어도 많았다.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 재미. 나에겐 이게 중요하다. 연말을 지나 연초 까지. 나! 요즘 너무 재미없게 살았으니까. 부러우면 지듯이 재미있으면 이기는 거다. 까짓 거 해보지 뭐! 하다가 안 되면 말고.



이런 심정으로 우선 신흥동 푸른학교 아이들과 연습 촬영을 해보았다. 방학이라 연습 시간도 충분했다. 아이들에겐 충분히 재미있는 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 설레임. 뭐가 됐든. 장비도 없이 스마트폰 하나로 좁은 공간에서 일 년간 했던 활동 중에서 주요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동선을 짜고 NG를 거듭하며 수차례 찍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아이들도 한두 번 찍고 나더니 꽤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지만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런데 내 안에 꿈틀대는 또 다른 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푸른 학교 문화제 영상도 이렇게 찍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 재밌다. 재미있으면 뭐든 이기는 거다.



기획단 회의에서 문화제 한 꼭지로 립덥을 찍자는 제안을 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그게 가능할까?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였기에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인권, 캠프, 재난, 심리운동, 동아리, 친환경 급식 등 동별로 일 년 나기 활동 내용을 정했다. 그렇지만 장비와 촬영이 문제였다. 촬영공간도 정해야 했다. 수전증이 동반될 가능성이 다분한 스마트폰으로 담기엔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열심히 전화기 버튼을 두드렸다. 노크 한번 했는데 정자 청소년 수련관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쪽 영상 미디어 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립덥영상 리허설 당일이 되었다. 촬영지는 금광동 푸른학교다. 준비는 모두 끝냈다. 딱 하나만 빼고. 자신감. 불안했다. 잘할 수 있을까? 괜히 일만 벌여 놓은 것 아닐까? 처음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했는데, 재미없으면 지는 건데. 나도 아이들도 푸른 학교 선생님도 모두 지는 건데. 촬영 시간이 가까울수록 부담이 밀려왔다. 리허설 촬영 직전까지도 동선이나 영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 어쩌지. 생각이 나질 않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종이 한 장을 펴 들고 선생님들과 함께 입구부터 계단 현관 주방, 교실, 거실, 다시 교실로 동선을 짰다.


"그러지 말고 일단 한번 찍어보죠."

"그래요. 찍고 나면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겠죠."


리허설 촬영은 두 시간이 넘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처음이다 보니 실수 연발이었다. 그날 휴대용 스피커에 연결된 스마트폰은 컴패션 밴드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스무 번이 넘게 재생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지만 재미는 불안을 잠식한다. 그래 바로 이거야. 가능할 것 같아. 영혼을 잠식하던 불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촬영 내내 나는 흥분과 재미를 느꼈다. 다른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니 몇 명은 얼떨떨하고 몇 명은 바쁘고 또 몇 명은 정신없어 보였다. 선생님들의 표정에서 재미가 묻어나지 않았다. 나만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아니겠지. 그건 반칙이니까. 그렇게 리허설 촬영은 정신없는 가운데 그런대로 마쳤다. 동별로 미진한 것과 더 준비해야 할 것들을 논의 한 다음 수요일 본 촬영 때 만나기로 했다.


마침내 수요일 오후 1시 30분. 금광동 푸른학교에서 본 촬영을 시작했다. 정자 청소년 수련관 강** 선생님과 촬영을 맡은 학생들이 조명과 카메라 등 고가의 촬영 장비를 들고 오셨다. 꼭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각 동의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함께 동선을 맞추고 예쁜 손 글씨를 펼치며 촬영 전 연습을 했다. 일층에서 어린이집 친구들이 음악이 시작되면 귀여운 율동을 깜찍하게 췄다. 리허설을 포함 촬영 내내 추위에 떨면서 제일 고생한 예쁜이들이다. 카메라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미리 맞춘 동선을 따라서 유려하게 움직이며 장면들을 담았다.



그렇게 서너 차례 촬영을 반복했다. 출연자도 연출도 아마추어. 어김없이 NG가 났다. 그때마다 곳곳에서 탄식이 흘렀다. 다시 동선을 수정하고 촬영을 수차례 반복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의 몸짓과 흐름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자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기진맥진했다. 힘들었지만 알수 없는 감정이 저 밑에서 뿜뿜 솟구쳤다. 포기하지 않았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재미없어도 지는 거다. 우리는 지지 않았다. 재미있어서? 아니 이번 촬영을 통해서 푸른 학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으니깐. 이렇게 문화제 꼭지로 들어갈 립덥 촬영은 잘 마무리했다. 후반 작업만 남았다. 아니 아직 전반전도 끝나지 않았다. 더 센 놈들이 기다리고 있다. 졸업식과 문화제. 부담은 여전하지만 가장 큰 숙제 하나는 끝냈다. 뭐가 나올지 기대된다.


2012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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